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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건 Sep 16. 2024

북적이는 여름, 나주 (2)

이틀, 같은 경험에도 시차가 존재하니



8시 30분

오늘 태영 선생님은 아주 중요한 공지가 있는 것처럼, 건물 본관 1층의 교무실 안으로 우리를 데리고 들어가셨다. 그리고는, ‘가장 맛있는 커피를 내려먹는 방법’을 일러주셨다. 교무실에 들어서서 큰 종이컵을 하나 꺼내어 들고, 커피머신에서 에스프레소를 추출한다. 그리고, 바로 옆에 있는 정수기에서 찬 물을 두 모금 정도를 넣어 온도를 조금 낮추고, 그대로 왼쪽에 난 문을 열고 나가 맞은편에 있는 창고에 들어선다. 그럼, 카페에서 쓸 법한  근사한 제빙기를 마주할 수 있는데, 기호에 맞게 단단한 얼음 조각을 채워 넣으면 된다는 이야기를 여섯의 여쌤 한 명 한 명에게 모두, 꼭꼭 씹어 설명해 주셨다.

12시

첫 수업을 앞두고 급식을 먹으러 갔다. 그런데 세상에. 곡물이 푸짐한 잡곡밥에 깨가 솔솔 뿌려져 있는 배추김치라니. 야들한 닭다리살로 만든 찜닭은 은은하게 카레 향이 나니, 밥과 비벼먹기가 좋았고, 잡채의 당면은 촉촉하고 푸짐한 야채와의 궁합이 좋았다. 순두부찌개는 재료가 아낌이 없어 한아름씩 떠먹어도 아쉬움이 없었고, 머리끝과 꼬리까지 가득 팥이 찬 붕어빵과 진득한 찰기와 달큼함이 느껴지는 찰옥수수까지….. 수업 첫날 점심을 먹고 우리는, 여행 일정을 대대적으로 수정했다. 한 주간의 식단을 공유하고, 머리를 맞대어 취할 식사와 취하지 않을 식사를 골똘히 고심했다. 수업과 여행에 대한 논의보다 진중했고, 오래 고민했다.

17시 17분

첫날의 오리엔테이션과 수업이 끝나고, 카페 ‘마중 3917’에 갔다. 오래된 한옥을 가꾸어 카페로 운영 중인 곳이다. 시그니처를 먹어봐야겠다고 다짐한 나와 진선, 유정은 나주배 스무디를, 새로운 걸 시도해보고 싶던 세준은 나주배 파르페를, 하루가 고되었던 희재는 초코라테를, 목이 말랐던 수길은 크림 라테를 먹고 나주배 스무디를 하나 더 마셨다. 작고 예쁘게 빚어진 배 양갱도 세 개 사서, 사이좋게 나누어 먹었다. 고즈넉한 한옥에 앉아서 오늘 수업을 회고했다. 우리는 ‘북적이는 여름’이라는 테마를 가지고 수업을 준비했다. 나흘동안, ‘책’과 관계된 요소를 주제로 ‘나’, ‘관계’, ‘세상’에 대해 논하며 여행하는 선생님들이 추구하는 가치를 심고자 했다.

유정은 아이들과의 첫 만남이자 오티시간을 앞두고 정말 많이 긴장했지만, 특유의 강단 있는 말투와 음성에 아이들은 유정에게서 두려움을 살필 수 없었으리라 생각했다. 첫날 유일한 수업 진행자였던 수길은 ‘두근두근 스테디셀러 육성’이란 이름의 수업을 했다. 유년시절 영어시간에 해봤을 법한 ‘마리오게임’을 오마주 삼아 진행 된 수업은 게임과 스테디셀러가 되기 위해 필요한 덕목에 대해 논의하여 투자하는 형식이었다. 운, 재미, 교훈과 같은 덕목에 매기는 가치에 따라 운명이 달라졌는데, 아이들의 가치관을 엿볼 수 있는 시간이 됐다. 쾌하나 무게감 있는, 본인이 가장 잘 살릴 수 있는 수업이었다.

우리는 첫날의 부담을 덜어낸 동지들에게 축하를 건네고, 서로 파악한 아이들의 특성을 공유했다. 다음 날에는 어떻게 모둠 짓게 하는 게 좋을지, 참석 인원은 어느 정도로 파악하면 좋을지, 수업을 어떤 갈래로, 어떤 메시지를 담는 게 좋을지 따위를 열 띄게 이야기 나누다, 그럼에도 하루가 무사히 흘렀음에 안도하며 편안한 표정을 나눴다.

21시 34분

어김없이 남자 기숙사의 회의실에 둘러앉았다. 내일의 수업과 섬세한 부분을 챙기는 시간이었다. 문득 아이들을 위한 수업 시간표가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고, 세준이 제작했다. 그리고 진선이 오리고 자리에 붙여 나주고의 ‘북적이는 여름’ 시간표가 완성되었다. 쿵작이 잘 맞았다. 함께 하는 내내 유하고 선하며 잘 들어맞아 즐거웠다.

문득, 우리는 서로의 이름을 궁금해했다. 내가 가진 이름이 세상에 어떤 뜻을 틔우는지에 대해서. 누군가와 이름에 관하여 이야기 나눌 때마다 새삼 놀라며 흥미로워하는 건, 언제나 이름은 그 사람을 잘 표현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귀한 인연의 이름이 품은 뜻을 알게 되는 순간을 애정한다. 이들의 이름을 곱씹으면서도 생각했다. 품은 뜻대로, 세상을 유영하는구나. 더 귀하게 불러주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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