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복에 대한 강화길 작가의 시선을 따라가보며
제사를 지내고 있을 때의 일이다. 나는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절을 맨 뒤에서 해야 했다. 그 당시 나는 맨 앞에서 하고 싶었는데 주변 어른들은 어떻게 여자가 남자보다 앞에서 절을 하냐고 꾸중을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 웃기는 일이다. 고작 절하는 순서 가지고. 여덟 살짜리 여자아이에게 빈난을 쏟아붓던 그 상황이. 하지만 제일 웃긴 것은 바로 이런 상황이 바로 ‘나’를 포함한 많은 여성들이 직면했던 현실이라는 사실일 거다.
음복, 과연 누구의 복일까
음복은 제사를 지내고 난 뒤 제사에 쓴 음식을 나누어 먹는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나누어 먹는다는 본래의 의미가 무색하게도 소설〈음복〉에서 나타나는 ‘나’와 남편인 ‘정우’ 그리고 식구들의 상황은 완전히 다르다. 이러한 상황을 드러내는 장치는 소설 내내 등장한다. 가령, 드라마라는 장치가 그렇다. 본 소설에서 드라마는 총 2가지가 존재한다. 하나는 ‘나’와 ‘정우’가 즐겨보는 76짜리 중국 드라마이고, 또 다른 하나는 치매를 걸린 할머니가 현실과 헷갈려 하신다고 전해지는 일일 드라마이다.
전자의 경우에는 ‘나’와 정우‘의 상황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장치로서 작용하는데, 자신의 아이까지 속이고 악역 못지 않은 주인공을 바라보며 ‘정우’는 ‘그만한 드라마가 없다’며 시시해한다. 반면 ‘나’는 음복의 과정을 소설 속에서 거치며 속인 그녀의 아이가 딸이기를, 또 딸이라면 그녀만은 자신이 겪었던 모든 것들을 알지 않기를 바란다.
그렇다면 여기서 의문점이 생긴다. 음복의 과정이 어떤 과정이기에 ‘정우’는 어떤 드라마를 바라보듯 시시한 것처럼 여기고, ‘나’는 누군가는 그런 과정을 겪지 않기를 바라는 것일까. 이를 파헤치기 위해서는 더 서사를 꼼꼼히 살펴보아야 한다.
처음 소설은 ‘ 고모가 그 집의 악역이었다’라며 악역의 존재를 확인시킨다. 하지만 이러한 작가의 문장은 우리에게 질문하게 만든다. 왜 고모가 그 집의 악역이 될 수밖에 없었냐고 말이다. 그 뒤로 서술되는 고모의 행태를 보면 전형적인 악역 같아 보인다. 가족 사정을 꼬치꼬치 쓸데없이 깨 묻는 그런 사람 말이다. 이는 ‘나’의 어머니도 비슷했다. 외삼촌네 아이들에게 친구나 성적에 관해서 묻는 태도를 보면 고모와 다를 게 없다. 그런 어머니에게서 ‘나’는 늘 외사촌들에게 대답했었다. ‘우리 엄마한테는 나밖에 없으니까. 나만은 엄마를 절대 미워하면 안된다고’ 말이다. 이러한 상황은 어떻게 보면 매우 폭력적인 상황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결국에 엄마에게 있어서는 자신을 이해할 수 있는 존재가 ‘나’ 밖에 없기에, 자신의 상황을 다 허용해줄 수 있는 거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하소연을 하고, 짜증을 내고, 온갖 말을 쏟아내어도 엄마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너만은 이해해달라고 하는 것일 거다.
이는 고모가 겪는 상황과도 이어진다. 고모는 분명 집안에서 악역이었지만, 가부장적이고 제멋대로인 할아버지를 남편으로 둔 할머니에게 있어서는 유일한 이해자였다. 그렇기에 할머니는 생각했을 거다. 고모만큼은 자신이 어떤 짓을 하더라도 결코 떠나지 않을 거라고 말이다. 이는 그녀가 ‘정우’를 싫어하는 이유와도 일맥상통한다. ‘정우’는 할아버지와 매우 비슷한 인상을 지닌 사람으로 묘사된다. 가령, 표정에 대한 묘사가 그와 비슷하다고 언급되는데, ‘나’는 그 표정을 보며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얼굴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여기서 웃긴 점은 이러한 표정을 지을 때 무지와 관련된 서사가 등장한다는 점이다. 후반부 할머니의 치매에 대해 알게 되는 장면이 그렇다. 그는 할머니의 치매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렇기에 처음에는 그 사실에 놀란 듯 보이지만, 이내 고요한 표정을 지어 보인다. 처음부터 아무것도 몰랐다는 듯이 말이다. 이는 연쇄적인 장치로서 등장하는데, ‘나’가 이러한 ‘정우’에게 반했다는 사실은 다시 독자에게 할아버지를 닮은 정우, 그러니까 아무것도 모르고 가부장적인 세상에서 권력을 당연한 권리처럼 받았던 정우에게 내가 반했다는 사실이 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악역의 연쇄를 끊는 일은 일어날 수가 없다. 아무것도 모르는 정우에게 반하고, 또 그 상황에서 고모나 ‘나’의 엄마와 같은 악역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연쇄의 폭력은 후자의 경우, 할머니가 보시던 일일 드라마라는 장치 속에서도 나타난다. 작중 언급에 따르면 할머니는 치매에 걸려 현실과 일일 드라마를 혼동하신다고 한다. 실제로 그런 묘사가 등장하기도 하고, 나중에는 ‘정우’가 돌아가신 할아버지를 헷갈리기도 한다. 이러한 상황은 결국에는 일일 드라마처럼 어떤 이의 시선에서는 그들의 이야기가 막장으로 가볍게 치부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기에 이러한 그들의 이야기는 ‘나’가 제사를 가지 않은 이후에도 시어머니가 주신 르쿠르제 냄비에 정우가 할아버지가 좋아하던 토마토 고기찜을 가끔 해 먹는 것처럼, 엄마에게서 나로 혹은 할머니에게서 고모로 계속해서 이해라는 폭력을 잇고 있는 것일 거다.
이외에도 〈음복〉에는 다양한 장치들이 등장한다. 가령, 할아버지가 베트남 참전을 하셨다는 소식을 정우가 ‘나’에게 알리지 않는다는 점이라든지, 고모가 진중하고 속이 깊으신 분이라면서 일관되게 무지의 행태를 보이는 정우의 행동이라든지 또 할아버지가 좋아하시던 토마토 고기찜을 정우도 좋아했던 점이라든지, 마지막에는 믿고 있었던 시어머니 마저 정우에게 무지의 권력을 이어가게 만든다는 점들이 그렇다.
그런데도 음복이라는 제목을 보면 그 모든 폭력이 무의미해지는 것 같다. 결국에는 복이라는 의미로 받아들여지는 이 관례, 즉 음복이라는 과정은 현실에서 누군가에 대한 폭력이 아닌, 정우와 할아버지와 같은 무지한 권력을 위한 하나의 나눔의 과정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조금이라도 알기 바라며
그렇다면 이 굴레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할까. 나는 솔직히 아직도 이 질문에 대한 답을 모르겠다. 이러한 구조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아예 뿌리부터 이 관례를 없애버려야 하겠지만, 그런 일을 시행하기 어려운 것이 막상 우리가 닿아있는 현실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계속해서 이러한 것들에 대해 이야기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을 당연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도. ‘나’와 같은 현실에 맞닿은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이 소설을 읽는 모든 사람들이 ‘정우’와 같이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 단순히 무지해서 행복한 사람이 되기보다는 이런 현실에 대해 조금이라도 알면서 ‘나’를 포함한 수많은 여성들에게 계속해서 이야기해줬으면 좋겠다. 우리는 당연하지 않을 권리를 가지고 살아왔다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