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두기봉 , 〈암전〉
C03. 배우보다 영화? 영화보다 배우! – 두기봉, 〈암전〉(1999)
글쓰기의 욕망을 자극하는 영화
〈암전〉을 보다가 〈첩혈쌍웅〉(1989, 오우삼)을 떠올리는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일 것입니다. 적어도 제게는 그렇습니다. 터무니없이 가슴을 뜨겁게 달구고, 그 뜨거움을 글로 표현하고 싶은 욕망을 자극하는 그 무엇이 〈암전〉에는, 〈첩혈쌍웅〉처럼, 있습니다.
이수현과 주윤발
제 기억이 맞다면, 영화 속에서 이수현과 주윤발은 서로 한 번씩 역할을 바꾸어가며 형사와 킬러(또는 갱)로 두 번 만났습니다. 한 번은 〈용호풍운〉(1987, 임영동)에서, 또 한 번은 〈첩혈쌍웅〉에서였지요.
〈용호풍운〉에서는 주윤발이 형사였고, 〈첩혈쌍웅〉에서는 이수현이 형사였습니다. 하지만 이런 역할의 차이 말고, 이 두 영화 사이에는 굉장히 중요한 차이가 있습니다. 아니, 저는 이 차이가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용호풍운〉에서 이수현은 주윤발이 형사라는 사실을 모릅니다. 하지만 〈첩혈쌍웅〉에서 두 사람은 서로 상대의 정체를 잘 알지요.
이 점에서 〈용호풍운〉은 뒷날의 〈도니 브래스코〉(1997, 마이크 뉴웰)와 연결되고, 〈첩혈쌍웅〉은 〈암전〉과 연결됩니다.
제 생각에 〈무간도〉(2002, 유위강 & 맥조휘) 트릴로지는 이 양쪽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제3의 계열입니다. 이 점에서 〈무간도〉 시리즈는 상당히 어려운 일을 해낸 영화라고 저는 생각하지만, 이것은 또 다른 테마일 것입니다. 물론 마틴 스콜세지의 〈디파티드〉(2006)도 일종의 리메이크니, 여기에 포함될 수 있겠지요.
그러니까 굳이 분류하자면 〈암전〉은 〈첩혈쌍웅〉 계열에 속한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우애와 배신의 매력
이 네 편의 영화들은 모두 기본적으로 서로 신분이 다른, 그것도 ‘적대적인’ 또는 ‘운명적으로 적대적일 수밖에 없는’ 신분의 두 남자 사이에 이루어지는, 또는 오가는 ‘이상한’ 우애를 테마로 삼고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에도 차이가 있습니다. 〈용호풍운〉과 〈도니 브래스코〉에서 이 ‘우애’는 깊은 배신감의 위험을 바탕에 깔아 두고 있는 반면, 〈첩혈쌍웅〉과 〈암전〉에서는 그렇지가 않다는 점입니다.
꼭 이 배신의 위험이 있느냐 없느냐의 여부와 상관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저한테는 역시 〈첩혈쌍웅〉과 〈암전〉 계열이 〈용호풍운〉과 〈도니 브래스코〉 계열보다 조금 더 매력적입니다.
2프로 부족함의 매력
사전에 아무 정보 없이 〈암전〉을 보다가 제가 느낀 강렬한 기시감의 정체가 바로 〈첩혈쌍웅〉과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 기시감은 주윤발과 유덕화 사이의 것이 아니라, 이수현과 유청운 사이의 것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저는 유청운에게서 이수현을 ‘느낀’ 것입니다. 상대적으로 유덕화에게서 주윤발을 느끼기는 조금 어려웠습니다.
하지만 둘 가운데 누가 더 매력적이냐는 질문에 답하자면, 저는 유청운보다는 아무래도 이수현 쪽입니다.
심지어 이수현은 〈첩혈쌍웅〉에서조차 주윤발보다 정서적으로 더 강렬하게 다가오는 캐릭터입니다.
주윤발은, 언젠가 오우삼 감독이 그를 두고 표현한 대로, 그 자체로 한없이 ‘우아한’ 배우임에 틀림이 없고, 여기에는 저도 넉넉히 동의하지만, 어쩐지 그는 늘 2프로 부족하다는 느낌입니다.
〈영웅본색〉(1986, 오우삼)에서는 적룡보다 조금 덜했고, 〈첩혈쌍웅〉에서는 이수현보다 조금 덜했습니다. 적어도 제게는 그렇습니다.
어쩌면 거꾸로, 그 2프로 부족한 것이 주윤발의 진짜 매력인지도 모르지요. 살짝 빈 곳이 있는, 그래서 더더욱 인간적인 매력 말입니다. 너무 완벽하면 외려 인간미가 느껴지지 않으니까요.
유청운의 매력
아마 일차적으로는 이 지극히 개인적인 기호 탓이겠지만, 형사 이수현에게서 제가 느꼈던, 그리고 지금도 볼 때마다 변함없이 느끼게 되는 저 거부할 수 없는 강렬한 매력과 비교해 보면, 형사로서 유청운은 왠지 어울리지 않는다는 느낌이 드립 커피 내려받을 때 남는 찌꺼기처럼 뒤에 자꾸만 남습니다. 역시 〈첩혈쌍웅〉을 제가 워낙 좋아해서일까요?
〈매드 디텍티브〉(2007, 두기봉 & 위가휘)의 유청운도 썩 매력적이지는 않았습니다. 적어도 저한테는요.
제가 유청운이라는 배우 자체를 별로 좋아하지 않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딱히 싫어한 것은 아니지만, 저는 유청운을 깊이 좋아한 적은 분명히 없습니다. 앞으로도 그렇게 좋아질 것 같지 않습니다.
다만 〈암전〉의 유청운한테만은 어쩐지 크게 거부감이 없더라는 고백은 해야겠습니다. 아니, 모든 영화를 통틀어 유청운이 저한테 매력적으로 다가온 작품은 〈암전〉이 유일합니다. 〈암전2〉(2014, 두기봉 & 나영창)도 이 점에서만큼은 〈암전〉에 못 미친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관계의 차이
간암으로 시한부 인생을 사는 범인 유덕화와 그를 쫓아다니는 형사(정확히 말하면 네고시에이터, 곧 협상가 또는 교섭가) 유청운 사이에 어떤 ‘동질감’이나 ‘우애’의 정서가 만들어지는 것 자체는, 이미 〈첩혈쌍웅〉이라는 돌올한 사례도 있듯이, 그리 새로운 설정은 아닙니다.
하지만 새롭지 않은 설정인데도 그것으로 보는 이의 가슴을 여지없이 뜨겁게 달군다는 데 〈암전〉의 저력이 있습니다.
하지만 〈첩혈쌍웅〉과 〈암전〉은 비슷하면서도 너무나 다릅니다. 이는 유덕화와 유청운의 관계가 주윤발과 이수현의 관계와 비슷하면서도 너무나 다르다는 데 기인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한 마디로 ‘도둑과 네고시에이터’라는 관계와 ‘킬러와 강력계 형사’라는 관계의 차이입니다. 그래서 〈암전〉은 〈첩혈쌍웅〉과 같은 처절한 결말을 피해 갈 수 있었던 게 아닌가, 싶습니다.
어쩌면 이는 두기봉과 오우삼의 차이일 수도 있고, 단순히 시대(배경)의 차이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나만의 두기봉 영화
어쨌거나 이로써 〈암전〉은 〈첩혈쌍웅〉과 다른 길을 갑니다.
저는 이렇듯 〈암전〉이 〈첩혈쌍웅〉과 다른 길로 나아갔다는 점이 참 흐뭇합니다.
그것은 구체적으로 결말의 다름으로 드러납니다.
제가 사전에 아무 정보 없이 〈암전〉을 보았다는 고백은 이미 앞에서 했지요. 그래서 저는 영화를 보는 내내 마음속으로 〈암전〉의 결말이 제발 〈첩혈쌍웅〉의 결말과 다르기를 간절히 기원했습니다. 두기봉 감독은 저의 이 간절한 기원을 고맙게도(!) 들어주었고요.
덕분에 저는 〈암전〉을 제가 좋아하는 영화의 목록에 넣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적어도 제가 가장 좋아하는 두기봉 영화라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니게 되었습니다.
‘스타일’의 매력으로 범주를 좁혀도 저는 〈익사일〉(2007)보다 〈암전〉이 더 마음에 듭니다.
누가 저한테 두기봉 영화들 가운데서 어떤 작품이 가장 걸작이라고 생각하느냐고 묻는다면 〈흑사회〉(2005)와 〈흑사회2〉(2011) 사이에서 조금 망설이겠지만, 어떤 작품을 가장 좋아하느냐고 묻는다면 저는 이제 망설이지 않고 〈암전〉을 꼽을 것입니다.
영화보다는 배우
〈암전〉의 멜로 설정도 가슴을 저미는 구석이 있습니다.
버스에서 만난 두 남녀의 이 기이한 운명적 이별―.
이는 그 은근함에서 〈첩혈쌍웅〉의 멜로 설정, 곧 주윤발과 엽천문 사이의 멜로보다 정서적인 감응력이 조금 더 높습니다. 적어도 저한테는요.
심지어 저는 여기서 〈8월의 크리스마스〉(1998, 허진호)를 떠올리기조차 하였습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저는 〈암전〉의 유덕화에게서 〈8월의 크리스마스〉의 한석규를 ‘느낀’ 것입니다.
그리고, 마치 유덕화가 마음껏 활약하도록 멍석을 깔아주고 가만히 지켜보는 듯한 유청운의 인간적인 매력―.
저는 이제 고백할 수 있습니다. 적어도 〈암전〉의 유청운만큼은 제가 좋아하는 배우의 목록에 들어간다고요.
쓰다 보니 영화 〈암전〉 자체보다는 배우 유청운에 방점을 두게 된 것 같기도 하네요.
하긴 제게 무엇보다도 배우의 매력을 새삼 느끼게 해 준 감독이 바로 두기봉이니, 이는 속절없는 노릇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