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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건 Sep 17. 2024

북적이는 여름, 나주 (3)

사흘, 불안의 정수는 잘하고픈 마음이라


7시 31분

여행을 떠나온 첫날부터 약을 달고 있었는데, 오늘에서야(?) 목소리를 잃었다. 이틀은 멀쩡했음을 다행으로 여겨야 하나, 대화에 끼지 못하는 시간이 얼마나 갈지 예측할 수 없음을 탄해야 하나 싶었다. 모쪼록 이날의 몸짓 손짓을 이해해 준 동지와 아이들에게 고맙다.

오늘의 태영 선생님은, 직접 키운 닭이 낳은 알을 자랑하시곤 아침을 챙겨 먹지 못한 우리에게 귀한 알을 하나씩 주셨다. 오전엔 닭모이를 주러 나가시기에, 우리를 챙겨줄 수 없다는 비보를 전하고 떠나셨다. 낭만 있다. 나는 태영 선생님의 이런 순간을 사랑했다. 아버지처럼 아침마다 여쌤을 깨워 식사를 챙기거나, 학생들에게 삼삼한 농담을 던지고 털털 웃으시거나, 우리를 위해 차를 끌고 나주 곳곳을 드라이브하며 콧바람을 쐴 수 있게 해 주시거나. 아이들 하나하나의 안부를 묻고, 아이들이 직접 고심해 작성한 진로 보고서를 챙기고, 여쌤 중 희망진로가 겹치는 아이가 있으면 만남을 요청하실 때. 아이들을 바라보는 시선이 애정이란 걸 알아서 아쉬운 부탁이 없었다. 사실 우리는, 학교 안에서 형용할 수 없는 사랑을 먹고 자랐음을. 선생님의 모습은, 나의 선생님을 곱씹으며 어떤 순간들을 떠올리게 했다.


16시 6분

오늘은 진선, 유정, 희재의 수업이 있는 날이었다. 소감을 당겨 적어보자면 교대생(사범대생)이란 이런 거구나- 싶은 수업이었다. 시간안배가 어찌나 칼 같은지, 문장 맺음새가 얼마나 정갈한지. 숙련된 이들의 노련함이 돋보이는 순간을 보았다. 진선은 ‘내가 스테디셀러라고?’란 수업을 했다. 대중에게 꾸준히 사랑을 받는 책을 우리네 삶에 비유한 수업이었다. 세상에 사랑받을 수 있는 매력이 무엇인지 고민하는 시간이었다. 유정이 준비한 수업은 ‘나 알아보기’로, 내가 가진 자아에 대해 탐구했다. 사람이 성장을 하며 겪는 정서와 그 순간들을 회고할 수 있었다. 희재의 ‘마음약국’은 시를 통해 마음을 보듬는 수업이었다. 익명으로 고민을 털어놓고, 이름 모를 타인에게서 위로를 받는 시간이 편안했다.


18시 30분

조금만 나서면 대학가가 있다고 했다. 택시를 잡아타고, 가까이 내려 추천받은 곳으로 걸어 향했다. 다듬어지지 않은 길이었다. 인도의 폭이 좁아 한 줄로 이어 걸어야 했고, 자란 풀이 무성해 발목이 간질거렸다. 그 길 위에서 누구는 주변에 사는 가족의 안부를 묻는 전화를 하고, 몇은 머리를 맞대어 저녁 메뉴를 선정했다. 녹음 진 거리를 가만 내려다보거나, 누구는 어수선한 하루라 밀린 연락을 나눴다. 줄줄이 소시지처럼 길 위를 걷던 우리는 좀처럼 같은 시선을 갖진 않았으나 같은 공간을 공유한다는 사실 만으로 충만했다. 안주를 두 개 하고도 세 개 더 주문하고, 수업의 부담에서 해방된 몇과 그저 즐거운 사람들은 하이볼과 잎새주를 마셨다. 지금의 고등학생과 공감대를 형성할 수 없던 2세대 아이돌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며 우리는 하나가 되었다.


22시 4분

기숙사로 돌아와서는, 스크래치 강습이 시작됐다. 세준 쌤이 내일을 위해 준비한 수업은 ‘AI로 서점 알바하기’로 머신러닝을 활용해 책의 표지를 학습시켜, 스크래치를 통해 책의 장르를 맞추는 모델을 설계하는 것이 수업의 포부였다. 술기운의 여운에 취해 있던 것이 수업을 진행해야 한다는 책임감으로 정신이 맑아졌다. 이전에 올려준 튜토리얼 영상을 보고, 스크래치 블록을 하나씩 쌓아 보고, 질문하는 우리의 모양새가 웃기고 재밌었다. 수업을 위해 다섯 명의 여쌤을 숙련된 조교로 만드는 세준쌤..의 계략이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책임감으로 배우는 스크래치는 능률이 좋았고, 모두는 수업도 결국 성공적으로 마쳤다.

23시 2분

운동화를 갈아 신으러 기숙사 건물에 들어섰다가 사감선생님을 마주쳤다. 늦게 들어올 것이 혼날까 묘한 긴장감을 느끼고 있었는데, 별안간 세미나 제안을 해오셨다. 기숙사에 있는 아이들끼리 매주 화요일, 복도에 둘러앉아 공부가 어떻게 잘 되고 있는지, 요즘 고민은 무엇인지를 토로하는 시간이 마련되어 있는 모양이다. 제안에 못 이겨 아이들이 있는 복도에 가니, 아이들은 바닥에 둘러앉아 있고, 유정과 나를 위한 통나무 의자 두 개가 놓여 있었다. 한밤중에 진행되는 토크쇼라니 흥미로웠다. 호기롭게 질의를 시작했는데, 아이들의 질문이 품은 불안이 그때의 내가 겹쳐 보여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그저 응원했다. 고유한 아이들이 다치지 않고, 지치지 말고 스물을 맞이하길 바라는 마음을 담아 전했다.

23시 30분

러닝을 했다. 우리 중에는 러닝을 아주, 매우, 너무나, 굉장히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 세준과 함께 하는 여행에서 한 번은 달려야 할 운명이었다. 나주고에 방문하자마자 운동장에 있는 트랙에 감탄하던 세준과 ‘한 번쯤은 운동해야지’라는 책임감으로 터벅터벅 나온 유정과 함께 하는 저녁 운동이었다. 유정은 몸을 풀며 “운동 나오지 말 걸.”이라고 이야기했는데, 이전에 들어본 적 없는 화법이라 피싯하고 웃음이 샜다. ‘러닝의 기초는 자신의 속도에 맞춰 쉬지 않고 20분을 뛰는 것’이라고 배웠다. 러닝 외길인생 정 선생의 가르침이었다. 달리는 건 러닝머신 위에서나 익숙했는데, 보이는 시선이 변화하는 달리기라니 새로운 매력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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