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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정수 Nov 23. 2024

C02. 핸드폰 이전 시대의 사랑

  - 콘도 요시후미, 〈귀를 기울이면〉

C02. 핸드폰 이전 시대의 사랑 – 콘도 요시후미, 〈귀를 기울이면〉(1995)

청혼의 소리

   가만히 귀를 기울이면 들려오는 소리가 있습니다. 악기 소리일까요? 노랫소리일까요? 아닙니다. 그것은 청혼(!)의 소리입니다. 정말입니다.

   가만히 귀를 기울이고 있노라면 이 영화의 맨 마지막 장면에서 마침내 청혼(請婚)의 소리가 들려옵니다. 참 오랜만에 듣는 ‘소리’지요.

   하지만 이 애니메이션은 멜로드라마가 아닙니다. 로맨틱 코미디도 아닙니다. 그럼 어떤 영화일까요?

   그렇습니다. 청춘(!)영화입니다. 그것도 중학생(!)들의 이야기랍니다. 대학생도 고등학생도 아닌 중학생―.

   한데, 그 중학생들이 마지막 순간 청혼을 주고받습니다. 정말입니다.

   이 애니메이션은 바로 그 청혼의 장면을 향해서 나아가는 이야기입니다.

   그렇다고 시종일관 줄기차게 달려간다고까지는 말 못 하겠습니다. 여기에는 청춘의 고뇌가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청춘이라고 하기에도 중학생은 너무 어린 느낌이기는 합니다.

   미래에 대한, 직업에 대한, 재능에 대한, 그리고 그 나이 또래 특유의 좁고 미시적인 인간관계에 대한 고민, 그리고 꿈과 환상, 무엇보다도 고양이―.


기다림이 사라진 세상

   〈귀를 기울이면〉에는 이 애니메이션이 지금으로부터 한 세대(30년) 전에 만들어졌다는 사실에서 오는 기이한 향수가 있습니다. 감각의 익숙함을 뛰어넘어 그리움의 정서를 날카롭게 자극하는 남다른 요소들이 있다는 뜻입니다.

   애니메이션으로 범위를 좁히면, 학창 시절에 대한 향수는 호소다 마모루의 〈시간을 달리는 소녀〉(2007)와 같은 애니메이션에서도 맛볼 수 있으니, 그리 새삼스러울 것은 없겠습니다.

   그러나 〈귀를 기울이면〉은 조금 다릅니다.

   그러니까 여기에는 공중전화와 삐삐와 핸드폰으로 통신수단이 차례로 바뀌던 무렵의 어떤 다이내믹한 변화의 정서가 있는 것이지요. 그 각각의 매체를 실시간으로 동행하며 몸소 다 겪어본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무엇인가가 여기에는 있는 것입니다.

   이를 가리켜 ‘핸드폰 시대에 태어난 사람은 결코 알 수 없는 정서’라고 규정한다면 지나친 편견일까요.

   결정적으로 핸드폰이 모든 것을 다 바꾸어놓기 전의 세상을 두고, 어쩌면 ‘인류역사상 인간과 인간의 관계가 마지막으로 인간적이었을 때’라고 규정한다면 지나치게 감상적인 독단일까요.

   왠지 저는 핸드폰이 인간관계를 결정적으로 비인간적인 것으로 바꾸어놓은 것이 아닐까, 하는 의구심을 지금도 온전히 떨쳐버리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핸드폰이 일상화되면서 인간과 인간 사이에서 무엇보다도 기다림이 없어졌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상상력이 사라진 세상

   기다림이 없어지니, 기다리는 데 필요한 인내심도 덩달아 사라졌습니다.

   인내심이 사라지니, 자연스럽게 그 인내심의 바탕에 놓여 있는 사려(思慮)도 없어졌고요.

   사려가 없어지니, 그 사려를 받쳐주는 상상력도 잦아들고 말았습니다.

   《생의 한가운데》의 작가 루이제 린저가 ‘사랑에는 상상력이 필요하다’라고 말했을 때의 그 ‘어진(仁)’ 상상력 말입니다.

   하여 이제는 아무도 기다리지 않습니다.

   아무도 인내하지 않습니다.

   아무도 사려 깊게 상대를 배려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아무도 상상력을 발휘하려 애쓰지도 않습니다.

   어쩌면, 단지 즉자적이고 속 좁은 의심만이 남아 있을 뿐입니다.

   따라서 저는 이 모든 덕목이 사라지고 없는 핸드폰 시대의 사랑을, 또 그 진정성을 남몰래 살짝 의심합니다.

   혹은 핸드폰 시대의 사랑을 그런 것으로, 다소 의심을 섞어서 규정합니다.


아날로그스러운 사랑

   〈귀를 기울이면〉의 사랑은 바로 이 핸드폰 시대 이전의 사랑입니다. 제가 이 애니메이션을 귀하게 여기는 것은 바로 이 점에서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기 위해서는 밤잠을 설치고 이른 새벽에 자전거를 타고 그 사람이 사는 집 앞까지 초조하고 설레는 마음으로 허위단심 달려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서로 손을 마주 잡고 멀리 동녘을 밝히는 찬란한 일출을 나란히 함께 바라보아야 하는 것이지요.

   저는 이 번거롭고 아날로그스러운 행위를 귀하게 여깁니다.

   고백을 하기 위해서 평소의 생리적 한도를 넘어서는 에너지를 소모하며 편지를 쓰거나, 직접 찾아가 서로 얼굴을 마주 보고 입을 열어 ‘발화(發話)’를 해야만 하는 그 한없이 즉물적이고 비실용적인 행위의 적극성이 지닌 ‘인간적인 너무도 인간적인’ 정서―.

   그리고 마지막 순간 중학생의 입에서 나오는 청혼의 한마디가 있습니다.

   “나와 결혼해 줄래?”

   이 한마디의 뒤에 숨어 있는 그 오랜 기다림과 조바심과 열병 같은 가슴앓이의 숨은 역사―.


청혼의 낭만

   드라마에서는 사정이 조금 다른 느낌이지만, 요즘 멜로영화들에서 청혼이라는 행위, 사건, 이벤트, 퍼포먼스가, 또는 그것의 고전적인 완결성이 거짓말처럼 사라지고 없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저는 〈귀를 기울이면〉에 담긴 청혼의 낭만적인 엔딩을 소중하게 여기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것은 결혼제도에 대하여 사람들이 취하는 태도와 견해의 시대적인 어떤 경향과는 무관한 고백입니다.

   그러니까 저는 청혼이 사라지면서 멜로영화가 매우 삭막해졌다고 생각하는, 또는 느끼는 부류에 속합니다.

   제가 리처드 커티스의 〈러브 액츄얼리〉(2003)를 아직도 귀하게 여기는 이유의 하나가 바로 이것입니다. 이 영화에는 청혼의 테마와 행위가 있기 때문이지요.

   정세랑 작가의 《지구에서 한아뿐》도, 그 장르적인 성격이야 어떻게 규정되고 있든, 마찬가지 이유에서, 그러니까 요즈음 보기 드물게 청혼의 낭만적인 정서를 포함하고 있다는 점에서 저한테는 귀한 소설입니다.


올리비아 뉴튼 존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 영화가 올리비아 뉴튼 존의 목소리로 시작한다는 것 자체의 어떤 메시지가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 노래를 듣고 나면 ‘콘크리트(!) 로드’를 정말로 사랑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이게 무슨 말이냐고요? 음, 발설하기 싫군요. 이것만은 이 애니메이션을 직접 보는 사람만의 몫으로 남겨두고 싶습니다.

   일본어 보컬과 이상한 기악합주로 이 노래를 들려주는 절묘하게 아름다운 장면을 시청각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는 점만으로도 이 애니메이션을 볼 가치는 넉넉하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하지만 너무나 안타깝게도 이 빛나는 애니메이션은 콘도 요시후미 감독의 데뷔작이자 유작입니다. 그는 이 애니메이션이 나온 뒤 만 3년을 채우지 못하고 야속하게도 서둘러 세상을 떠나고 말았으니까요.

   그렇습니다. 그는 철저히 20세기의 사람이었습니다. 아니, 20세기의 사람으로 남고 싶었나 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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