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모야모야 병이래. 뇌의 혈관이 무슨 담배연기처럼 얇아서 신경을 많이 써야 한데. 희귀 난치병이라 치료도 어렵다고 하고. 밥투정만 부리기 바쁘던 계란 반 판을 겨우 채운 어느 여름날 청천벽력과도 같은 선고가 떨어졌다.
맞벌이하는 부모님은 늘 바쁘셨다. 다른 부모님들이 당연하게 오셨던 학부모 참관회도 애써 뒤돌아 보지 않고 의연해야 했고, 10살이란 나이에 찬 물의 고통을 손 끝이 알게 되었다. 수 십 명의 학생들에게 1+1부터 1과 6분의 3이 소수로 어떻게 표현되는지 가르치고 돌아온 엄마는 항상 피곤했다. 하지만 우리 가족의 삼시 세 끼를 책임질 수 있는 사람 또한 엄마뿐이었다.
주황색, 연노란색, 흰색 야채들을 골고루 크기에 맞게 썰어 익히고 가루만 넣으면 완성되는 효율의 최고봉이었던 그놈의 카레. 물의 양에 따라 밥에 스며드는 검노란 소스의 맛도 조금씩 다르고, 소스가 진득하게 스며든 감자나 당근, 양파는 유독 입에 머금고 있으면 맛있게 느껴졌었다. 고기라도 조금 남은 날에는 고기의 맛까지 어우러져 최고의 한 끼를 채워줄 수 있는 요리임이 분명했다. 한 번 하면 몇 날 며칠을 먹을 수 있는 카레는 엄마의 단골 메뉴였으며 강황의 알싸한 매콤함은 홀로 말없이 음식물만 넘기는 혀를 저리게 했다.
"카레 좀 그만해 주면 안 돼?"
질리고 맛없어. 간편한 요리였던 만큼 식탁에는 너무나도 자주 올라왔고 이제는 그 맛있었던 카레가 그만 먹고 싶어졌다. 바쁜 엄마에게 투정 부렸다. 지영이네는 엄마가 맨날 고기도 구워주고, 치킨도 사준데. 그 말을 들은 엄마는 그렇게 좋으면 그 친구네 집에 가서 살라고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그다음부터 한동안 식탁에는 다양한 음식이 올라왔다. 진득하게 구수한 향이 오래도록 머물게 하는 된장찌개, 시큼한 향이 침이 절로 꼴깍 삼키게 하는 김치찌개, 자연스레 생일의 설렘을 떠올리게 하는 미역국. 엄마는 투정 부리는 날 위해 카레가 아닌 것들을 하기 위해 조금 더 오래 부엌에 서 있어야 했다.
드디어 지긋지긋한 카레에서 벗어났다고 생각했을 때쯤 아침에 눈을 떴는데 또 진한 강황향이 속을 뒤집어 놓았다. "또 카레야?" 짜증스럽게 나간 말에 엄마는 힘 없이 웃기만 했다. 그 웃는 얼굴이 마음을 덜컹 내려앉게 했지만 삐죽인 입술은 집어넣지 못했다. 학원을 마치고 돌아와 혼자 익숙하게 밥을 안치고 그 밥 위에 어울리지도 않는 샛노란 옷에 빨간 액세서리를 곁들여 먹고 있을 때였다. "엄마가 중환자실에 있어. 상태는 조금 지켜봐야 한다네." 아빠에게서 전화가 왔다. 씹고 있는 쌀알 한 톨 들이, 갑자기 큼지막하게 느껴지는 감자가 목을 콱 막히게 만들었다.
타고나길 연기처럼 얇아 약한 혈관이 원인은 모르겠지만 터졌다고, 정말 위험했다며 앞으로 엄마가 스트레스를 받지 않게 관리를 잘해줘야 한다는 말을 들었다. 모야모야가 뭔데 우리한테 이런 지옥을 맛보게 하는데? 그런 생각을 하고 있던 나에게 들이밀어진 원인 분석은 어느 아침의 내 투정을 떠올리게 했다. 미안하다고 울먹이며 사과를 건네는 나에게 볼품없이 목소리가 다 갈라졌으면서도, 세상에서 가장 창백한 얼굴을 하고 있으면서도 엄마는 또 웃었다. 엄마의 머릿속에 가득 차 있는 연기는 그렇게 내 마음에도 가득 찼다.
엄마를 이제 아프게 하지 말아야지. 내가 더 잘해야지.
그런 다짐을 하고 나서 엄마가 퇴원하는 날이 다가오니 마음이 초조해졌다. 아픈 엄마를 대신해 요리해야 하는데 할 수 있는 건 흰쌀밥뿐이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찾아 부엌을 이리저리 헤집어 놓다가 엄마가 잔뜩 사놓았던 찬장에 보관된 노란 상자를 발견하고 이거다. 싶었다.
분명 누구나 손쉽게 할 수 있는 요리라고 했으니 초보인 나도 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당근과 감자를 썰며 손가락 끝을 스쳐 지나가는 서늘한 칼날에 대한 두려움이 손을 더디게 했다. 엄마는 이렇게 무서운 걸 매번 우리를 했던 거구나. 새삼 알게 된 사실에 칼질이 더 느릿해졌다.
예쁘지 않은 색의 조합이 물에 가라앉으며 익을 때까지 기다리는 시간은 생각보다 더 지루했고, 다리가 아팠다. 언제 익을지, 혹시 물이 끓어 넘쳐 사단을 만들까 자리를 피할 수 없었다. 엄마는 이 지루함과 고단함을 또 우리를 위해 견뎠구나. 가라앉은 야채들이 유독 미워 보였다.
완성된 요리일 때는 몰랐던 끓어오를수록 퍼지는 알싸한 연기가 눈물 나도록 불쾌했다.
가장 손쉽다고 한 카레를 1시간이 더 걸려 완성했을 때 내게는 가장 어려운 요리가 되어있었다. 소스가 뒤덮고 있는데도 숨겨지지 않는 못생긴 모습들이 보여 얼굴이 홧홧해졌다. 제대로 익지 않은 당근이나 감자는 씹을 때마다 제 존재를 알리기 위해 혈한이었고 그럴수록 고개는 숙여졌다.
"맛있네. 우리 혜민이 이제 다 커서 엄마, 아빠한테 요리도 다 해주고. 고마워."
야채만 조금 더 작게 자르면 되겠다. 뒤따르는 말이 있었지만, 그 맛있다는 한 마디에 눈이 젖어들었다. 여직 카레에서 피어올라 공기 중으로 흩어지는 그 순간의 연기의 모습이 오래도록 마음에 남았다.
이젠 능숙하게 카레를 만들어내곤 하지만 뜨거운 밥 위로 강황 향과 함께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연기를 볼 때마다 다시 그날의 나로 되돌아간 것만 같은 기분을 느낀다. 이 매캐하지 않은 매콤한 향이 우리 집에 늘 가득 차길 바라며 한 숟가락 크게 떠 입에 머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