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하루가봄 Mar 29. 2024

배숙과 엄마의 자격


아빠는 광인이었다.

요즘 말마따나 맑은 눈의 광인이

아니라 정말 광인.

우울증도 있었고 망상도 있었고

허공에 헛소리도 하기 시작할 무렵

아빠는 내가 중학교 때 결국 직업이던

고등학교 교사를 관둬야 했다.


병원에서 아빠의 병명은

조현병이라고 했다.



그때부턴 온전히 엄마의

외벌이로 살게 되었다.

지금이야 육아휴직도

남자도 어느 정도 자유롭지만

내가 어린 시절에는 공무원이었던

엄마의 출산휴가가 30일이 다였을 정도로

꽤나 고지식한 사회였다.


가부장이 아니라 가녀장의 시대는

시대의 흐름보다 훨씬 앞서서

내 삶에 깊숙이 들어왔다.

내가 두 아이의 엄마가 되고 나서

줄곧 엄마의 삶에 대해

상기하게 되는 것 같다.  



지금 딱 내 나이 무렵부터

 엄마가 홀로 두 아이를 책임지고

한 가정을 오롯이 챙겨가면서

애썼을 삶은 나로서는

상상조차 되지 않는다.


어렸지만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아니 오감으로 느끼고 있었다.



엄마가 자기 전에 당신의 방

침대 구석에서기도하는 소리는 정확히

내방에서는 들리지 않았지만

목소리가 무척이나 사무쳤고 애처로웠다.


이제 막 이사 온 동네인데

아빠 때문에 주변 가정에서

이사 갈 것을 종용한다는 걸 알았을 때

나는 엄마를 지켜줄 수 없어서

깊은 무력감을 느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마는 늘 밝았다.

자기전엔 늘 다정한 목소리로 우리 자매의 이름을 차례로 부르며

통통한 볼을 어루만져 주었다.


교회에서 기도하며 목놓아 울지 언정

당신이 너무 힘드니 너희가

아빠 역할의 일부를 담당해야 한다는

죄책감도 어떠한 프레임도 씌우지 않았다.


엄마가 되고 나서 느끼는 그때

당시의 엄마의 모습은

가히 어메이징 하다.

단언컨대, 말하지 않으면

아무도 몰랐을 것 같다.

그녀의 삶에 그늘진 부분과

나름의 고군분투를.




오늘은 딸이 B형 독감 판정을 받고

또 그게 폐렴으로까지

발전하게 된 것을 알게 되었다.

학교도 못 가고 안 자던 낮잠을 자고

약을 먹고 또 항생제까지 먹고

누워있는 딸을 보며

어린시절 내가 아팠던 그날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정확하진 않지만 지금

내 딸과 비슷한 나이였던 것 같다.


침대에 누워 꽉 막힌 한쪽 코에 대해

 불평하고 미열도 있어

괴로워하고 있던 어느 날,

 엄마는 퇴근 후 커다란 배를 사 와서

배 숙을 해주겠다며

배의 속심을 파내고 갈랐다.



이걸 꿀에 절이듯 끓이고

그 물을 마시면 기관지에 좋다고

덜 아프게 될 거라고

나를 위로하는 멘트도 덧붙였다.

엄마는 퇴근하고 옷도

갈아입지 못한 채 나부터 살폈다.



 부엌에서 서성이며 배를

약처럼 오래오래 달이던 그때의 엄마와

지금의 나는 심하게 비교된다.


아니. 어제 마침 남편이 배를

집에 사 들고 왔고 또 비슷하게

기관지가 아픈 딸이 있지만

배를 가르고 꿀에 절인 약을 내 손으로

직접 만드는 고생을 자처하기보다

약국에서 후다닥 처방해 온 약으로

얼른 이 고된 폐렴이 끝나길 바란다.


하려던 일도 채 마치지 못하고

몇 날 며칠을 이미 함께

고생한 터라 나 또한

아이만큼이나 지쳐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엄마의 자격이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모종의 죄책감을 느꼈다.  


 아마 만약에 임신 전에

이 세상 모든 여자들이 엄마 자격

 테스트를 치러야 한다면

아마 나는 인성 검사 및

실기시험에서 바로 탈락했을 것 같다.


 냉장고에 커다란 배를 보니

그날이 떠오른다.


아. 정말 달콤하고 부드러웠는데.


나에게 배숙은 엄마의 자격이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