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anonymous
Apr 12. 2024
갑상선암이 재발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건 두바이 출장을 다녀온 직후 금요일이었다. 반절제 한지 3년 반만이었다. 그 전주에 동네병원에서 한 초음파검사결과로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종합병원에서 다시 잰 초음파상의 결절크기는 일 년 전보다 두 배 이상 커져 있었다. 나를 저위험으로 분류하고 늘 2분 컷으로 진료를 보던 교수님 표정이 그날 진지하게 변하는 것을 보았다. 물어보지 않으면 자세히 얘기하지 않았지만 결론은 12센티 이상 절개, 4시간 이상 수술이 필요하며, 수술날짜는 한 달 후로 잡아주겠다는 이야기였다. 다행히 시티상에 폐, 뼈 등 심각한 전이는 없어 보였다 다만 일 센티미터 남짓의 임파선 전이를 일 년 이상 방치해 두 배 이상 커졌기 때문에 눈에 보이지 않는 암세포 치료를 위해 방사선치료가 필요하다고 했다.
두 번째 수술은 차원이 달랐다. 삼 년 전 반절제 수술은 제왕절개를 두 번 겪은 나에게는 간단하게 느껴질 정도였었다. 다만 수술 후 한동안은 졸음이 쏟아져 하루종일 잠을 잤다. 살도 자꾸 쪄서 당시 사진을 보면 나도 내 모습에 흠칫할 정도였다
돌이켜보면 이 때 반대쪽에도 암이 숨어있었던 것 같다
그저 만성피로라 느꼈던 몸의 무거움, 고질적 불면증, 아침 늦잠이 계속되었기 때문이다. 남편은 내가 게을러서, 의지가 약해서라고 했지만 그 피로감과 우울감은 일상적인 것 과는 좀 달랐다.
후에 전절제와 좌측 임파선 곽청술(다 긁어낸 것이다)을 하고 나니 오히려 몸이 가벼워지고 잠을 좀 더 잘 자게 된 것이 이를 보여준다. 무튼 수술은 잘 된 것 같았다. 비록 목 한쪽이 부어 비대칭이고, 쇄골이 사라졌으며, 얼굴은 줄곧 땡땡 부어 가라앉을 줄 모르고, 수술부위가 계속 화끈거려 얼음을 대고 있어야 했지만 말이다.
의료파업이 시작되기 전에 수술을 할 수 있언던 것 만해도 다행이었다. 작년 내가 들이민 동네병원 소견서를 가볍게 치부해 넘긴 주치의에 대한 불신이 있었지만, 그래서 다른 병원 초진을 예약했었지만, 재발 전이는 빨리 하는 게 좋다는 언니의 말을 듣고 그냥 진행했었다. 잘했다.
수술이 끝나고 무지방식이를 이어가야 했고 몸상태가 좋지 않았기 때문에 요양병원에 가기로 했다. 문제는 내가 요양병원에 대해 무지했다는 데 있다. 7박 8일의 종합병원 입원기간이 끝나고 남편과 요양병원에서 보내준 차를 타고 오전 11시 반경 병원에 도착했을 때, 나는 알았다. 나는 이곳에 있는 게 싫다. 그렇지만 나를 데려다주고 오후 출근을 위해 돌아가야 하는 남편을 번거롭게 할 까봐 일단 방에 들어갔다. 첫 상담은 점심시간이 겹쳐 두 시로 잡혔는데 남편은 바로 내려가야 해서 방에서 좀 대기하다가 나 혼자 진료실에 들어갔다.
우리나라 요양병원은 비급여치료로 돌아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문제는 그 비급여치료를 일정금액하지 않으면 입원자체가 안된다는 점에 있다. 생전 처음 들어보는 주사제들로 구성된 170만 원짜리 치료스케줄을 받아 들고 나는 더 이상 여기 있을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제는 나는 너무 약해져 있었고 무거운 걸 들 수 없어 혼자서는 24인치 캐리어에 가습기, 침구 등의 짐을 들고 이동할 수 없었다는 점이다. 고민하다 친오빠에게 연락을 했다.
오빠는 결혼해서 마포에 살고 있었는데, 내가 서울 병원에 수술하고 입원해 있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병실에 오지는 않았다. (애초에 병실 출입이 불가능 하기는 하다) 남편은 처형이 한번 올법한데 오지 않으신다는 투로 이야기했다. 우선 오빠에 문자를 보냈다.
오빠 잠시 통화 가능해....?
요양병원에서 상담을 한 건 두 시, 병실에 돌아온 건 3시 반쯤, 나의 부름에 오빠가 달려온 건 4시 반쯤이었다.
오빠는 호텔을 잡아서 있는 게 좋겠다는 내게 오빠 집 근처의 A호텔을 추천해 줬다. 나는 택시를 타고 이동하며 우선 며칠 간의 숙박을 예약했다. 호텔에 가는 길 어머님한테 전화가 왔다.
"오늘 퇴원했다고 들었는데 요양병원은 잘 도착했니?"
이래저래 해서 호텔로 이동하고 있다고 말씀드리니
"다른 요양병원을 알아보지 그러..."
"어머님 제가 지금 이동 중이라 나중에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나는 전화를 끊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