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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현형학교

1화 - 목요학술포럼

학생들은 늘 바쁩니다. 공부를 열심히 하는 학생들은 복습과 학원수강 등으로 바쁘고,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는 학생은 게임이나 길거리를 돌아다니느라 바빠서 방과 후에는 학교에 있으려 하지 않습니다. 학교에 있는 동안 좀 더 유의미한 경험을 하도록 안배하는 것이 학교운영의 주요 지향점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교장으로 부임한 첫해에 각종 교육활동과 학생활동을 지켜보면서 학교풍토가 좀 더 학구적으로 바뀌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갖게 되었습니다. 수업시간을 제외하고 학생들이 무엇인가를 할 수 있는 시간은 점심시간이라는 생각으로 70분간의 점심시간에 학구적 분위기를 조장하는 활동을 구상하게 되었습니다.

 

         

「목요학술포럼」은 격주 목요일 점심시간에 학생이 연구한 주제를 친구들 앞에서 발표하는 프로그램입니다. 발표를 희망하는 학생은 발표 주제를 정하고 지도교사를 찾아 3회의 지도를 받은 후 지원부서에 포럼 신청서를 제출합니다. 지원부서에서는 포럼 실시일에 3명 내외의 발표자를 정하여 발표 장소를 지정하고 복도 컴퓨터의 안내 화면과 교내 방송을 통해 포럼을 홍보합니다. 일반 학생들은 흥미를 느끼는 주제를 찾아 점심 식사 후 포럼에 참가합니다. 포럼은 30분 진행이 원칙이며 발표자의 발표 후에는 질의응답과 토의 기회도 있습니다.    


아래 표는 2020년에 실시한 포럼 현황입니다. 학생들의 관심 분야가 다양함을 알 수 있습니다. 실시 첫해 발표하는 것을 지켜보니 온라인에 떠도는 정보에 발표자의 생각 정도를 엮어 발표한다는 느낌을 주는 경우가 여럿 있었습니다. 포럼 시행 3년 차부터는 발표 주제와 관련된 논문 한 편 이상을 DBpia 논문검색 사이트에서 찾아 읽고 그 내용을 발표에 포함하도록 정하였더니 발표 내용의 수준이 훨씬 높아짐을 관찰할 수 있었습니다.                                                                        

     

다음은 포럼에서 발표한 학생이 발표 후에 지원부서에 제출한 소감문입니다.                    


목요학술포럼을 추진하면서 느낀 점이 두 가지 있습니다. 하나는 학교풍토를 주도하는 학생들이 바뀐다는 것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학교에서 화제의 중심이 되고 스타 대접을 받는 학생은 활달하고 유머러스한 학생인 경우가 많습니다. 어느 날인가 복도를 지나가는데 1학년 여학생 몇 명이 앞에 가는 2학년 남학생을 보고 “저 오빠 지난주에 목요학술포럼을 하는 걸 봤는데, 짱 멋있었어!”라고 말하더군요. 여학생들 앞에 가던 그 남학생의 어깨가 부풀어 오르는 모습을 보며 ‘저런 것도 학창 시절의 멋진 추억이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1주일 전부터 복도의 안내 화면에 띄워두는 자신의 얼굴과 발표 주제가 나오는 것을 보며 발표 학생 스스로 상당한 자부심과 책임감을 갖게 되는 것 같습니다.      

학교장으로서 좀 더 평범한 학생들이 용기를 내어 발표자로 나섰으면 하는 바람으로 학생들과 선생님들을 설득해 보았지만, 안타깝게도 실제 발표자로 나서는 학생은 평소 공부를 잘하는 학생이 대부분입니다. 

    

목요학술포럼을 추진하면서 느낀 점 중 다른 하나는 학교교육활동에 대한 외부의 간여를 어떤 관점으로 보고 어떻게 대처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처음 포럼을 하면서 보니 당시 1학년은 아무리 설득해도 발표하겠다 나서는 학생이 없어 2학년 학생을 중심으로 발표자로 나서도록 설득했는데, 1년 후 신입생은 입학 초부터 포럼 발표 희망자가 여럿 나왔습니다. 이미 지역사회에 본교의 목요학술포럼이 알려지고 이러한 활동이 대학입시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기대로 가정은 물론 학원까지도 입학 전부터 포럼을 준비하도록 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들었습니다.      


어느 정도까지는 외부의 도움과 권유가 용인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외부에서 참여 결정 자체에 개입하거나 발표 주제의 선정과 주요 내용에 간여하는 것은 문제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여러 해 전에 강남 고교로부터 시작한 ‘소논문 쓰기’ 프로그램이 학식과 인맥을 가진 가정의 자녀에게 지나치게 유리한 기회가 되고 소논문 작성에 학생 본인보다 멘토가 지나치게 개입한다는 부작용이 있어 교육부 지침으로 소논문 관련 사항을 학교생활기록부에 기재하지 못하도록 한 바 있는데, 제가 구상하여 시행하는 목요학술포럼도 그런 폐해를 가져오는 것이 아닌가 하는 걱정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 의심이 든 후로는 포럼 지도교사에게 얘기하여 학생이 발표 주제를 어떻게 생각하게 되었는가와 논리 전개 과정이 학생의 생각을 중심으로 진행되는가를 확인하도록 합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외부 도움을 받는 사실을 숨기고 발표자로 참여한다면 그런 경우까지 방지하기는 어렵다는 판단입니다.    

  

신뢰를 바탕으로 추진하는 일들은 깊은 어둠 속에서 길을 나설 때 발아래 길이 이어져 있을 것이라는 기대로 한발 한발 내딛는 것처럼 인간에 대한 어쩔 수 없는 믿음을 바탕으로 진행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교육에서의 수월성에 대하여 생각해 보곤 합니다. 우수한 학생이 많은 학교 또는 지역에 근무하는 선생님과 이야기를 하다 보면 목요학술포럼과 같은 프로그램이 제가 근무하는 외곽지역 학교에서 실시하는 것이 적절하지 않은 것이 아니냐는 의견을 갖는 분을 보기도 합니다. 관심 주제를 심도 있게 연구하고 발표하는 것은 특목고와 같이 우수한 학생들이 모인 학교에서나 실시하는 것이 적절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는 것 같습니다. 사실 목요학술포럼을 구상할 때 저도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제가 내린 결론은 비록 평범한 재능을 가진 학생이라도 다소 버거운 과업을 수행하다 보면 활동 과정을 통해 수월성을 키울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재능이라는 것이 천부적인 측면도 있지만 살아가면서 경험과 의지로 키워나갈 수도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합니다. 물론 타고난 재능이 덜한 사람이라면 수월성을 보이기가 힘들고 실패할 가능성도 크지만, 그런 위험성 때문에 자신을 채찍질하지 않아야 한다고 판단한다면 이는 삶을 비겁하게 사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입니다.   

   

성장 환경이 열악하고 어려서부터 학업에 대한 집중이 덜한 학생이라면 타고난 재능을 진흙 속에 묻혀두고 있을 수도 있으니, 고등학생 정도 되면 진흙을 닦아내 보려는 시도가 필요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재능 부족이든 노력 부족이든 최선을 다해보려는 시도는 설령 그 시도가 기대한 수준에 도달하지 못하더라도 삶을 당당하게 사는 태도이며, 좌절에서 얻은 상처가 다른 도전에서는 좋은 경험과 교훈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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