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는 아이를 보는 마음
주말이면 도서관에 간다. 딱히 할 게 없기도 하고 더운 여름에 조용히 쉴만한 곳이라면 나에겐 당연히 카페가 떠오른다.
커피향기가 자욱하면서도 습하지 않는 곳. 살짝 차가운 듯한 냉기가 맴도는 카페에 죽치고 앉아 책이나 핸드폰을 하염없이 들여다보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힌다.
그렇지만 미취학 아동과 취학이지만 아직 어른의 감성에는 못 미치는 두 말괄량이들과 카페 나들이는 사치에 가깝다.
그래서 추려지고 골라진 곳이 도서관이다. 여유와 냉기라는 키워드는 똑같을 수 있지만 ‘쉼’이 없다.
막내가 산처럼 골라온 책을 쉼 없이 쳐내느라 에너지레벨이 잔인하게 깎여 나간다.
다행히 오늘은 조금 읽는 듯하더니 도서관에 붙어있던 야외 놀이터로 두 녀석이 뛰어 나갔다.
눈으로 아이들을 좇는 척하다가 이내 읽고 싶었던 책을 꺼내와 그야말로 ’ 쉼 없이‘ 읽어 내려갔다.
보통 책을 고를 때 제목도 살펴보지만 후루룩 책 중간 페이지를 편다. 그리고 바로 읽어 내려간다.
그렇게 직감적으로 한눈에 마음으로 읽히는 책을 고른다.
제목이 특이하기도 했지만 나와 추구하는 가치가 너무 비슷해 보였다.
한국의 지긋지긋한 사교육이 버겁고, 그렇다고 나 홀로 한 마리 고고한 학처럼 홈스쿨링을 할 자신은 없고, 또 그렇다고 우리 애만 방과 후에 가방 던져놓고 놀이터에서 팽팽 노는 모습을 본다는 건 맘이 편하지 않다. 참으로 이상한 심리가 아닐 수 없다. 복합적인 심정으로 주말에 도서관에 온 상태에서 그 책을 만난 것이다.
책 내용 중에 이런 글이 있었다.
이곳에서는 누가 동그라미를 굴리든 별을 굴리든, 아니면 네모를 굴리든 별로 상관하지 않는다. 나는 그런 그들의 생활 모습에서 틀에 박히지 않은 채 본인이 원하는 모습으로 살 수도 있는 자유로움을 읽었고, 다양성에 대한 존중과 그로 인해 개인의 삶의 만족도가 높아질 수 있음을 배웠다.'(p.7)
어쩌면 짧다면 짧은 문장이 그 순간 꽤 강렬해서 당장 네덜란드로 날아가 정착하고 싶은 듯한 충동에 사로잡히기도 했다.
그곳에서는 수영이나 자전거 타기 같은 종목 외엔 사교육 시장이 우리나라만큼 치열하지 않다. 아이들은 방과 후에 자기만의 저녁시간을 꾸리고 꼭 ‘누구보다’ ‘경쟁적으로’ 잘해야 한다는 부담감에 억눌리지 않는다고 한다.
누군가 나에게 아이를 키우면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관을 묻는다면 그 키워드는 단연코 ‘사랑’과 ‘행복’이다.
그렇지만 희한하게 행복하게 환히 웃으며 노는 아이를 보면서 내 안에 ‘불안’이 스멀스멀 기어오른다. 솔직한 심정이다. 저게 진짜 맞나. 하루에도 몇 번씩 가장 중요한 가치관이 흐트러진다.
‘한 학기 정도는 선행하는 게 맞지 않을까.’ ‘아냐, 복습만으로도 충분해 잘하고 있어.’ 하는 내 마음이 놀고 있는 아이들을 보며 스쳐 지나간다.
마치 심란한 내 마음을 이해한다는 듯 지구 어딘가에서 나와 비슷한 또래의 아이를 ‘행복’ 위주로 키우는 사람들이 있다는 게 괜히 위로가 되었다.
그렇게 단 숨에 책의 마지막장을 읽을 때쯤이었다. 한눈에 보기에 첫째 딸보다 한 뼘 정도 키가 작은 여자아이와 그 아이의 아빠가 내 옆자리에 진지를 구축했다.
한참을 부스럭거리더니 아이가 축 늘어진 에코백에서 빳빳하게 잘 다려진 듯한 학습지 한 뭉텅이를 턱 하고 내려놓았다. 한눈에 보아도 엄청난 학습량이었다.
그리고 아직 사칙연산도 쩔쩔매는 우리 딸과는 다르게 평면도형과 삼각형의 면적을 계산하는 문제를 잔뜩 풀고선 답까지 써놓았다.
방금까지 평평하게 별이 굴러가던 내 머릿속에선 다시 위기 경보가 울리기 시작했다.
책을 마지막 장을 채 읽지 못하고 덮었다. 반납트럭에 책을 올려두며 창밖에 아이들을 잠시 바라보았다.
땀을 뻘뻘 흘리는 아이들을 괜히 실내로 호출했다.
젠장. 진짜 이민이라도 가야 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