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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완 Apr 13. 2024

자갈 바다

주말부부 베타 서비스 종료

친구의 여행이 끝났다. 포옹과 함께 친구를 보내는데, 택시기사님이 창문을 열고 말을 걸어왔다. 후에 친구에게 물어보니, 포옹하고 헤어지는 게 안쓰러워서 못 가겠다는 다정한 능청이었다. 친구는 떠나고, 남편이 내려왔다.


남편은 평일에 근무를 하고, 휴일을 길게 만들기 힘들다. 그래서 여행의 막바지인 금요일에 여수의 나를 찾아왔다.

떠나는 이는 잘 살고, 남겨진 이는 외롭다. 나는 비일상의 공간에서 비일상의 나날을 보내느라 괜찮았고, 그는 내가 사라진 일상을 견뎌야 했다. 그가 공연을 준비하느라 한 달 반 동안 청송에 표류하던 시기에 내가 그랬듯이 아주 외롭고 헛헛했겠지.

어쩐지 어색하게 느껴지는 남편을 품에 안았다. 그리웠던, 토실하고 커다란 품과 남편 냄새.




만성리 검은모래해변에는 흑임자마냥 어두운 모래와 다양한 크기의 자갈이 가득하다. 자갈의 크기는 정말 다양하다. 바위를 깨트리면 돌멩이, 돌멩이를 깨트리면 자갈돌, 자갈돌을 깨트리면 모래알이라는 노래 가사를 기준으로 보면 돌멩이와 자갈과 흑임자색의 모래알이 혼재하는 공간이다. 여수의 바닷물은 맑은 청회색이어서, 해변을 걷다 보면 아주아주 커다란 강이나 계곡을 걷는 것 같은 기분도 든다.

검은모래해변에는 쉬이 갈 수 없다. 차 한 대가 고작 지나가는 터널, 동굴이라는 말이 훨씬 잘 어울릴 폐쇄된 길목을 지나야 한다. 차 한 대가 지날 폭이기 때문에 차들은 차례를 지킨다. 건너편에서 차가 다 올 때까지 이쪽에서는 움직일 수 없다. 기다려야 한다, 느긋하게.

우리는 뒤뚱뒤뚱 해변을 걸었다. 모래에 발이 푹푹 빠지고, 자갈이 발밑을 찌르는 다채로운 감각들. 뒤뚱거리며 해변을 걷는데, 바짓단을 무릎까지 말아 올리고 맨발로 바다를 걷는 아저씨가 보였다. 그의 낭만이 부러웠다. 나도 양말과 신발을 벗고 바다를 밟았다. 아뿔싸, 물 온도를 좀 체크하고 담글걸. 물은 얼음처럼 차갑고, 가시밭길을 걷는 듯 발바닥이 아프다. 3분쯤 걷고 깨달았다. 한계다.

남편의 등에 업혀 바위계단으로 옮겨졌다. 지나가는 이의 낭만을 흉내 낸 소감은 낫배드. 이제 어디 가서 봄바다를 맨발로 걸어봤노라 할 수 있으니.


바닷가에 위치한 분식집에서 설탕 바른 핫도그를 사 먹었다. 우리는 분식집 이름이 왜 불바다일지 생각했다. 기본에 충실해서 만족스러운 맛이었고, 여전히 상호가 불바다인 이유가 궁금하다. 해변길의 끝에다 우리는 돌탑을 만들었다. 돌에게 소원을 읊어가며.




연애 시절 여수에 와본 적이 있다. 이순신광장을 걸으며 지난 추억을 나누었다. 공유하는 추억이 있다는 것, 추억을 이야기하며 시간을 채울 수 있다는 것.

남편을 데리고 전날 먹었던 게장집을 방문했다. 느긋하게 배를 채우며 계속 그를 보았다. 내가 게장 반 마리에 밥 반 공기를 먹는 동안 그는 게 한 마리와 양념 게장 한 조각과 전복장 하나를 먹었다. 밑반찬을 골고루 먹었고, 밥은 한 공기를 거의 비웠다. 마음이 편했다. 내가 내 몫을 다 하지 못해도 그가 도와줄 테니 괜찮다. 나는 한 공기를 다 비웠고, 남편은 한 공기 하고도 반 공기를 먹었다.


숙소에 돌아와 낮잠을 자고, 일어나서 과자를 먹으며 영화를 봤다. <시니어 이어> 불의의 사고로 혼수상태 20년 만에 눈을 뜬 여자의 이야기. 우리는 너무 모든 것을 경쟁하고, 경쟁하다 못해 시기하고, 우리는 시기와 증오와 미움을 구태여 구분하지 않고, 그래서 사랑할 수 있을 이들을 미워한다. 그래서 우리는 후회하며 살 수밖에 없는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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