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 테드
요즘은 학교가 학생들에게 편안함을 주려고 많이 노력합니다. 대부분의 학교에 등교맞이라는 행사가 있어, 학교장이 교문에서 등교하는 학생들을 친절한 미소로 맞이하곤 합니다. 아주 예전에는 선도부라는 학생조직이, 약간 전에는 학생부 선생님들이 무서운 표정으로 등교하는 학생들을 지켜보면서 복장 등의 규정을 지키도록 했는데, 이제는 머리가 하얀 학교장이 약간은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안녕!’ 하고는 인사말을 합니다. 가끔은 예전이 지금보다 좋았다라고 말하는 분을 보곤 하는데, 지금 세상이 훨씬 좋습니다. 학생에게 친절하고 자존감을 키워주려고 애쓰는 지금의 학교문화가 더 낫지요. 다만 오늘날에는 학생을 존중하고 배려하는 학교문화를 만들려다 보니, 교사와 학교장 모두에게 어느 정도의 연기력(?)이 필요하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합니다. 저는 그 연기력이 부족한 사람입니다....
어느 날인가 그날도 약간은 어색한 표정으로 등교맞이를 하며 등교하는 학생들을 살펴보았습니다. 멍한 표정으로 교문을 들어서는 대부분의 학생 중 일부는 귀에 이어폰을 끼고 있더군요. 무엇을 듣느냐고 물어보니 좋아하는 음악을 듣는다고 하더군요. 친한 남학생에게 잠깐 들어보자 하고 제 귀에 이어폰을 꽂아보니 크고 요란한 음향이 제 고막을 흔들었습니다. ‘아... 얘들과 나는 다른 세상에 사는구나!’ 하는 느낌이 들더군요. 저런 음악을 들으며 등교하면 아침부터 머리가 아프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가 다닌 고등학교에서는 대부분의 학생이 단어장을 들고 외워가며 등교하곤 했습니다. 저는 학업에 진심이었던 학생은 아니었지만, 다들 그러고 등교하니 저도 그냥 따라 했습니다(공부 열심히 하는 친구들은 타인을 피곤하게 했죠.). 아련한 추억이 떠오르네요. 그 당시 17번 버스를 같이 타던 ○○여고 여학생이 있었는데, 참 예쁜 여학생이었습니다. 늘 그 여학생 뒷자리에 앉아 매력적인 뒷모습을 보며 같은 반 친구와 그 여학생을 놀려먹곤 했습니다. 짜증이 날 만했을 텐데도, 경찰에 신고하지도 않고, 도도하게 내리던 그 여학생이 참 착한 여학생이었던 같습니다(사실은 저보다는 제 옆에 있던 김○○가 더 많이 놀렸다는 기억인데, 제 기억이 정확한지는 모르겠네요!).
본 이야기로 돌아가서, 뭐… 그렇다고 저는 학생들에게 7080 노래를 들으라 든가 클래식을 들어보라 권할 정도로 꼰대는 아닙니다. 대부분의 등굣길은 학생이 듣고 싶은 것을 듣지만, 일주일에 두 번 정도는 교육적 가치가 있는 콘텐츠를 듣고 친구들과 경험을 공유하는 경험을 하도록 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 생각에서 출발한 것이 바로 「테드(교육컨텐트)」 프로그램입니다. ‘테드’는 고유상품명이라 생기부 기재를 위해 ‘교육콘텐츠’란 대체 이름을 명명했습니다.
테드 프로그램은 등하교 자투리 시간을 이용하여 학생들이 주당 2회 테드를 2주간 듣고 100자 정도의 소감문을 작성하고, 금요일 점심시간에 시청각실에 모여 각자 인상 깊게 들은 내용과 소감을 발표하고, 공동으로 들은 테드에 대한 소감문을 학교 홈페이지 테드 폴더에 올리는 프로그램입니다. 4개 내용 중에 3개는 각자가 선택하여 듣고 그중 하나를 시청각실에서 열리는 발표회에서 발표하고, 1개는 학교에서 특정 내용을 지정하여 그 내용에 대한 소감문을 홈피에 올려 같은 내용에 대하여 다른 친구들은 어떻게 생각하는가를 알아볼 수 있도록 했습니다. 처음에는 주저주저하던 학생들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자발적으로 친구들 앞에서 자신이 들은 테드 내용과 느낀 점 등을 발표하는 모습을 보면서 학생들 내부에 자발성이 숨겨져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래는 학생들에게 나누어주는 테드 프로그램 서식입니다.
처음 테드 프로그램을 구상하며 공동 내용을 지정하는 것을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을 했습니다. 저는 테드라는 것을 이름 정도만 알고 있어, 그것을 어떻게 케치 하여 안내할지에 대한 방법을 몰랐으니까요. 우리 세대는 나름 디지털 리터러시에 대하여 생각은 하지만 실제 구체적 실천은 늘 스트레스가 되곤 합니다. 마침 도서관에 갔다 사서 선생님께 이 고민을 얘기했더니, 아주 쉽게 해결책을 제시해 주셔서 도움을 많이 받았습니다. 아래는 사서 선생님이 작성한 홍보물입니다. 젊은 선생님들은 이런 부분에서 확실히 역량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좀 다른 이야기인데, 학교에는 직접 수업을 하지 않는 비교과교사로서 사서, 보건, 영양교사가 있습니다. 이분들의 역량과 헌신이 학교 운영에 큰 영향을 미칩니다. 교과교사는 대게 5개 반 내외의 수업을 하므로, 그분의 영향이 수업하는 5개 반 정도에 미치게 되지만, 비교과교사의 활동은 학교 전체에 영향을 미치더군요. 예를 들어, 영양교사가 급식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면 학교 교육활동이 아무리 좋아도 학교 교육활동에 대한 학생들의 불만이 폭주하게 되고, 상담교사가 제 역할을 못하면 문제 학생들이 자꾸 사고를 키우게 됩니다. 마침 사서 교사는 젊은 분이고 학생들에게 친절한 분이라서 점심시간마다 많은 학생들이 도서관을 찾았습니다. 학기마다 이 비교과교사들를 모시고 저녁 식사를 하면서 감사함을 표현하곤 했습니다. 물론 제 사비가 아니라 학교 카드로요.
학생들이 테드 프로그램의 취지에 맞게 성실하게 활동하냐고요? 그럴 리가요…. 약간의 아쉬움이 있더군요. 제가 고등학생 때 영어 단어장을 외우고 등교하는 것처럼, 학생들도 등하교하며 테드를 듣고 바로 소감문을 작성하도록 안내하고 당부도 했지만, 대부분의 학생은 제출 당일에 테드를 몰아서 듣고 소감문을 작성하곤 하더군요. 어느 발표회 날, 요일을 정해놓고 테드를 듣고 곧바로 소감문을 작성하는 학생은 손들어보라 했더니 10% 정도 학생이 그렇게 하고 있더군요. 제 바람은 1년 정도 테드 프로그램에 참여하여 일정한 요일에 등교하며 테드를 듣다 보면, 나중에 고등학교 졸업 이후에도 테드를 들으며 세상에 대한 이해를 확대했으면 하는 것인데, 뭐… 요즘 애들이 어른 말을 듣나요? 제 말을 듣는 10% 학생에게 ‘너희는 나중에 크게 될 녀석들이야.’라고 덕담을 해주었습니다.
테드를 들어본 분은 알겠지만, 테드는 굉장히 풍부하고 다양한 콘텐츠를 가지고 있습니다. 들어보면 일상의 다양한 층위에서 다양한 성공과 식견을 갖게 된 사람들의 이야기가 흥미롭다는 생각을 합니다. 테드의 콘텐츠가 학생들로 하여금 세상의 다양한 측면을 이해하고, 다양한 방면에서의 관심과 흥미를 끌어올릴 수 있을 거라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홈피에 업로드된 공통 소감문을 읽어보거나, 시청각실에서 발표하는 내용을 듣다 보면 저도 배우는 바가 많았습니다. 학생들의 발표에 가끔은 멘트를 달곤 했지만, 현재의 학생들이 정보와 지식을 쌓아가는 방식과 제 세대에 그것을 쌓아온 방식은 단순히 매체의 차이만이 아닌 근본적인 차이가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곤 했습니다.
아래는 1년간의 테드 프로그램 운영 결과입니다. 제가 직접 홈피에 다음 회 테드 소감문 양식을 업로드하고, 점심시간 발표회를 주관하며, 소감문을 받아 도장을 찍어 다음 발표회에 나누어 주곤 했습니다. 사서 선생님이 도와주겠다 했지만, 그분도 사서로서 기본적인 업무를 해야 하는지라 제가 직접 운영했는데, 크게 어렵거나 많은 시간이 드는 것은 아니더군요. 한 번은 혹시 학생들이 전에 낸 소감문을 반복해 내거나, 다른 친구의 이전 소감문을 내거나, 홈피 업로드 소감문을 다른 친구의 것을 베껴 내지 않나 하여 확인해 보았는데, 그런 경우를 발견하지는 못했습니다. 저라면 그런 짓을 했을 것 같은데... 많은 순간에 학생들이 저보다 훌륭한 인간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오늘날 학교 외 배움에 대하여 생각해 봅니다. ‘가르침’과 ‘배움’은 다른 개념입니다. 가르침은 의도성을 갖고 인간을 변화시키고자 하는 행위를 말하는 것이라면, 배움은 개별 인간이 지식과 정보를 자신의 인지구조에 통합하고 각성해 나가는 행위를 의미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배움에는 가르치려는 의도에서 벗어난 것들도 있을 수 있고, 의도하지 않고 주위 환경에서 얻어지는 것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교육이라는 것이 결국은 개인의 변화를 추구하는 것이라면 배움을 중심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입니다.
교사를 하면서 어느 때부터인가 저의 가르침이 학생들 마음에 꽂히지 않고, 그냥 내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바람 같다는 느낌이 들더군요. 그때는 내 정성과 노력이 부족한 것이 아닌가 하는 성찰도 해보고, 때론 이번에 만난 학생들은 나와 잘 안 맞나 보다고 편하게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찬찬히 생각해 보니, 학생을 둘러싼 문명사적인 환경의 변화가 배움의 영역을 바꾸어 놓았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예전에는 교사와 학교가 제공하는 수업과 학교문화 등이 학생의 배움을 일으키는 주요 공간이었지만, 이제는 미디어와 인터넷을 기반으로 하는 환경이 학생을 중심으로 광범위하게 제공되어, 오히려 교사와 학교가 제공하는 의도적이고 계획된 가르침의 영역을 압도한다는 생각입니다. 이런 점을 인정한다면, 오늘날 교육의 영역에서는 의도성은 많이 약화되고 학교의 역할 비중도 많이 축소된 것이 아닌가 합니다.
저는 오늘날 학교교육에서 간과하고 있는 부분이 학생의 학교 밖 배움에 대한 관심이라 생각합니다. 만약 실제 학생이 배움을 얻는 환경이 학교에서의 교과보다 유튜브 등의 외부 매체가 더 크다면, 더 큰 영역에서 학생들의 학습 관련지도와 안내가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물론 이런 시도는 교육의 영역을 확정하기도 힘들고, 다양성으로 인하여 교육의 방향과 의도를 정하기 어려운 점은 있습니다. 그렇다 하여 세상의 변화에 눈을 감고 학교는 기존의 활동을 좀 더 성실하게 수행하겠다고만 고집하는 것은 교육조직의 자기만족일 수는 있지만, 학생이란 인간의 배움에 대하여 총체적인 책임을 지고 있는 집단과 조직으로서는 부적절한 주장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저는 그런 생각을 합니다. 오늘날과 같이 인터넷 환경이 구축된 세상에서는 개인의 무지와 편견은 단지 ‘게으름’의 문제라고요. 유튜브를 보면 세상의 온갖 지식과 정보가 있어 오로지 내가 그것들을 검색하여 적적한 수준으로 이해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기만 하면 정말 많은 것을 배우고 각성할 수 있습니다. 더군다나 요즘은 AI가 나의 선택을 도와주니 얼마나 좋습니까? 사실은 약간 무섭다는 생각도 합니다.
테드 프로그램을 추진한 숨은 목적 중 하나는 교과로 분절된 학교교육의 한계를 벗어나 세상의 다양한 콘텐츠로부터 학생의 배움을 유도하고 싶다는 생각이었습니다. 테드 프로그램의 경험이 직업이 정해진 후에도 유튜브 등을 통해 다른 세계에 대한 정보와 간접 경험을 하려는 태도를 길러, 한 개인을 균형 있고 새로운 시각을 갖도록 도울 수 있다는 기대도 합니다. 저는 학교교육의 변화에 대한 답을 제공할 만한 지력이 있는 사람은 아니지만, 여러 방면에 걸쳐 학교 교육이 변화하고 재정비할 시기가 다가왔다는 판단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