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야의 아홉 번째 레터
오늘이 입추라니 믿어져? 지치지 않고 내리쬐던 더위가 한풀 꺾인듯한 8월 초순이야. 더 이상 여름방학 따위는 맞을 수 없는 직장인이지만, 여전히 언젠가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조용히 파도 소리를 들으며 까무룩 잠이 드는 여름을 상상하곤 해.
연이들은 영화를 보면서 마법 같은 경험을 한 적 있어? 내게 가장 강렬했던 기억 중 하나는 윤가은 감독의 영화 <우리들>을 봤을 때야. <우리들>을 보기 전까지 나는 초등학생 언저리의 아이들을 정말 싫어했었어. 시끄럽고 미성숙한 동물 같았거든. 단 한 번도 아이였던 적 없는 것처럼, 아이는 아무런 감정도 생각도 느낄 수 없는 충동으로 가득 찬 존재라고 여겨왔어. 그런 나를 <우리들>이란 영화가 단숨에 뒤바꿔 놓은 거야. 내 어린 시절을 기억하게 하고, 어렸던 나도 아픔과 고충이 있었다는 걸 떠오르게 해준거지. (초등학교 6학년 때 왕따당했던 적이 있는데, 학교가는게 지옥같았던 기억이 나.) 그 뒤로 나는 아이들을 사랑하게 됐어. 영화는 내게 그런 존재였어, 내 인생을 바꾸어 놓기 충분한 저력을 지닌 것! 맞아, 오늘은 영화 얘기를 하려고 해.
오늘 소개할 <까마귀 기르기> 역시 내게 큰 영향을 준 영화야. 서울아트시네마의 2024 시네바캉스 프로그램 '유령들의 밤'에서 상영한다는 소식을 보고 극장을 방문했어. 큰 스크린으로 보는 영화는 역시 관람의 질을 달리 하나 봐. 이미 봤던 영화인데도 새롭고 그 여운이 여전히 가시질 않네.
"까마귀를 길러라, 그러면 네 눈알을 파먹을 것이다."
조금 섬뜩한 이 문장은 스페인의 속담이야. 정성 들여 보살핀 대상이 결국 나를 배신하리라는 무시무시한 예언이지. 애지중지 키워놓은 검은 새가 결국 내 눈을 파먹을 때 '나'는 무슨 생각을 하게 될까? '괜히 키웠다', '잘못 키웠다', '다른 새를 키울 걸'......
영화 <까마귀 기르기>는 방학을 맞은 여덟 살배기 주인공 '아나'가 새벽에 아버지의 죽음을 목격하는 것으로 시작해. 사실 아나 주변의 삶은 몽땅 죽음으로 가득 차 있어. 몸이 허약한 엄마는 스트레스와 병으로 이미 세상을 떠났고 반신불수의 할머니는 창가에 앉아 죽는 날만을 기다리고 있어. 엄마의 언니인 파울리나 이모가 아나를 포함한 세 자매를 돌보지만 이모의 사랑은 어딘가 위압적이고 책임감에 젖은, 미적지근한 온도일 뿐이야.
누구보다도 사랑받아야 할 시기에 아이들은 어른들이 최소한의 돌봄만 제공하고 사라진 자리를 그들만의 놀이로 채워. 소꿉놀이를 하듯 이모의 화장품을 훔쳐 바르고 가발을 쓰고, 어른을 흉내 내지. 대사는 이런 식이야. "이 늦은 시간에 어디 갔다 와요? 당신이 누구와 있었는지 다 알아." "... 목소리 낮춰. 애들 듣겠어." 아이들은 계속해서 어른을 흉내내. 그들을 마음 다치게 하는 건 바로 어른임에도, 육체에 갇힌 무력감을 감각하듯 조금이라도 어른에 가까워지기 위해 노력해.
성정이 유독 예민하고 심약한 아나는 엄마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해. 그래서 특유의 상상력으로 일상을 엄마의 환영으로 채워 나가. 잠깐의 그리움은 해결되지만 아나의 일상은 점점 그리움과 환영이 뒤섞인 트라우마로 물들어. 아나가 가장 선명하게 기억하는 엄마의 모습들은 언제나 아빠의 무관심과 외도로 불안에 떨고 있거나, 지병으로 고통에 몸부림치거든. 아나의 기억은 모두 엄마의 고통이고, 엄마의 고통 없이 아나는 그녀를 기억해 낼 수 없어.
어릴 땐 시간이 아주 길고 영원하게 느껴지는 때가 많잖아. 영화는 그런 아이들의 시간 감각을 아주 탁월하게 표현해. 밤은 끝없이 길고 그 시간을 모두 혼자 견뎌야 하지. 불면증에 시달리는 아나는 밤마다 엄마의 환영을 봐. 눈을 꼭 감는다. 눈을 뜨면 엄마가 보인다. 돌아오지 않는 아빠를 기다리며 초조해하는 엄마의 유령이 복도를 지나쳐. 그런 엄마를 보고 미소 지어. 엄마의 유령을 보는 것으로도 좋다는 듯, 아나는 그렇게 점점 까마귀가 되어가.
<까마귀 기르기>는 프랑코 군부 독재 치하에서 살아간 스페인 소시민들의 트라우마에 관한 알레고리야. 폭력적이고 억압적인 아나의 아버지는 독재자 프랑코를, 어머니는 체제에 순응했던 스페인의 국민을, 아나와 자매들은 그 자식을 의미해. 독재자 프랑코가 오랜 세월 길러온 체제는 영화 속 아나 같은 까마귀들에 의해 영원히 눈이 멀어버릴 거라는 일종의 경고인 거지. 전쟁 이후로도 끔찍한 군부독재에 시달린 스페인의 아픔을 이해한다면, <까마귀 기르기>라는 제목과 이 영화를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거야.
영화에 계속 등장하는 기묘한 장면이 있는데, 그건 바로 냉장고 속 닭발을 보여주는 거야. 아나가 냉장고 문을 여닫는 장면이 자주 등장하는데, 한켠에는 닭발이 담긴 접시가 놓여있어. 불필요한 닭발 인서트가 계속 등장하는 게 의아했는데, 영화의 제목이 <까마귀 기르기>(영제: Feeding Crow) 라는 점을 생각해 본다면 저 다리들은 이미 일찍이 눈알을 파먹으려다 실패한 까마귀들의 희생을 의미하는 건 아니었을까? 연이들 생각은 어떨지 궁금하다.
솔직히 나는 소위 말하는 '영태기(영화 권태기)' 상태에 꽤 오랫동안 머물러 있었어. 이제 더 이상 예전과 같은 애정을 찾기는 어렵지 않을까-하고 반쯤은 포기한 상태였지. 그런데 극장에서 <까마귀 기르기>를 보다 왈칵 눈물이 나서 깜짝 놀랐어. 건조한 태도로 영화를 보고 있었다고 생각했는데, 영화 속 안나의 처연한 얼굴이 영화사에서 왜 그렇게 유명한 페르소나가 되었는지 이해하게 됐어. 스크린 너머에 등장하는 아이의 슬픔이 곧 나의 슬픔이 될 때, 영화는 더이상 '그냥' 영화가 아니게 돼.
생각해보면 영화를 보는 행위는 참 기묘해. 어두컴컴한 암흑 속에서 스스로의 의지로 신체의 자유를 결박한 채 한 곳만 봐야 하잖아. 참아가며 고문받는것과 다름 없을 때도 있지. <까마귀 기르기>를 보는 시간도 조금은 비슷했어. 아나의 슬픔을 꼼짝없이 받아들여야 할 때, 괴롭고 빨리 이 시간이 끝나기만을 바랐어. 옆자리에 앉은 사람의 한숨 소리는 흐느낌을 참는 소리로 변하는걸 들으면서 같은 아픔에 공감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
영화가 끝나자 그런 생각이 들더라, 훌륭한 영화가 내게 스며들기 위해서는 이렇게 결박 당한 채 끝까지 소화해내는 인내도 필요하다고, 얼마든지 좋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