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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무경 Jun 13. 2024

한국인의 과시욕

tps://blog.naver.com/charmdae/223478387211


한국인의 과시욕 실마리

북미 인디언인 콰키우틀 족의 관습


문화의 수수께끼"라는 저서로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문화유물론자 마빈 해리스는 세계 여러 곳의 몇몇 관습을, 재화의 재분배를 기하여 생태계에 적응하려는 인간의 행태로 해석하고 있다. 말하자면 우리가 관습이라는 이름으로 보고 있는 문화적 행태는 인간이라는 생물 종이 재화를 재분배하여 생태계에 적응하기 위해 발달시킨 적응 현상이라는 견해이다. 


그가 이를 증명하기 위해 든 몇 가지 예 가운데 태평양 연안의 뱅쿠버 섬에 살고 있던 콰키우틀 인디언들의 포틀래치라는 잔치와 카오카 섬에 살고 있는 카오카족의 대인[大人] 의식 등이 들어있다. 


카오카족의 젊은이는 산해진미를 장만하여 이를 부족들에게 나누어 줌으로써 대인이 되는데, 이를 위해 갖은 고생을 다하면서도 자신에게 돌아오는 것은 잔치 끝의 찌꺼기와 대인이라는 허울 좋은 칭호뿐이다. 


콰키우틀 인디언 추장들은 상호 초대하여 거창한 잔치 –포틀래치- 를 벌여서 그동안 축적했던 재화들을 소비한다.


콰키우틀의 포틀래치

북미 인디언인 콰키우틀족에 관한 루스 베네딕트의 기술*은 상대적인 우월 제시 본성의 적나라한 증례를 나타내 보여주고 있다.


*루스 베네딕트: 《문화의 패턴》 김열규 역. [도서출판 까치] 1980. 설명 가운데 ( )안의 숫자는 이 책의 쪽수. 


북미 서부 해안의 밴쿠버섬이 본거지인 콰키우틀 인디언들의 문화에서는 모든 목적이 “경쟁 상대보다 자기 쪽이 우월하다는 것을 나타내는 데(184p)”있다고 하는데 우리는 그중에서 [경제재(經濟財)]와 [결혼]의 두 가지 행태를 선택하여 살펴보도록 하자.


콰키우틀에게 부(富)의 축적은 경제적인 욕구의 현실적인 투영과 경제적인 욕구의 충족을 훨씬 넘어서는 것이었다(182 쪽). 그들은 신체적인 생존을 염려할 필요가 없는 풍부한 수산 자원을 얻을 수 있는 자연 속에 살고 있기 때문에 남은 힘을 모든 부(富)를 그와 동등한 가치를 갖는 경제재를 얻는 일에는 쓰지 않고 그들이 승리하려는 게임에서 고정적인 가치의 대응물로 사용(183 쪽)하고 있었던 것이다. 


좀 더 쉽게 말하자면 그들이 사용하는 재화들, 곧 매트와 망태기ㆍ삼나무 껍질로 된 담요ㆍ화폐로 쓰이는 텐타리아{조개}ㆍ캔들 피쉬에서 얻는 기름ㆍ담요의 수천 배의 가치가 인정되는 최고의 고가품인 구리판ㆍ구리판 다음의 고가품이라고 할 카누 등등이 ―신체적인 생존이나 평안을 위해서가 아니라― 이들 재화 소유주들의 우월성을 과시하는 자료로써 쓰였다는 것이다. 


콰키우틀족에게는 이와 같은 우월 경쟁이 문명사회(?)에서와 같이 은밀히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 문명사회에서의 운동 경기가 그러하듯이 공공연히 전개된다는 점에서 독특성이 있다. 그들은 지는 자를 가련하게 여기는 일이 없다. 가련하게 여기기는커녕 그들은 패배자에게 조롱을 퍼붓고 동정 대신 경멸을 보낸다는 것이다. 


“자기가 타인보다 더 우수하다는 마음이 그들의 모든 행동의 동기의 중심이 되고(186쪽)” 있는 것이다. 결혼식 ∙ 주술의 가면(假面) 등 여러 관습이 이와 같은 우월 과시 의도를 표현하는 형식이지만 가장 첨예한 대결은 그들이 가장 성대하게 베푸는 대축연, 곧 [포틀래치]에서 극치에 다다른다. 


여기에서 벌어지는 그들의 우위 확보 경쟁은 다른 사회에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특이한 방법으로 진행되는데 그것은 그들이 우월성을 과시하기 위해. 힘써 모은 재화들을 아낌없이 파괴하기도 한다는 사실에 나타나고 있다. “포틀래치의 목적은 경쟁 상대보다 더 많은 재산을 포기하거나 재산을 파괴하는 데 있다.*”


*마빈 해리스:《문화의 수수께끼》박종열 옮김 한길사 1985 5판 98p.


◉포틀래치에 초대받아 간 손님은, 캔들 피쉬의 기름을 쏟아부어 피우는 연회용 모닥불이 아무리 뜨거워도 이를 견디지 않으면 안 되며, 주인 역시 그 불길에 지붕의 서까래가 타올라 결국 집이 불태워 없어진다고 해도 태연히 바라보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불길의 뜨거움에 의한 신체적 고통이나 집이 불타 없어지는 경제적 손실이 와도 결코 동요하지 않을 만큼 담대한 용기와 부의 능력이 없으면 열등자의 치욕을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축연은 서로 간에 번갈아 개최되며 서로 상대방을 초대한다. 


그런데 만약에 초대자가 상대방으로부터 이전에 받았던 성대함 이상의 축연으로 답례하지 못하면 역시 산더미 같은 모욕을 당하게 마련이며, 이를 모면하고 상대방보다 더 큰 우월함을 입증하려면 더욱 대담한 방법을 사용해서 상대방의 기를 꺾어놓아야 한다. 


예를 들면 도전자는 자기가 소유한 카누를 몇 척 부수어 모닥불에 던져 넣어 불길을 돋우며 상대방을 제압하려 한다. 상대방 또한 그 정도의 재물이 없어 패배할 약체가 아님을 보여주기 위해 하인들을 시켜 자기가 타고 온 카누 몇 척을 박살내어 모닥불에 던져 넣어 불길을 끔으로서 경쟁에서 이기려 한다. 


만약에 이것으로도 우열이 가려지지 않으면 이제 그들이 가장 고가의 재물로 여기는 구리판으로 결판을 내게 되는데 그 소중한 구리판을 누가 더 많이 파괴할 수 있느냐가 승패의 열쇠가 된다는 것이다. 


구리판이 담요 수천 장의 가치를 지니는 이유는 구리판의 생활상의 효용성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들 문화에 있어서 우표나 수석(壽石), 또는 고화폐가 그러하듯이 그 자체로는 효용성이 거의 없어서 처음엔 그다지 고가가 아니었다. 


그러나 그것을 구입하려는 사람이 자꾸만 많은 대가를 치러 왔기 때문에 점차 값이 올라갔고 값이 올라갔기 때문에 그것의 입수가 소유자의 위신과 구매욕을 높여준 것이다. 서구식 문명사회에서의 경쟁에서 여러 가지 재화 용재를 차례로 돌려가며 과시 경쟁을 하듯이 쾨키우틀들은 매트ㆍ삼태기ㆍ요트ㆍ구리판 등을 차례로 돌려가며 과시 경쟁을 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처음으로 듣는 사람이라면 구리판 가격의 형성이 흡사 현대 사회의 경제 제도에서의 경매와 같아서 사려는 사람은 싸게 사고 싶어도 팔려는 이가 더욱 높은 값을 부르기 때문에 할 수 없이 비싼 값으로 사는 것으로 오해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놀라지 말라! 팔려는 사람인 수장(首長)이 어느 정도의 대가를 받기로 하여 매우 만족하게 생각하고 구리판을 넘겨주려 하는데도 불구하고 사려는 이는 팔려는 이를 보고 비웃으며


“수장, 어째서 그것으로 된다고 말하는가? 그대는 너무나 성급하게 거래를 마치려고 한다. 수장, 너는 나를 매우 가난하다고 생각하는 게 틀림없군.”


하면서 훨씬 더 많은 값을 치러 준다는 것이다(191 쪽). 구리판 값이 점점 더 올라가는 이유는 이 때문이다. “대수장(大首長)끼리의 경쟁에서는 이 문화의 진수(眞髓)인 무지막지함과 맞겨루기가 유감없이 발휘된다.”고 베네딕트는 쓰고 있다.



[이상한 결혼식]


콰키우틀의 과시욕은 재화를 통해서만 나타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결혼까지도 자기의 사회적 우월성을 확보하는 중요한 수단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곧 자기의 지위를 높이기 위해 상상 이상외 방식의 결혼을 이용하고 있다. 


왜냐하면, 결혼을 통해 맞이한 신부는 적당한 시기에 그의 부모로부터 사회적 신분 일부를 상속받아 오기 때문이다. 이러한 신분은 그의 남편의 지위를 더욱 높여주고 다양화시킨다. 


물론 정략결혼은 콰키우틀에게만 해당되는 관습은 아니지만, 우리가 괴이하게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콰키우틀의 경우에는 심지어 딸도 없는 수장에게 사위가 생기는 괴변이 태연히 일어난다는 점이다. 


수장의 특권적 지위나 명예를 상속받고 싶어 하는 상류층의 자제는 수장의 신체의 일부―예를 들어 그의 [왼발], 또는 [오른손] 등― 를 신부로 상정하고 그 손발과 결혼을 하는데 모든 의식을 정상적인 남녀 간의 결혼식과 똑같이 거행하며 이를 통해 수장의 특권이 사위에게 양도된다는 것이다.


이것만을 보면 마빈 해리스의 견해가 타당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나는 이미 인간의 심성(내가 기성[氣性]이라고 부르는 생존 욕망, 곧 본능의 원리)을, “자기를 상대적으로 우월하게 들어내 보이려 함(자기 과시)”이라는 말로 표현한 바가 있으므로 이러한 카오카족의 대인 의식이나 콰키우틀 인디언들의 포틀래치를 이 관점에서 해석하는 바이다.

 

대인 의식을 치루는 카오카는 바보인가? 


산해진미를 남에게 다 내어주고 단지 얻는 것이란 대인의 칭호뿐이라는 점에서 실질적인 것, 바꿔 말하면 육체적으로 유리한 것을 유가치하게 평가하는 서구적 유물론적 사고방식에 의하면 분명 그러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 한자문화권에서는 전통적으로 그러한 실리보다 명성을 더 중시하는 가치관이 이어져 오고 있으므로 문화유물론자들이 어리석은 행태로 간주하는 저들의 관습을 그들보다는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닌가?


그리고 그러한 명성의 추구는, 문화유물론자들의 견해에 의해서보다 나의 “자기 과시욕”이라는 원리에 의해 더 잘 해명될 수 있는 행태라고 나는 단언하는 바이다.


그것은 콰키우틀 인디언들의 포틀래치, 나아가 그들 문화의 양태를 더욱 면밀히 관찰해 보아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은 포틀래치에서 서로의 친목을 도모하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상대방을 조롱하고 멸시하며 자신의 부와 능력을 과시하고자 한다. 


차려놓은 음식을 상대방이 다 먹지 못하면 그것도 다 먹지 못하는 형편없는 인간이라고 모욕을 주고, 반대로 초대된 손님이 음식을 다 먹으면 주인에게 음식을 모자라게 장만하고서 초대했다고 치욕을 주는 등으로 자신의 위대성을 과시하고 상대방의 열등성을 공격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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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인의 과시욕[2]


재화를 재분배하기 위해서 굳이 이렇게 해야 할 이유는 없을 것이다. 이는 단적으로 자기를 상대방과 비교하고 그 <보다> 더 우월하다는 것을 과시하기 위한 행동이다.


콰키우틀족은 그들이 가장 고가로 간주하는 구리판을 경매할 때 서구적 문화에서처럼 가급적 싼 값으로 사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싸게 파는 상대방에게, 자신을 가난뱅이로 여긴다고 비난한다. 이 역시 자신의 우월성을 강조하기 위한 태도이다.

 

사람들은 자기를 드러내 보임에 있어서 그 상징인 이름을 요긴하게 생각한다. 자기가 죽더라도 육체적으로는 자손을, 그리고 상징적으로는 자기의 이름을 이 세상(자기 제시의 마당임)에 남겨 자기 과시를 연장하려고 하는 것이다.


왕언장이 언제나 인용했던 격언, "표범은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말은 이러한 인성(人性)을 단적으로 표현한 말이라 할 수 있으며 공자가 효경에서 한 입신양명(立身揚名)이라는 말도 이와 같다.


더러운(곧 열등한) 이름으로 살아남기보다는 육체적인 생명을 버리더라도 위대한 명성을 남기려는 인간의 심성은 바로 이러한 자기 과시의 심리에서 연유하고 있는 것이다. 


"나의 명예를 훼손하기 보다는 백만 번 죽는 편이 낫다(애디슨).“


"나를 잊지 말아 줘!"라고 외치는 물망초의 전설은 이러한 인간 심리를 반영하고 있다. 


사랑한다는 말의 가장 큰 의미는 이처럼 상대방을 무조건적으로 우월하게 긍정한다는 의미이기 때문에 사람들을 무한히 기쁘게 하는 것이다. 


일심동체라는 부부간이라도 상대를 열등하게 평가한다거나 그녀의 친척, 특히 친정에 대해 부정적인 평가를 하면 거의 이혼을 각오해야 될 것이다. 부부간의 사소한 싸움에서부터 동물들의 목숨을 건 투쟁에 이르기까지 대부분의 싸움은 바로 이러한 <우월 획득의 경쟁과 평가>에 연관이 있다.


등존자(等存者: 서로 우열이 비슷한 사람)인 남에 의해서 평가되기 이전에 인간은 선천적 본능적으로 자신이 무조건적으로 우월하다고 여기려는 자존심(자기 존중감)을 지니고 있다. 


사람들은 암암리에 남이 자신을 우월하게 여길 것이라는 기대를 갖는다. 따라서 이에 어그러지는 일(비난이나 경멸, 조소 등)을 보면 화를 내고 그러한 타자에게 보복을 하려고 하며 자기를 우월하게 평가해 주는 상대에게는 친밀감을 보이며 보답하려 한다. 


수용자(受容者)가 제시자의 제시 용재를 평가하면서 자기가 그보다 열등함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때 발생하는 부정 감정(불쾌감)이 시기심이며 상대방의 열등함에 대해 나타나는 긍정 감정(쾌적감)이 경멸(또는 조소일 경우도 있음)이다.


그 밖의 다양한 감정의 대부분이 "자기 제시 이론"의 제시 · 수용 관계에서 발생하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이러한 과시 행태가 가장 극심하게 전개되는 곳이 바로 우리 한국이라면 어폐가 있을까? 나는 콰키우틀 인디언의 문화가 미국, 또는 캐나다에 흡수, 소멸된 뒤에 이 세계에서 가장 심하게 발현되는 곳은 바로 우리 사회라고 믿고 있다.


자기 자신을 남과 비교해서 그들보다 우월하게 들어내 보이려는(자기 과시) 이 심리적 욕망에서 그 우열의 기준은 일정하게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다. 다른 사람과의 비교를 통해 그보다 상대적으로 더 우월하다는 점을 들어내 보이려 한다는 뜻이다. 


이처럼 우열의 평가가 절대적인 기준에 의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등존자)과의 비교 평가에 의하기 때문에 경쟁은 끝이 없다. 


이러한 상태를 보다 쉽게 이해하려면 우리나라의 대학 입시 경쟁을 상기해 보면 된다. 대학 입시에서는 언제나 상대 평가(60점이 아니라 60등 안)에 의하기 때문에 경쟁은 더 치열하게 전개된다. 


그리고 경쟁은 거의 가까운 맞잡이[등존자] 사이에서 발생한다.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 논을 산다면 별로 배가 아프지 않은 것이다. 또 아주 가까운 형제라면 경쟁심이 별로? 발생하지 않지만, 사촌이 논을 사면 당연히? 배가 아프게 되는 것이다.


프로이트도 지적하고 있지만 가까운 이웃, 이웃 나라(독일과 프랑스,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한국과 일본) 사이에서 갈등은 더욱 치열하게 전개된다.


그리고 역사적으로 이러한 성향이 가장 강했던 사회가 바로 콰키우틀족이었고 이들의 문화가 소멸한 뒤로 과시 문화가 가장 극심한 곳은 바로 우리 한국이라는 말이다. 


한국인의 과시욕[3] 


한국인 과시의 특성

자기를 들어내 보이려는 욕망은 특정 지역이나 특정 사회의 일시적인 현상이 아니라 인간의 본성이기 때문에 인간이 이 욕망을 지니고 있다는 점은 동서고금이 다르지 않고 남녀노소가 다르지 않은 것이다. 따라서 한국인이 가장 극심하기는 하지만 그것은 다만 양적인 차이일 뿐이기는 하다. 


그런데 현대 한국인의 과시 심리에는 다음과 같은 특징이 있다.


1). 우월함에 의한 과시보다는 열등함을 은폐하기 위한 위장된 과시


우월한 자가 과시하는 일은 자기 제시의 적극적 형태이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과시 행태는 이러한 적극적 형태보다 자기의 열등함을 은폐하려는 소극적 형태가 더욱 발달되어 있다. 자신의 열등함을 의식적으로 거부함으로써 우선 자기 내적인 불쾌감(자신이 열등하다는 의식으로부터 연유하는 열등 감정으로서의 불쾌감)을 소멸시키려 하기 때문이다.


아침을 굶었으면서도 이를 쑤시는 한국인들―아침을 못 먹은 정도로 가난하게 삶을 창피하게 여겨 먹은 것처럼 위장하기 위해.


호주머니에 돈이 없어 달랑달랑하면서도 술집에서 자신이 팁을 내겠다고 큰소리치는 한국인의 의식(요즈음의 신세대들은 덜하지만? 아니 어쩌면 더하는지도 모른다)은 바로 자기가 동료들보다 상대적으로 우월하다(적어도 열등하지는 않다)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 들어내 보이려 할 뿐만 아니라 이를 스스로 자위하기 위한 행태이다


합리적인 필요성을 벗어나는 행동을 과시라고 하면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그런데 한국 사람들 모두가 "필요해서" 핸드폰(차량ㆍ보석ㆍ외제 물품ㆍ거대한 아파트ㆍ일류 대학 진학 등의 학력과 학벌ㆍ브랜드 있는 상품………… 등등)을 지니고 있는 것이 아니다. 


남이 가지고 있는데 자기만 갖지 못하면 창피해서 도저히 견딜 수 없는 것이 한국 사람이다.



● 고급 외제차 타는 것이 자랑거리라서 어깨에 힘주는 사람들, 군대에서 한 계급만 높아도 으스대는 사람들. 조금 좋은 아파트단지에 살면 의기양양해하는 사람들. 


● 명품 백이 하나도 없으면 남앞에 서기에 창피하게 느끼는 여성들


●직장 동료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승진 경쟁과 그로 인한 시기 ∙ 견제 


그러한 위체에 있을 형편도 못되면 그런 사람들을 낮잡아 보거나 시기하여 악풀 세례로 분풀이하면서 속으로 낄낄거리는 사람들. 이러한 사람들이 넘치는 것이 한국 사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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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명품 시장도 지난해 보다 약 5% 성장해 41억 달러(16조 원)로, 세계에서 7번째로 큰 명품 시장을 형성했다. 전문가들은 코로나19 이후의 보복 소비 심리가 명품 시장 성장을 키우는 주요 요인이긴 하지만, 타인에게 돋보이고 싶어 하는 ‘선택적 럭셔리’가 명품 시장의 새로운 소비 트렌드로 자리잡고 있다고 말한다. 타인에게 외적으로 돋보이기를 즐긴다는 것이다. 

https://m.post.naver.com/viewer/postView.nhn?volumeNo=33184169&memberNo=3551273

글 성진규 하이닥 건강의학기자 (hidoceditor@mcircle.biz)


그렇다면, 왜 이렇게 한국인은 자신의 특별함을 과시하고 싶어할까? 한국인의 과시욕과 명품 중독에 대해 


”특히 심한 열등감을 과시욕을 통해 해소하는 듯한 경험을 한 사람은 과시욕에 더욱 집착하며, 결국은 어떤 대가를 치루더라도 지키려고 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합니다.“


도움말 하이닥 상담의사 권순모 (마음숲길정신건강의학과의원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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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글은 “왜 한국 사람들은 남이 잘되는 꼴을 못 볼까?”라는 검색어에 나오는 수많은 글 가운데 무작위(랜덤)로 하나 고른 글이다. 


COUPANG· l********* 작성일2023.03.22. 조회수121 댓글19북마크 메뉴 


누가 승진했다고 하면 득달같이 달려들어서 비꼬고

누가 투자해서 돈벌었다고 하면 비난하고

좋은 차 탄다고 하면 리스야? 카푸어야? 시샘하고


그러다가 누가 영끌해서 집 산 게 시세 폭락으로 돈 날려 먹었다는 말 나오면 "힘내" 이러면서 속으론 '낄낄낄'

남들 잘되는 꼴을 못 보는 참 역겨운 근성이자 영원한 루저들의 전형

https://www.teamblind.com/kr/post/%EC%99%9C-%ED%95%9C%EA%B5%AD-%EC%82%AC%EB%9E%8C%EB%93%A4%EC%9D%80-%EB%82%A8%EC%9D%B4-%EC%9E%98%EB%90%98%EB%8A%94-%EA%BC%B4%EC%9D%84-%EB%AA%BB-%EB%B3%BC%EA%B9%8C-iytDKoDA


뿐만이 아니다. 외국인이 쓴 글에 대해서는 크게 공감하면서도 내국인이 쓴 글에는 공감 표시를 극히 꺼리며 깎아 내리기에 기를 쓰면서 우열을 다투고 남의 출세를 견제하려 한다. 


권위자가 쓴 글은 내용도 보지 않고 열광하지만 신인이 쓴 글은 아무리 옳은 말을 해도 알아듣지 못하고 심드렁하게 여긴다. 


제자가 스승보다 나아야 학문이 발전한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제자를 학문적 경쟁자로 보고 스승은 제자가 자기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제자의 논문을 자기 것 인양 발표하는 교수, 제자에게 지급한 연구비를 교묘한 방법으로 환수하는 교수가 있다


[출처https://blog.naver.com/casaji7715/223073124837 [차갑부 칼럼후생이 선생보다 나아야 할 이유|작성자 지기자


농촌 영감님이 유럽 여행을 하고 와서 기쁜 이유는 새로운 세계를 보았기 때문이기보다는 남들이 다 갔다 오는 여행을 우리 아들도 시켜주더라는 안도감과 이웃에 대한 자랑 때문이라고 하면 지나친 견강부회일까? 


남에게 지지 않으려는 이러한 우월 경쟁의 힘이 우리의 근대화를 이룩한 원동력이었으며 남과의 치열한 경쟁의식 때문에 지나치게 낭비를 부추겨 IMF 사태를 가져왔다고 한다면 사태를 잘못 판단한 것이 될까?


2). 개인적 용재에 있어서는 정신적 용재보다 외식적 육체적 용재를 더 중시한다, 


정신적인 것은 파악하기가 쉽지 않다. 따라서 과시욕을 가장 쉽게 발휘할 수 있는 직관적 용재인 육체적 과시에 열중하는 것이 한국인의 과시의 특징이다(물론 인간들 대부분이 그러하지만, 특히 우리나라에서 더욱 심하다).


성격이나 지성의 열등함보다는 용모와 힘과 체격 등의 열등함에 더욱 심한 콤플렉스를 느낀다. 그래서 성형외과는 언제나 만원이고 술집 종업원이 무색할 만큼 화장을 일삼는다. 


개성을 찾는다면서도 그와는 반대로 엄청나게 유행에 민감하고 유행에서 뒤떨어지는 것에 심한 소외감을 느낀다. 심지어는 학문까지도 몰지각할 만큼 유행의 물결에 휩쓸린다. 


한때는 실존주의에 열광하더니 이제는 포스트모더니즘!


 



3). 사회적 용재에 있어서는 신분보다 재화를 더 중시한다.


황금의 힘에 경도되어 있어서 신분의 고귀함보다는 재화의 다량 보유를 더 선호한다.


조선 시대는 인간의 4가지 용재(육체ㆍ정신ㆍ신분과 지위ㆍ재화) 가운데 신분을 가장 중시하던 사회였다. 그래서 신분상의 우월성이 과시의 중요한 용재였다. 아무리 돈이 많아도 백정은 천대되었다. 


그러나 현대에는 자본주의의 수입에 의해서인지 신분보다는 재화의 우월성이 압도적으로 중시되고 있다. 사기꾼이라도 돈만 많으면 큰소리친다.


모든 사람이 돈벌이에 혈안이 되어있다. 


선정을 베푸는 데 힘써야 할 정치가도 돈, 


교육에 힘써야 할 교육자도 돈, 


사람의 영혼을 순화시킨다는 명분을 가지고 있는 목사; 스님도 돈,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오로지 다량의 재화를 벌어 이를 과시하는데 이용하려는 것이 한국인의 현주소이다.


4). 집단적 과시


고래로 전래되어 온 집단적 행태가 그대로 유지되어 거의 모든 것이 동류 집단주의적? 이다. 과시 단위도 역시 집단적이라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동족ㆍ동향ㆍ동지ㆍ동성ㆍ동양(同樣: 모습이 같은 무리) 등의 집단에 소속(?)되어 자기 집단의 우월성을 강조하기에 분주하다.


정치판에는 경상도ㆍ전라도 등의 지방색, 미술계에는 홍대파ㆍ서울대파ㆍ중앙대파ㆍ국민대파 등의 학벌. 


기타 성별ㆍ연령별ㆍ종교별ㆍ사상과 입지 등에 따른 집단적 우열 다툼이 종적으로 횡적으로 난마처럼 얽혀 있어서 일일이 매거하기에도 벅찬 것이 우리 한국이다.


또 한 가지 우리나라 사람들은 매우 [감성적]이라는 특성이 있다. 정이 많다는 겄이 대표적이다. 


한말[맨 우리말] 낱말도 형용사는 매우 섬세하게 발달되어 있는데 개념어인 명사는 매우 부족해 한자어가 없으면 논문 한 편 쓸 수 없는 지경이다. 

 


●참고로 덧붙여 본다. 

 작고한 이어령 교수는 일본인의 민족성(?)에 관하여 “축소 지향적”이라고 지적했다. 내가 생각하기에 일본인들은 축소 지향적이기보다 “도안화(Designization) 지향”으로 보인다. 



형상이든 기술이든 제도이든 요리조리 다듬어서 갖은 기교를 다 부려 앙증맞게 디자인하는 것이 일본인의 특징 같아 보인다. 정원(庭園)도 아기자기하게 다듬고 떡이나 요리도 좀스럽도록 다듬어 놓는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이러한 기교를 별로 좋아하지 않고 "무기교(無技巧)의 기교"로 원초적이고 야성적이다. 좋게 말하면 자연풍이고 나쁘게 말하면 투박하고 거칠다. 


색깔에 관해 말하면 일본인들은 보카시(그라데이션)를 좋아하고 한국인들은 원색을 좋아하며 중국인들은 빨강색과 검은색, 그리고 금색을 좋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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