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아침에 만난 할머니가 물었다. 은행은 아직 안 열었지? 8시 40분이었다. 아무래도 기다리셔야겠다고 답했다.
추측컨대 속 터놓을 마땅한 이 없는 그 노인은 나를 붙잡고 한참을 하소연했다. 아들이 돈을 달래서, 돈 빼갈까 봐 간다, 내 일평생 돈 벌어서 결국 누구를 주겠냐, 체육관 차려줬더니 말아먹어놓고, 그렇게 욕을 하고, 횡단보도 신호를 기다리는 내내 그런 말들을 늘어놓았다.
신호를 건너고 은행 앞에 섰는데 아직 45분이었다.
아직 은행이 안 열었어요, 했더니 그 앞 정류장 의자에 앉아 기다리면 된단다. 은행이 열리는 15분 동안 하소연을 더 들어드릴 수 있을까, 가늠하다가 끝내 작별을 고하고 떠났다.나는 당신의 15분이 못내 마음에 걸리는데, 할머니는 연신 내게 고맙다고 했다.
오늘은 나의 두 번째 출근 날이다.
11월까지는 취직하지 않고 글만 쓰겠다고 한 게 엊그제인데 어쩌다 보니 취직을 했다. 어쩌다 면접을 봤는데 당일에 붙어서 어제부터 회사를 다니기 시작했다. 세상 일은 어떻게 될지 모르는군.
출근길에는 노트 한 권이 동행한다. 회사에서 전달받은 사항, 각종 필기 따위를 한가득 적어두고 집에 돌아와 다시 보기 쉽게 정리한다. 취직과 동시에 결심했다. 이 한 권의 노트가 다 찰 때까지만 다니리, 그 후에는 내 책을 내고 출판사 창업을 해보리.
목표는 여전하다. 올해 안에 소설과 대본을 완성해 책으로 엮어내기.
처음 보는 어린 여자에게 하소연을 실컷 늘어놓아야 숨통이 트이는 노파를 뒤로 하고, 풀 데 없는 속상함을 길에 버러 두고 계단을 오르며 생각했다. 그렇군, 돈을 번다는 건, 이 정도의 사치도 용납되지 않는 거군.
나는 택시가 잡히지 않아 발을 구르는 중년 취객들에게 어플로 택시를 불러주는, 소박한 친절을 사치처럼 남발하기 좋아하는 사람인데. 길 모르는 이 길 찾아주다 돈이나 뜯기는 조금은 오만하고, 그래도 다정하고 싶은 사람인데. 돈을 번다는 건 그 소박한 사치도 용납되지 않는 거군.
내가 글이나 쓰고 책이나 냈음 좋겠다. 그래서 그냥 길바닥에 하소연 줄줄 흐르는 누구를 또 만나면 우유부단하게 곁에 앉아 은행 문 열리기를 같이 기다릴 수 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