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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건 Sep 15. 2024

북적이는 여름, 나주 (1)

하루, 낯선 곳에서 마주하는 익은 감각

프롤로그.

인연이 스미는 건 순간이다. 그리 귀하지 않던 것이 사실은 살을 아주 가까이 맞대고 있음을 알게 되거나, 주변의 소란스러운 공기와는 관계없이 내 안이 안정되었다고 느낄 때. 그런 순간을 공유한 이들과의 이야기를 담았다.  지나고 보니 신기루처럼 희미해지는 게, 사실은 지독한 공상에 빠진 건 아닌가 의심이 든다. ‘청춘’과 ‘여행’을 키워드로 가진 우리의 여정은 찬란했다. 한여름에 만난 나주의 순간을 오롯이 기억할 수 있길 바라며.


하루.

16시 10분

나주역에 속속들이 도착하는 여쌤을 반겼다. 두 번의 외부 워크숍 이후 부쩍 가까워진 마음이라, 간만에 맞이하는 얼굴이 반가웠고 함께 할 여정이 설레어 조금씩 동동거렸다. 택시를 타고 고등학교로 향했다. 택시를 타자마자, 전라도의 사투리가 훅 하고 들어왔다. 이 지역을 방문할 때면 익숙한 친지의 집에서 지내고 함께했던 터라 대중교통을 이용하며 낯선 타지의 정취를 진득하게 느낄 겨를이 없었다는 것이 문득 생각이 났다. 짐을 한가득 들고 온 타지인이자, 고등학생은 지나 보이는 사람들이 종착지를 고등학교로 가지고 있는 것이 의뭉스러운 듯하셨다. “저희 동아리 활동하는데요, 이 근처로 놀러 왔어요~”하고 말하며, 놀거리와 먹거리를 자연스럽게 붙여 여쭸다. 특유의 푸근한 말씨를 품고 기사님은 당신이 생각하시는 곰탕 원탑집과 고등학교 근처의 오래된 분식집 하나를 일러주셨다. 차에서 내리는 순간까지 여행객의 안녕을 빌어 주셨다. 4박 5일간의 일정 중에 택시를 여러 번 이용했는데, 언제나 정겹고 친절하셨다. 먼 걸음 온 여행객의 시간이 안온하길 바라는 마음이 깃든 대화가 많다는 점이 내내 우리의 여행이 만족스럽다고 생각한 이유 중 하나였다.

16시 40분

나주고에 도착하니, 태영 선생님께서 맞이해 주셨다. 선생님을 따라 기숙사에 들러 배정받은 방에 짐과 침구를 가볍게 풀었다. 아이들이 사용하지 않는 방 중 하나를 사용하게 되었는데, 문을 열자마자 훅-하고 익숙한 냄새가 풍겼다. 공기를 떠도는 곰팡이 포자 냄새. 내가 학생이던 시절의 기숙사에서도 같은 냄새가 났다. 눈으로는 검게 핀 모습을 볼 수 없는데, 공기 안에 알알이 부서져 생활하는 내내 곁을 맴돌던 정취. 기숙사에서의 기억이 좋진 않다. 학교 일과 이외에도 타인이 정한 시간에 맞춰 생활하는 것이 여간 답답했다. 하루는, 사감선생님을 꿰어, 자습시간에 방에 홀로 있는 시간을 얻었다. 네 명이서 쓰는 공간에서 오로지 혼자일 수 있는 시간은 흔하지 않은 것이라 귀했다. 사람으로 복작하지 않고, 차분하게 내려앉은 공기 중에 톡 쏘는 곰팡이를 느꼈다. 어느덧 익숙해진 이 냄새가 차라리 편안하다고도 생각했다. 낯선 곳에서 별안간 마주한 익숙한 냄새에 그 시절을 다시금 훑었다.

17시 13분

선생님과 함께 곰탕을 먹으러 갔다. 인터넷을 본 나주곰탕 거리의 맛집이 이러이러하다는데 맞는지 여쭈었다. 선생님께서는 단호한 표정으로 그 집은 국물 맛이 재미지지 않은 것이, 지금 함께 가는 식당이 제일간다고 이야기하셨다. 이 식당만의 특별한 재미진 국물 맛을 느낄 수 있다는 수육국밥을 한 그릇씩 먹었다. 풍미가 깊고, 다채로우나 끝 맛이 깔끔한 국물과 시큼하고 적당히 무른 깍두기의 조합이 좋은 식사였다. 식사를 마치고 선생님은 아주 자연스럽게, 거리 앞에 있는 역사 유적으로 우리를 안내하셨다. 그렇게 우리는 금성관, 정수루, 그리고 나주목사내마 역사 투어를 하게 되었다.

다시 곱씹어도 피식하고 웃음이 나오는 게, 선생님의 대화와 설명 사이에는 경계가 없었다. 밥 먹고 가벼운 산책을 하자는 듯이 이끌린 걸음 앞엔 금성관이 있었고, 하시는 말씀에 귀 기울여보니 태조 왕건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계셨다. 나주를 구성하는 역사에 대해 박학다식하신 것이 멋있다고 생각하는 찰나, ‘정체성’에 대한 이야기를 해 주셨다. 내가 몸 담그고 사는 곳에 대한 이야기를 아는 것. 그렇게, 나를 구성하는 환경을 알고 존재의 당위를 확립해 나가는 것. 당신의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다 역사공부에 이르렀다는 설명이 좋았다.

가벼운 산책(?)을 마치고, 몇몇은 학교로 걸어 돌아왔다. 걷고 보니 십분 남짓 되는 거리였다. 아담하게 만개한 꽃이 후들거리고, 성벽을 둘러싼 잔디가 찰랑였다. 단층 주택들 사이의 좁은 골목, 그리고 군데군데 핀 들꽃과 풀을 보며 걷다 보니 사람냄새가 깃든 길목에 들어 선 이방인임을 체감했다. 개울은 흐르고, 찌는 태양은 따갑고, 그 덕에 초록은 빛나는 게 잊지 못할 시골의 정취를 보았다.


21시 27분

남자 기숙사의 작은 회의실에 모였다. 다음날의 수업과 여행 계획에 대해 이야기 나눴다. 정확하게 이야기하자면 실없는 이야기 하면서 ‘시시덕’ 거렸다. 그러다 문득, 우리가 언제 이리 가까워졌나, 헤픈 말과 헤픈 웃음이 어색하지 않은 사이가 된 게 되려 낯설었다. 우리가 쌓은 시간을 한 번씩 꺼내 보고 혼자 앓을 것을 직감했다. 모조리 기억할 수 있도록 새기고 기록해야지. 하고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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