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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나스타샤 Oct 19. 2024

평범한 날의 특별한 순간

적적함을 달래기 위한 소소한 요구들

나는 시간을 쪼개어 바쁜 일상을 보내는 날이 많았다. 직장을 다닌 탓도 있지만 주말에도 일정 없이 보내는 날이 거의 없었다. 만성피로에 시달렸고 피곤하다는 말은 내가 가장 많이 하는 말 중에 하나였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숨만 쉬고 있는 날이 하루라도 있었으면 하던 시기였다.  


내가 그토록 바라던 숨쉬기, 딱 숨쉬기만 하면 되는 그런 날. 그날은 스케줄이 없는 주말이었다. 그분은 나에게 그 어떤 제안도 하지 않을 사람이었다. 아이들도 각자 자신들의 볼 일을 보느라 나를 귀찮게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니 난 눈만 깜빡이고 숨만 쉬면 된다. 


예상과 달리 집에서 아무것도 안 하고 숨만 쉬는 건 쉽지 않았다. 뺀질거리고 거실과 방을 왔다 갔다 하며 기웃거렸다. 적적하다는 표현이 입 밖으로 흘러나왔다.  


“여보, 나 왜 이렇게 적적하지? 믹스커피 좀 타줄래?”

“왜 적적해? 커피? 타주지 뭐.”


믹스커피의 달달함을 좋아하는 나는 기분 전환을 기대하며 그분에게 부탁했다. 그분이 타준 믹스커피는 한잔에 10만 원을 호가한다는 루왁 커피가 부럽지 않을 정도로 나를 만족시켰다. 가만히 앉아 최대한 아껴서 홀짝거려 먹어도 커피는 다섯 모금이면 끝났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적적한 기분이 또다시 밀려왔다. 이상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그냥 그런 날, 내가 그리도 바라던 날이었다. 그동안 못 봤던 TV를 보거나 그것도 아니면 글을 쓰거나, 책을 읽어도 될 일이었다. 그도 싫으면 잠을 청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평소 강한 수면 욕구에 비해 만족도가 낮았던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바람직한 행위는 낮잠이었다. 


공허하고 쓸쓸한 알 수 없는 감정에 적적하다는 말만 반복하며 그분을 괴롭혔다. 아까 먹은 믹스커피는 성에 차지 않았는지 어제 외출해서 산 캔 커피가 생각났다. 야구경기를 좋아하는 그분은 당장이라도 TV 속으로 들어가 경기를 뛸 기세로 집중하고 있었다. 그분에게 물었다. 


“여보, 어제 산 캔 커피 어디 있지? 아, 맞다. 차에 두고 안 가지고 내렸나 봐. 나 그거 마시고 싶은데 가져다주면 안 될까?”

“가져다주면 되지. 왜 안 돼. 지금?”


그분이 ‘지금?’이라고 묻는다는 건 내 입에서 지금 아니어도 된다는 말이 나오길 바라서였을 것이다. 나는 어떤 것도 손에 잡히지 않아 애꿎은 커피 타령인데 야구 경기에 집중하고 있는 그분이 못마땅해 “응. 지금.”이라 말하며 훼방을 놓았다. 


캔 커피를 받아 든 나는 좀 전에 믹스커피를 마셔서 더 이상의 커피는 들어가지 않는다며 한쪽으로 밀어 놓았다. 어이없어하는 것도 잠시, 그분은 다시 야구경기에 집중했다. 나는 앉았다, 일어났다, 누웠다, 섰다를 반복하며 그분 앞을 알짱거렸다. 그리곤 베트남에서 사 온 껍질째 있는 통 마카다미아 봉지를 그분 앞에 놓으며 말했다.


“TV도 재미없네. 입이 심심한가? 마카다미아 좀 까줄래?”

“야구를 보라는 거야. 말라는 거야?”


그분은 야구경기를 보느라 TV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 마카다미아를 까주며 말했다. 나는 해소되지 않는 감정 때문에 마카다미아를 먹으면서도 의미 없는 이야기를 쉬지 않고 종알댔다. 그날 그분은 야구경기를 보며 마카다미아를 까고 내 말을 듣느라 눈과 손과 귀가 바빴다. 


그분의 집중을 흐트러트리고 싶었다. 쉴 새 없이 그분에게 무언가를 요구하며 귀찮게 굴었다. 나에게 잠을 좀 자는 게 어떠냐고 묻기도 했지만 그분은 체념한 듯 “어휴, 야구는 무슨 야구야.”라며 그저 말없이 움직여주고 있었다. 나는 말했다.


“부침개 먹고 싶다.”


사 오겠다는 말과 함께 현관문을 열고 나가는 그분의 뒷모습이 보였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평범한 날이 주체할 수 없는 적막함으로 다가올 때가 있다. 그날이 그런 날이었다. 그분의 뒷모습은 나의 적적함을 달래 주기에 충분했다.


나에게 특별하지 않은 날은 없었다.



사진출처 : pexels-enginakyu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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