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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창인J Mar 31. 2024

자아에서부터 신, 그리고 희망까지

본질적으로 ‘희망’이라는 것에 질문을 던지는 작품을 좋아합니다. 가령, 인사이드 르윈’과 ‘라이프 오브 파이’‘새들은 페루에서 가서 죽다’라는 작품들이 그렇습니다. 그렇기에 이번 글에서는 이 세 작품을 가지고 ‘희망’이라는 주제에 대해 제 나름대로 풀어보려 합니다.     


희망을 다루는 방식


  먼저 희망을 다루는 방식에 대해 세 작품을 가지고 이야기해보겠습니다. 먼저 ‘인사이드 르윈’의 경우를 살펴보겠습니다. 작중에서 르윈은 매우 순수하게 표현됩니다. 단지 음악을 하고 싶다는 이유만으로, 르윈은 지인의 집에서 지인의 집으로 이동하며 살아가죠. 이방인의 신분으로 말입니다. 하지만 그가 음악을 포기하는 일은 없습니다. 재능이 없다는 이야기를 들어도, 누군가를 질투해 욕설을 퍼붓더라도 그는 단지 묵묵히 여기에서 저기로 거처를 옮겨가며 자신이 하고자 하는 것을 하기 위해 살아갈 뿐입니다. 


 이는 ‘라이프 오브 파이’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파이 역시 단순히 자신의 존재에 대해 알고 싶어 하는 소년이었습니다. 그렇기에 피신이라는 주어진 것에서 탈피해 스스로 파이라는 이름을 붙여 ‘무한한’ 자신의 운명을 정하죠. 그리고 끝내 리처드 파커와의 망망대해에서의 막막한 여행에서도 그는 자신으로서 살아남기 위해 노력합니다. 대답이 들려 오지 않는 신에게 질문을 던지면서도 말이죠. 


 이처럼 두 작품을 보면 두 인물 사이에 끊임없는 희망이 기재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한 희망을 우리는 품고 있는 채 살아간다고 말입니다. 그런데 저는 희망이라는 주제를 다루고 있는 작품을 보면 저러한 방식, 그러니까 희망을 품은 채 계속해서 살아갈 수 있다는 서사의 방식이 아닌 다른 이야기의 형태로 나타날 수 있지는 않을까라는 질문을 스스로 하곤 했습니다. 


 그리고 최근 들어 희망에 관한 서사를 색다르게 표현해냈다고 생각한 작품을 만나게 됐습니다. 그 작품이 아까 앞 문단에서 언급했던 작품인 로맹 가리 작가의 ‘새들은 페루에서 가서 죽다’입니다. 이 소설의 이야기를 간단하게 간략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페루 리마에서 북으로 10KM 떨어져 있는 해변. 레니에라는 남자가 죽기 위해 해안으로 찾아온 새들을 보고 있던 중 어떤 여자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녀는 마치 죽어가는 새들처럼 파도에 몸을 맡기려는 듯 행동합니다. 레니에는 이러한 여자의 모습을 보고 그녀를 구한 다음, 자신이 운영하는 카페로 여자를 데려갑니다. 무료한 일상만을 보내던 레니에에게 있어 여자는 유일하게 교감을 나눌 사람이 되어갑니다. 하지만 여자의 남편이 금방 그녀를 찾아와 여자를 데리고 가며 이야기는 끝이 납니다. 


 저는 처음 이 소설을 접했을 때 도무지 이 이야기가 하고 싶은 내용이 무엇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앞의 영화들처럼 명확한 스토리를 다루고 있지는 않으니까요. 가령, 르윈이나 파이는 인물에 대한 서사와 목표가 명확하고, 그렇기에 그 인물들 속에서 기재된 희망이라는 것이 앞면으로 나와있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라는 작품은 다릅니다. 이 작품은 두 영화처럼 희망을 앞면에 내세우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 작품을 보면 희망적인 분위기보다는 절망적인 분위기가 납니다. 그런데도 이 작품에서는 어느 작품보다 또렷하게 ‘희망’이 느껴집니다.


 지금부터 그 이유에 대해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를 시작하려면 먼저 우리는 레니에라는 인물에 대해 알아봐야 합니다. 레니에는 페루의 한적한 카페에서 유유자적한 생활을 보내던 인물입니다. 굳이 말하자면 그는 세상과 단절된 존재인 것이죠. 하지만 잠시동안 그의 인생은 한 여자를 만나게 됨으로써 바뀌게 됩니다. 레니에는 죽음에 처해있는 것 같은 여자를 구하게 되죠. 마치 자신이 영웅이 된 것처럼 말입니다. 그리고 그 여자에게 순식간에 빠져듭니다. 이는 곧 세상과 단절되었던 그의 세상이 연결의 카테고리에 들어가기 시작했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 같죠. 


 여기서 아이러니한 사실은 여자는 실제로 죽으려 한 것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마치 놀이처럼, 여자에게 있어 죽음은 단지 삶을 감각하게 하는 하나의 기재에 불과했습니다. 그에 대한 증거로 작품의 초반부 여자가 죽으려고 할 때, 어떠한 세 남자가 등장하는데 그들의 가진 겉의 이야기는 다음과 같습니다. 그들에게 여자가 납치를 당했으며 그때 많은 폭력을 남자들에게 받았고, 그러한 굴욕에 여자가 죽을 수밖에 없었다고 말입니다. 


 하지만 과연 그게 진실일까요. 작품을 읽는 와중에도 이러한 의구심을 떨쳐낼 수 없었습니다. 저는 그 이유가 바로 세 남자의 복장에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소설에서 이 남자들의 복장을 묘사한 것을 보면 기묘합니다. 분명 작품은 페루의 리마 해변, 그러니까 매우 한적하고 조용한 장소를 배경으로 두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남자들의 복장은 카니발이나 사육제 같은 행사에서 입는 화려한 복장으로 묘사되어 집니다. 마치 조용한 무대에서 배우들이 연극을 펼치는 것처럼 말입니다.


 저는 이러한 장면에서 레니에는 끝내 좌절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앞에서 설명해듯 죽음에 처했던 여자를 구함으로써 레니에는 희망을 발견하였습니다. 하지만 세 남자의 등장으로 인해 여자가 죽음을 단순히 놀이로 생각한다는 점에서 그러한 희망은 부질없어 보입니다. 그럼에도 레니에의 희망은 소멸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는 언제라도 여자 같은, 죽음에 처한 존재를 만나게 된다면 다시 구함으로써 희망에 빠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레니에는 언제나 희망이 걸어오는 유혹 앞에서 패배할 수 밖에 없는 것이지요. 그게 비록 바보스럽고, 어리석고, 순진한 것일지라도 말입니다.


 저는 이러한 희망에 대한 서사가 매우 새롭게 느껴졌습니다. 희망을 희망으로써 내세우는 게 아닌 희망을 가장 밑바닥의 있는 감정으로 치부하면서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는 결국 사람이라는 것은 희망의 노예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렇다고 해서 앞에서 언급했던 ‘인사이드 르윈’이나 ‘라이프 오브 파이’의 희망의 방식이 잘못되었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은 아닙니다. 르윈은 르윈대로 또 파이는 파이대로 자신이 믿고 싶은 방식으로 세상을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것은 영화에서 고양이로 혹은 리처드 파커의 모습과 식인섬의 형태로 드러납니다.


이는 곧 이 영화 작품들 역시 희망이라는 것을 내재하고 있고 그 과정 속에 무언가의 연결이 있다는 바를 의미합니다. 이러한 맥락에서는 그들의 모습이 레니에의 모습을 닮은 것도 같아 보입니다. 하지만 희망은 희망일 뿐. 절망의 순간이 오더라고 그러한 믿음에는 변함이 없고, 그러한 희망이 개인적인 부분에서 멈춘다는 사실이 달라지는 게 없었습니다. 그렇기에 희망이라는 부분에 있어서 르윈과 파이는 어쩌면 레니에와 닮으면서도 닮지 않은 존재라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할 것 같습니다. 

     

만약 나라면 어떠한 희망의 방식을 선택할 것인가


  생각은 꼬리를 물어 만약 나였다면 희망이라는 주제 앞에서 어떠한 인물과 같은 선택을 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도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 이러한 주제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해보았지만, 그때마다 희망이라는 단어는 제게 크게 느껴지곤 했습니다. 그런데 이번 수업을 통해 다양한 서사들(아이에서부터 사랑까지)을 접하고, 또 저 개인적으로도 다양한 작품들을 접하게 되면서 똑같은 주제를 말하고 있음에도 다양한 발화 방식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굳이 희망이라는 것을 찾아야 할 필요가 있냐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최근에만 해도 저는 희망이라는 것이 나의 바깥에서 발견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마치 게임 속에서 아이템을 모으는 것처럼. 저에게 희망이라는 단어는 단순히 글은 쓰는 하나의 소재에 불과했습니다. 하지만 위의 작품들을 보면 희망이라는 것은 바깥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결국에는 인간에게 내재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생각보다 사람들은 그러한 사실을 눈치채지 못합니다. 영화 속 르윈이 이곳저곳을 떠돌며 길거리 생활을 하면서 떠돌이 생활을 하고 파이가 망망대해의 바다에서 여행을 계속해서 떠나는 것처럼 말입니다. 


 문득 저도 그들과 다를 게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글을 쓰고 싶어 문예창작과에 왔고, 차근차근 배워나가면 잘 쓸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저의 믿음은 어떻게 보면 맹목적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맹목적인 것이 과연 나쁜 것일까요. 오히려 맹목적이기에 더 큰 힘을 가질 수 있는 희망도 있습니다. 가령, 파이의 희망 같은 것이 그런 것이죠. 그렇기에 밤의 식인섬에서 리처드 파커와 동일시되는 듯한 파이의 모습은 매우 인상적인 장면으로 남습니다. 갈 데 없는 바닷속, 비치는 우주의 모습을 바라보며 서로를 믿을 수밖에 없던 그 망망대해에서 그러한, 리처드 파커와의 믿음은 어쩔 수 없는 믿음이니까요.


 그렇기에 저는 세 가지 작품에서 굳이 한 가지의 발화 방식을 고르라고 한다면 ‘라이프 오브 파이’의 방식을 선택할 것 같습니다. 물론 앞에서 언급했듯‘인사이드 르윈’역시 비슷한 맥락에서 희망을 다루고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르윈의 믿음은 그 형식이 완전히 맹목적이기보다는 현실에 가까운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가령 남들의 집에 빌붙어 음악을 하려는 모습이 그렇죠. 


만약 파이가 르윈과 같은 상황에 처했더라면 그처럼 현실에 굽히기보다는, 오히려 자신이 추구하는 음악에 대해 알기 위해 떠날 것 같습니다. 레니에 같은 경우라면 말할 것도 없습니다. 자신이 추구하는 음악은 있지만 속으로 내심 끙끙 앓아가며 여자와 같은 존재, 그러니까 자신을 영웅처럼 만들어줄 존재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그 속내를 내비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어떻게 보면 이러한 희망 중에서 파이의 희망과 같은 것은 매우 위험해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 식으로 희망을 품어봤자 실제로 르윈처럼 돌아오는 건 아무것도 없을 수도 있고 혹은 레니에처럼 그 희망 구렁텅이에서 똑같이 무료한 인생을 반복할 수도 있겠죠.


  그럼에도 파이의 희망이 가장 강렬하게 저에게 다가오는 이유는 그러한 한계를 넘어선 무언가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그 무언가가 아마도 지금 저를 살아가게 하는 믿음, 그러니까 제가 글을 쓰는 이유와 남들이 보기에는 동화 같은 파이가 첫 번째 이야기를 선택한 것이 비슷하다고 느꼈기 때문이겠지요.

      

내가 생각하는 희망에 대해서


  하지만 여전히 제 입으로‘희망이 무엇이다’라고 딱 정의를 내릴 수는 없는 것 같습니다. 확실히 앞의 챕터에서 저는 파이의 희망에 대한 발화 방식이 가장 제가 생각하고 있는 희망에 대한 발화 방식과 가장 가깝다고 말을 하긴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지금의 저의 생각에 불과하고, 또 저의 희망에 대한 생각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변화할지도 모르는 일이기에. 희망에 대한 생각을 한 문장으로 정리하는 것은 어려운 일 같습니다. 


 하지만 희망은 언제나 저의 어딘가 깊은 곳에서 죽을 때까지 절대 소멸하지 않고, 저를 놓아주지 않을 거란 생각이 듭니다. 그렇기에 언제든 각성의 계기만 있으면 그 희망은 갑자기 깨어나 어떨 때는 저를 절망에 빠지게 만들 수도 있고 앞으로 나아가게 만들 수도 있을 것입니다. 저는 그때마다 희망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슬퍼하고, 기뻐하겠죠. 지금까지는 이러한 희망의 기제가 매우 불합리하다고 느껴졌었습니다. 희망만 없으면 이러한 감정조차 느끼지 못할 것이라고 말입니다. 이런 걸 보면 저 역시 희망이라는 거대한 관념에 침몰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위와 같은 서사들을 접하고 나서 희망에 대한 저의 생각을 변화시킬 수 있었습니다. 어쩌면 희망은 본능과도 같은 것이어서 제가 살아남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그러한 기제를 발동시킬 수밖에 없었다고 말이죠. 

 그래서 문득 만약 제가 이러한 주제로 글을 쓰게 된다면 희망이라는 기제를 발동시킬 수밖에 없었던 인물에 대한 이야기를 써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 같습니다. 꼭 저처럼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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