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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건 Sep 18. 2024

북적이는 여름, 나주 (4)

나흘, 낯선 이름을 벗고 지평을 넓히는 사이


7시 10분

잠결에 노랫말이 맴돌았다. 곰곰이 들어보니 양희은의 ‘엄마가 딸에게’의 가삿말이었고, 순간 내가 어디에 있던가를 혼란스러워하며 눈을 떴다. 사감 선생님께서 준비하신 오늘의 기상송이었던 모양이다. 전하는 말이 참 사무치는 노래인데, 하루를 깨우는 노래로 만나니 절로 잘 살아보겠다는 다짐을 하게 된다.


8시 40분

이제 우리는 자연스럽게 진로실로 모인다. 그리고 태영 선생님은 차를 타고 드라이브를 갈 것을 제안하셨다. 선생님의 차로는 여섯 명의 우리를 담을 수 없기에, 선생님 한 분과 더 동행하여 나주 역사 기행을 떠났다. 시기가 조금 지나기는 했지만, 커다랗고 듬직한 잎에 여린 꽃이 흐드러지게 피는 풍경을 보여주고 싶다고 하셨다. 광활한 습지에 우산으로 써도 손색없을 만큼의 크고 단단한 잎, 잎이 커서 고유의 색깔이 더욱 발갛고 고귀한 홍련. 하늘은 청명하고 바람은 멎어 고요했다. 나주의 우습제는 500년 전에 조성된 저수지라고 한다. 사이에 난 길을 저벅저벅 걸으며, 그 시절의 사람에게 이 공간은 어떤 의미가 되었을지를 곱씹었다. 또 문득 자연의 분홍을 보고 한껏 들뜬 목소리로 예쁘다 하며 사진을 찍던 엄마가 떠올라 전화를 걸었다. 영상통화를 했는데 화면으로는 장소의 웅장함과 몇 안되나 고유하게 피어 있는 홍련이 담기지 않아 아쉬웠다. 짧은 연락을 마치고 주변을 둘러보니 다른 여쌤들도 엄마께 전화해 풍경을 담아 보이고 있었다. 누군가는 ‘효녀타임’이라고 불렀는데, 우리가 웃기고 기특했다.

9시 55분

다음 정착지는 느러지 전망대였다. 과거 사용되었던 뱃길과 한반도 모양의 지형을 볼 수 있었다. 해가 너무 뜨겁고, 높은 습도에 가만 서 있는 것만으로도 땀이 흐르는 날씨였지만 우리는 전망대에 올랐다. 크게 혹은 작게 투덜거리면서도 끝까지 오르는 일행의 모습이 장했다. 탁 트인 전경을 바라보며 태영 선생님께서는 역사 수업을 진행하셨다. 솔직해지자면 맥락을 제대로 따라간 구절이 없다. 날이 맑고 고요한 풍경과 드문드문 나긋한 사투리가 들어간 음성, 그리고 이따금 치고 들어오는 슴슴한 농담이 있었다. 종종 생각이 나서는 피식하고 웃을 거 같다고 생각했다.

10시 39분

투어는 끝나지 않았다. 우리는 다음 코스로 금동신발을 보러 갔다. 나주 신촌리에서 출토된 금동신발을 소개하는 박물관이었다. 천 오백 년 전, 마한 때에 만들어진 공예품으로 여러 동물과 연꽃의 문양이 섬세하게 조각된 작품이었다. 나주라는 지역이 가진 전통성을 다시금 생각해 보며, 그때와 닮은 모습으로 유지하는 듯한 나주의 풍취에 시대가 이어져 있음을 감각했다.

11시 45분

옹골찬 일정을 마무리하고 본진에 복귀했다. 나주고를 떠나고, 돌아오는 길에 마주한 풍경들이 드라이브의 맛을 톡톡히 느끼게 했다. 여유롭고 자유로워지는 듯했다. 선생님의 배려에 충만한 숨을 가지고 갈 수 있게 되었다. 학교에 도착할 때 즈음에는 소낙비가 내렸다. 정말 마른하늘에 내리는 소낙비였다. 해가 부서지는 틈으로 내리는 빗줄기에 우리는 신기해하며, 점심을 먹으러 갔다. 제육볶음과 김치전, 콩나물과 상추, 그리고 미숫가루 묵사발. 오늘도 애정이 가득 담긴 한상이다.


13시 30분

세준, 희재, 진선의 수업이 있는 날이다. 세준이 준비한 ‘AI로 서점 알바하기’는 아이들에게 가르쳐야 한다는 책임감으로 어젯밤 스크래치를 배운 배운 여쌤 덕분에(?) 순탄하게 진행이 되었고, 아이들도 직접 블록을 쌓은 대로 기능하는 프로그램에 흥미를 느꼈다. 희재의 ‘나만의 도화지’ 수업은 내 삶의 주축이 되는 가치를 찾고, 그를 시 구절 속의 단어로 찾아, 우리만의 가치를 담은 글귀를 만드는 내용이었다. 아이들은 처음에 표현법을 어려워하는 듯했으나, 곧이어 각자의 가치를 담은 언어를 이어 근사한 문장을 만들었다. 진선의 ‘북레스토랑’ 수업은 음식으로 에너지를 채우듯, 책으로 가치관을 채우는 행위의 중요성을 이야기하는 수업이었다. 서로의 편식 도서를 확인하고, 올바른 방향으로 트레이닝해준다는 콘셉트가 발칙했다.


16시 31분

아이들이 적어준 질문이 모인 여쌤 우체통을 정리했다. 번복되는 질문, 사석에서 전달해야 할 질문을 솎았다. 우리는 어떤 질문에 꽂혀서는 한참을 귀여워하거나, 무게감 있는 물음에는 어떤 내용을 담아 전해야 진중하게 담은 마음에 대한 보답이 될 수 있을지 골몰했다. 그러다 문득, 이젠 우리끼리 있는 시간에 마치 풋내 나는 학생처럼 깔깔거리고 웃는 걸 발견했다. 우리는 이제 기꺼운 사람이 되었나 보다. 이런 감정이 들 때면 나는 그리움을 조금 당겨 사용하곤 한다. 필히 그리울 순간을 자각하고, 장면을 촘촘히 기억할 수 있도록 눈동자를 떼굴떼굴 굴려 조용히 타임라인을 정리한다. 아이러니하게도 내가 가장 최근에 정립한 신념은 ‘삶은 원래 힘들다’였다. 이곳에 와서 이들과 함께 하는 내내 어떤 순간도 그렇게 생각한 적 없다. 나를 공상하게 한다.

17시 12분

배쌀빵을 사러 갔다. 여행 첫날부터 호시탐탐 노리던, 나주의 명물이라던 배쌀빵을 드디어, 사러 갔다. 계획은 빵을 픽업해서 빠르게 학교로 다시 돌아오는 것이었는데, 저녁 급식으로 크림파스타가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옹기종기 집이 모여 있는 한적한 골목과 냇가를 지나, 잔디가 무성한 성곽을 끼고 금성관을 지나 배쌀빵을 파는 카페에 도착했다. 이젠 눈에 익은 이 길을 타박타박 제 속도로 걸어 내려가는 우리가 정겹다. 배의 맛이 아니라 모양을 하고 있기에 배쌀빵이 된 배쌀빵. 나주에서 길하다고 할 수 있는 것인지 알 수 없는 식재료인 쌀로 만든, 배 모양을 하고 있는 커스터드 크림이 들어간 배쌀빵. 점심과 저녁 급식을 사수하기 위해 배쌀빵을 사러 갈 계획은 수도 없이 좌절되어 왔다. 배쌀빵의 맛보다는 이 기억이 종종 떠오를 듯하다.


17시 42분

크림파스타와 치킨, 그리고 수박. 사실 언젠가 밤에 회의를 할 적에 오늘의 저녁은 배제될 가능성이 높은 식단이었는데, 수업에서 만난 아이들이 학교에서 먹는 크림파스타가 그렇게 맛이 좋다고 소개하기에 우리의 계획은 수정되었다. 역시나 기대보다 훌륭한 건 맛도 맛이나, 영양사 선생님의 사랑이었다. 만족스러운 식사를 마치고 아삭아삭 수박을 먹는데, 영양사 선생님께서 급하게 나오시더니, 우리를 위한 순대를 찌고 있으니 꼭 먹고 가라고 당부를 하셨다. 그러고 보니 오늘 식단에 순대가 있었는데, 늦게 방문한 탓에 미리 동이 난 모양이었다. 우리는 충분히 양이 찼으나, 선생님께서는 혹여 우리가 떠날까 초 단위로 바깥을 살피며 우리가 자리를 잘 지키고 있는지 확인하셨다. 급기야는 냉동고에 보물처럼 숨겨놓으신 듯한 복숭아 요구르트 젤리를 한 봉지 씩 내어주시며 조금만, 5분만 기다리라고 하셨다. 저희 충분히 배가 찼다고, 혹시 순대가 얼마큼이나 되냐고 여쭸다. 많이는 못 했고, 1kg만 했다고 하셨다. 위기감을 느낀 세준과 수길은 급하게 일어나 급식실을 빙글빙글 돌며 조금이나마 소화를 시키려고 했고, 나는 고 자리에 앉아 내가 음식을 더 수용할 수 있을지를 가늠했다. 기다리던 순대가 나왔다. 내가 알던 순대와 다르게, 야채가 많이 섞인 찰순대였다. 맛도 단순한 당면 맛이 아니라 만두의 풍요로운 맛이 났다. 순대가 나오는 순간까지 우리는 우리를 미심쩍어했으나, 한 두 개 주워 먹어 보고는 곧 그 많던 순대가 동이 났다. 마지막까지 선생님은 뜨거운 압에 푹 쪄야 맛있는 걸 시간이 촉박해 충분히 맛있게 내어주지 못한 걸 걱정하셨다. 아이들은 이 사랑을 눈치채지 못할 테지. 나 역시도 고등학생 땐 급식 투정을 적지 않게 했으니 말이다. 참 감사한 마음이다. 잠시 머물다 떠나는 이방인에게도 기꺼이 엄마가 되어 주시다니.


21시 57분

마지막 밤을 아쉽게 보낼 순 없었다. 밤산책을 나서자고 제안했다. 우리는 십 분쯤 걸어 나가 편의점에서 각자의 맥주를 한 캔 씩 사 들고 거리를 나섰다. 선두에 서는 누군가의 발길을 따라 나주를 유랑했다. 마트와 동네 호프, 요상한 이름을 가진 마사지샵과 홈플러스, 가파른 길목 사이에 있는 교회 그리고 아파트. 골목의 식당은 저녁장사를 마무리한 지 오래고, 동네 주름을 잡는 밥집은 밤이 깊어도 바글거렸다. 담벼락에 오른 게 길냥인 줄 알았는데, 닭이기도 했다. 지도 없이 발길 따라 걸었는데, 지표가 없다는 점이 참 마음에 들었다. 시답지 않은 논쟁거리에 자와자와 하고 터무니도 없는 말에 폭소하며 거닐었다. 거리는 어둡고 공기는 찐득하고 캔은 시원했다. 밟아 본 적 없는 타지에서 낯선 이름을 벗은 이들과 함께 지평을 넓히는 경험은 짜릿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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