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두기봉, 〈문작〉
C04. 드넓은 도심, 우아한 소매치기 – 두기봉, 〈문작〉(2008)
드넓은(!) 홍콩 도심
두기봉의 도심은 넓습니다. 홍콩이 얼마나 드넓은 공간인지를 두기봉의 영화는 여봐란듯이 가르쳐줍니다. 홍콩을 이토록 드넓게 찍을 수 있는 감독이 또 있을까요. 천하의 유위강도 〈무간도〉(2002) 3부작에서 홍콩을 두기봉만큼 넓게 찍지는 못했습니다.
반대로, 왕가위 영화 속 홍콩은 그야말로 비좁아 터진 공간입니다. 실은 이것이 기존의 영화들 속 홍콩의 이미지에 가까울 것입니다. 제 기억 속의 홍콩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오죽하면 〈타락천사〉(1995)를 왕가위는 그토록 극단적인 광각렌즈로 찍었겠습니까. 그렇게라도 공간을 확보하지 않았다면 여명의 총격전 액션을 그처럼 우아한 모양새와 동선으로 화면 속에 담아낼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기이하게도 그 협소한 느낌은 그 자체로 한없이 매력적입니다.
그래서 왕가위 영화 속의 숨 막힐 듯 협소한 홍콩은 기이하리만큼 폐소공포증하고는 무관한 공간이 되어 있습니다.
한데, 두기봉은 일본의 그것과는 또 다른 성질인 그 축소 지향의 공간을 아주 간단히 부정해 버립니다.
홍콩이라는 공간이 보는 이에게 이토록이나 탁 트인 해방감을 줄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의 쾌감은 참 유별난 것입니다.
왕가위 영화 속 홍콩이 비좁아서 매력적이라면, 두기봉 영화 속 홍콩은 드넓어서 매력적입니다.
더욱 신기한 것은 두기봉 영화 속의 그 드넓은 홍콩도 비좁은 홍콩과 하등 다르지 않게 분명히 홍콩으로 느껴진다는 사실입니다.
한쪽이 비좁고 다른 한쪽이 드넓다면, 둘 가운데 하나는 전혀 다른 도시인 양 느껴져야 할 터인데, 실은 그렇지가 않다는 것입니다.
이 점 두기봉의 마술입니다. 또는 홍콩의 마술일까요?
세르지오 레오네의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더 웨스트〉(1968)에서 카메라가 천천히 움직이며, 또는 떠오르며 모뉴먼트 밸리의 전경을 파노라마로 보여줄 때, 그 가없이 아름다운 시각적 해방감을 두기봉 영화 속의 홍콩 도심에서도 느낄 수 있다는 것은 정말 기적이라는 말로밖에는 설명할 길이 없을 듯합니다.
〈대사건〉(2004, 두기봉) 초반부의 그 기나긴 롱테이크를 시작하는 압도적인 틸팅의 첫 커트를 잊을 수 없습니다.
두기봉은 홍콩의 도심을 그야말로 ‘물리적으로’ 넓혀놓은 감독이라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홍콩 도심을 한가롭게 거닐고 싶다는 욕망을 저는 두기봉 영화에서 처음으로 느꼈다고 고백합니다.
〈문작〉 속의 홍콩 도심은 아마도 두기봉의 영화 전체를 통틀어서도 가장 넓지 않은가, 싶습니다.
한 마리 새가 허공을 종횡무진 휘저으며 날아다니는 〈암전2〉(2014, 나영창 & 두기봉)의 홍콩 도심도 〈문작〉 속의 그것만큼 넓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적어도 저는 그렇게 느꼈지요.
한데, 이는 물리적인 공간감과는 성격이 조금 다른 것입니다. 그래서 더욱 신기합니다.
마치 〈황비홍〉(1991, 서극)에서 이연걸이 비좁은 공간을 한없이 넓게 쓰며 상대를 제압했던 것처럼, 〈문작〉 속의 임달화도 홍콩 도심을 한없이 넓게 활용합니다.
물론 이연걸은 무술 솜씨로 그렇게 했지만, 임달화는 소매치기 솜씨로 그렇게 합니다.
공통점은 ‘우아함’입니다.
〈황비홍〉 속의 이연걸도, 〈문작〉 속의 임달화도 한없이 우아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우아한(!) 소매치기
소매치기와 관련된 영화로 제 기억에 인상적으로 남아 있는 작품은 로베르 브레송의 〈소매치기〉(1959)와 장현수의 〈걸어서 하늘까지〉(1992)입니다.
〈소매치기〉는 즉물적인 차원에서, 〈걸어서 하늘까지〉는 정서적인 차원에서 제 머릿속에, 또 가슴속에 깊은 인상을 남겼습니다. 여기에 이제 〈문작〉을 추가합니다.
〈문작〉은 정서적인 차원보다는 즉물적인 차원에 조금 더 가까운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굳이 견주어본다면 〈걸어서 하늘까지〉보다는 〈소매치기〉 쪽이라고 하면 될까요.
하지만 이 즉물적인 성격이 한없이 매혹적이라는 점에서 〈문작〉은 〈소매치기〉와 〈걸어서 하늘까지〉를 압도합니다. 여기서 매혹적이라는 것은 한없이 비좁은 공간을 한없이 드넓게 활용하는 두기봉의 솜씨에 빚지고 있는 감흥입니다.
〈소매치기〉의 소매치기는 숨 막히는 긴장으로 시종일관 보는 이를 옥죄고 들지요. 한데, 놀랍게도 그 긴장은 어느 순간 지극히 즉물적인 쾌감으로 변합니다. 이것이 브레송의 솜씨입니다. 또는, 마술이라고 해야 할까요.
하지만 〈문작〉에서 두기봉이 겨냥하는 것은 그 숨 막히는 즉물적인 긴장감이 아닙니다. 〈문작〉 속의 소매치기는 한없이 우아합니다. 앞서도 밝혔듯이, 이 우아함은 두기봉 영화 속의 그 드넓은 홍콩 도심이 빚어내는 해방감하고 관련이 있습니다.
그래서 〈문작〉 속의 소매치기는 일종의 무용(舞踊)이 됩니다. 비좁은 공간에서 무술(武術)은 할 수 있을지언정, 무용을 할 수는 없지 않을까요.
슬로 모션을 이토록 아름답고 우아하게 보여주는 사례로 저는 이명세의 〈인정사정 볼 것 없다〉(1999)를 첫손가락에 꼽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임달화가 쏟아지는 빗줄기 속에서 검은 우산을 펴 든 채 여자 임희뢰의 운명을 놓고 도박과도 같은 마지막 소매치기 액션을 펼칠 때 거기에 환영처럼 오버랩되는 이명세의 이미지들을 무슨 수로 걷어낼 수 있을까요.
두기봉과 이명세는 이 장면에서 그야말로 서로 통(通)합니다. 한없이 아름답고 한없이 우아하게―.
홍콩영화 속의 임달화를 저는 좋아한 적이 별로 없습니다.
하지만 〈문작〉 속의 임달화만은 좋아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앞으로 제가 아무런 단서 없이 임달화를 좋아한다고 말한다면 그 임달화는 〈문작〉의 임달화입니다.
그는 우아합니다. 〈첩혈쌍웅〉(1989, 오우삼) 초반부의 주윤발만큼이나요. 또는, 그보다 조금 더요.
이 우아함이 저는 참을 수 없을 만큼 좋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