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한테도 배우지 않고 홀로 깨우치려 한다.
철학은 무엇이며 철학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라는 질문에 일정한 하나의 답이 있는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 십인십색으로 각자의 생각과 입장에 따라 많은 답이 있을 것이다. 나 역시 이에 관해 말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으로 이 글을 쓴다. 다른 이가 철학하는 데 조금의 참고라도 된다면 다행이겠다.
나는 몇 권의 책을 집필 중에 있어 여러 책을 참고하고 있지만 강단에서나 책으로 배운 바는 없다. 지금은 대학 강단에서 학생을 가르치는 서울대 박사 출신의 교수가 박사학위를 준비하던 대학원생일 때 수년간 자주 많나 이야기를 나눈 일이 있다. 나보다 나이는 어렸지만, 말에 진중함이 넘치는 젊은 분이었다.
그는 나의 심리학적 이론을 지지했지만, 사고실험을 하자는 건의를 내가 받아들이지 않는 것을 아쉬어 했다.
그는 내가 학벌이 없는 데 대해 오히려 다행이라고 여기는 것 같았다. 학교에서 특정한 학자의 이론에 빠지면 거기에 치우쳐서 독창적인 이론을 정립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아마도 남의 이론 익히는데, 세월을 다 보내 자기의 이론을 정립하지 못하게 된다고 믿었던 게 아닌가 싶다.
더구나 외국에서 1년간 발표하는 논문들을 우리나라에서 받아드려 이해하는데 2년이 걸린다는 것이었다.
이미 잘 아는 스승으로부터 배운다는 것은 정상적인 방법이어서 쉽고 정확할 수 있다. 교육의 중요성이 여기에 있다. 독창성이 조금 희생되더라도 헛길로 가지 않고(?) 바른길로 갈 수 있게 이끌릴 수 있다. 첫걸음부터 차근차근 배워 기초를 튼튼히 할 수 있다.
그러나 반드시 좋은 결과만 바랄 수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자신이 직접 사유하는 일에 견주어 겉핥기식일 수 있고 타성에 빠질 수도 있다. 남에게 전수를 받거나 사숙(私淑)하거나 독학하거나 다 일장일단이 있을 것이다. 각자가 형편에 따라서 또는 개인적인 이유에 따라 달리할 일이다.
불교의 교종과 선종에 견줄 수 있다. 교종은 이미 롹립된 교리를 진리로 받아드려 답습하는 것을 중시하며 선종은 스스로 깨닫는 것을 진리 파악의 가장 좋은 방법으로 알지 않는가?
우리 앞에 대상이 마주 서 있다. 대상이 떠오르면
♣그 대상이 [무엇인가?][본질규명]를 내 나름대로 헤아려 본다.
♣어떤 별다른 행동을 할 때 [왜?][이유 탐구] 그런 행동을 하나? 하고 반문한다.
♣그 대상이 어떻게 생겼는가? 그 행동을 [어떻게 할 것인가?][현상과 방법 모색]를 궁리해 본다.
그 대상의 본질을 내 순식[순수 의식: 경험을 배제한 순수 의식]으로 생각해서 요점을 적어놓고 탐구하다가 남이 써놓은 이론들을 읽고 대조해 본다. 그래서 옳다고 여겨지는 쪽을 받아들인다. 이때 참고하는 이론이 얼마나 유명한가? 얼마나 유명한 사람의 이론인가?는 거의 고려하지 않는다.
공자든 석가든 예수든 칸트든 누구의 주장이라도 타당성이 없다고 믿어지면 받아드리지 않은 채 괄호 안에 넣어두고, 타당성이 있다고 여기면 아무리 이름 없는 사람의 의견이라도 받아들여 참고한다.
●늘 그렇다는 것은 아니고 주로 이런 의문을 제기하려고 힘쓴다. 대상이 무엇인가를 고찰한다는 것은 대상의 [본질]을 알아내려는 것을 가리킨다.
선불교는 이성적 사유에 의한 자율성을 중시한다고 여겨진다. 이는 기독교의 타율에 견주어 내가 불교에 조금 호의적인 한 이유이다. 나는 선불가에서 말하는 화두가 바로 [본질 탐구의 방법]의 한 가지 형태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화두는 이성의 순식을 열어젖히려고 갑자기 제출해 놀래켜서 생각을 각성시키려는 태도가 아닌가 여겨진다.
그러나 왜 이상한 질문을 던져 사유를 계발시키려 하는가? 더구나 화두는 수수께끼 같을 뿐만 아니라 깨우쳤는지 아닌지를 알아내기도 어렵다. 석가의 염화시중을 보고 가섭이 미소하자 석가는 그의 교설을 모두 가섭에게 전해 주었다고 한다.
이심전심이라고 하지만 과연 석가의 뜻을 가섭이 알아챘는지 아닌지 누가 어떻게 알겠는가? 전혀 엉뚱하게 이해하지 않았으리라고 장담할 수 있는가?
요새 어느 불교 유튜버는 화두 때문에 조계종이 망해가고 있다고 비판하기도 한다.
나는 직접적으로 대상 사물의 본질을 구명해서 답을 찾는 것이 더 효과적이고 합리적이라고 믿는다.
특히 이때 이미 구축된 사적 지식(史的 知識)이나 사적(私的) 경험보다는 내 선험적인 사유[본질 직관과 비슷한―이를 스스로 순전한 인식, 곧 순식(純識)이라 부르면서]에 따라 곰곰이 생각한다. 사유가 어느 정도 익으면 그 본질이 영감처럼 떠올라 그동안 체계를 잡지 못했던 이론의 맥락이 밝히 떠오르고 고심하던 퍼즐 조각이 감쪽같이 맞춰져 활연개오할 때가 적지 않다. 그렇게 문제를 푼다.
대상 사물의 본질을 염관(念觀: 생각해 보다)할 때 그 개념의 근거와 한계를 깊이 생각해 보고―곧 관념(觀念)을 세우고― 분석하여 핵심 요소를 뽑아놓고 상관관계를 따져 본다.
�이유가 명확하지 않거나 없는 사유나 행동은 될 수 있는대로 하지 않으려 한다.
그래서 나는 담배를 피우지 않는다. 담배가 건강에 나빠가 아니라 담배를 피울 이유를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나의 순식에 따르는 의지에서 우러나오지 않는 짓 ―대개는 맹목적인 본능적 행동―은 하지 않으려 힘쓴다.
무엇을 주장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1에서 2가 나고 2에서 3이 나며 3에서 만물이 나왔다고 말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주장의 근거가 타당성이 있느나? 없느냐가 핵심이다. 검증이나 논증, 아니면 적어도 납득할만한 심증이라도 있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는 개념이
주관적인 생각이 아닌 객관적인 개념인가?
특수적인 생각이 아닌 보편적인 개념인가?
상대적인 생각이 아닌 절대적인 개념인가?
우연적인 생각이 아닌 필연적인 개념인가?
나는 이 4가지가 [진리]의 조건이라고 믿기 때문에 개념을 생각할 때.이 조건들을 더듬어 본다. 곧 이른바 개념의 진리 여부를 살핀다.
♣반대 개념이나 현상을 예상해 보고 생각나는 개념을 하나 규정하면 대부분 그 반대 개념이 뒤따름을 깨닫는다. 이는 필연적인 결과인 듯하다. 동양철학의 음양론에 해당되는 현상인데 나는 음양이라는 이름을 쓰지 않고 “대립성”이라고 부른다. 어쨌든 하나의 개념을 규정한 뒤에는 그 대립성을 살핀다.
♣개념과 개념 사이, 특히 인과관계에 유의하고 유개념과 종개념 등 개념과 개념의 상하 죄우를 따져 체계적으로 조직하려 힘쓴다. 이 체계의 틀은 될 수 있는대로 객관적이고 필연적이게 짜려 하지만 주관성이 깊이 끼어드는 것이 사실인 것 같다.
나는 맹자를 존경하는데 그의 인의예지 사단에 관한 틀이 내 사유의 틀에는 맞아들지 않아서 무엇인지 이해하는데 애를 먹는다.
♣잘못이 발견되면 이를 반성하여 고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