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스 반 산트, 〈말라노체〉
C01. 흑백 데뷔작의 매혹 – 구스 반 산트, 〈말라노체〉(1985)
흑백 데뷔작의 매혹
개인적인 기호(嗜好)겠지만, 저한테 흑백 데뷔작은 이상하게 매혹적입니다.
물론 흑백으로 찍은 모든 데뷔작이 매혹적이라는 명제가 성립한다고 할 수는 없겠지요. 매혹적인 흑백 데뷔작이 따로 있다고 해야 옳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흑백으로 찍은 데뷔작을 만나면 제 마음은 속절없이 본능적으로 매혹될 준비를 합니다. 어찌 보면 고약한 습성일 수도 있겠지만, 어쩔 수 없는 노릇입니다.
이 점에 대해서만큼은 짐 자무시한테 책임을 전가할 수밖에 없겠네요.
그도 그럴 것이, 오래전에 그의 〈천국보다 낯선〉(1984)을 처음 보고 매혹되었던 경험이 없었던들 이런 습성은 어쩌면 생기지 않았을지도 모르니까요.
그야말로, 〈천국보다 낯선〉 이후 이토록 매혹적인 흑백 데뷔작을 보기는 처음이라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이다호〉(1991)의 매혹이 어디에서 시작되었는지를 저는 〈말라노체〉를 보고 비로소 확인한 셈입니다.
하지만, 이 매혹의 정체가 무엇인지를 꼼꼼히 짚어보고 싶지는 않습니다. 왠지 그것을 낱낱이 따져서 밝혀놓는 과정에서 ‘매혹의 매혹스러움’이 사라져 버리고 말 것만 같은 우려가 가슴 한 귀퉁이에서 스멀스멀 피어오르기 때문입니다.
다만, 말하지 않을 수 없는 것들은 있습니다.
머물러 서성이는 젊음의 매혹
여기에는 길이 있고, 이 길 위에는 젊음이 있습니다.
이 매혹적인 흑백 데뷔작의 젊음은 공교롭게도 길 위에 ‘머무르는’ 젊음입니다. 길 위에서 어디론가 목표지점을 향해 부지런히 달려가는 젊음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것은 명백히 ‘머무르는 젊음’이라고 규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말라노체〉의 젊은이들은 계속 길 위로 진출하지만, 어디론가 속 시원히 달려가지는 못합니다. 그들은 자꾸만 길옆에 처박히거나, 길 위에 머무르며 서성입니다.
길이라는 것 자체는 좋아하지만, 그 길에서, 또는 그 길을 통하여 어디론가 가는 것은 좋아하지 않는, 또는 거부하는 젊음이라고 하면 될까요.
이 서성이는 젊음이 저는 좋습니다.
이 젊음은 패기에 넘치는 젊음이 아닙니다. 피가 뜨겁고, 혈기방장하고, 에너지가 넘쳐나고, 좌충우돌하는 젊음이 아닌 것입니다.
이 젊음은 어딘가 모르게 한없이 위태롭고, 가까스로 버텨내는 안쓰러움을 간직한 젊음입니다.
저는 젊음을 생명력의 상징처럼 규정하는 명제를 참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적어도 삶의 리얼한 현장에서 볼 수 있는 젊음은, 제 생각에, 대개는 현실의 살벌함에 파리하게 야위어 가는 안타까운 이미지에 가깝습니다.
그런 이미지를 거부하거나 은폐하거나 호도하려는 어떤 시도도 저는 인정하기 어렵습니다. 적어도 온 마음으로 받아들이기는 힘듭니다.
짐짓 강조하자면, 그런 시도는 거짓이나 인위(人爲), 아니면 위장(僞裝)이라고나 해야 할 그 무엇이 아닐까, 싶습니다.
실상을 부정하지 않는 솔직함의 매혹
〈말라노체〉에는 그런 젊음의 진짜배기 실상을 부정하지 않는 솔직함이 있습니다. 이 솔직함이 저한테는 썩 귀하게 여겨집니다.
물론 이 영화는 백 퍼센트 흑백은 아닙니다. 때때로 섬광처럼 끼어들어 있는 아름다운 컬러 화면들은 그보다 5년 전에 만들어진 마틴 스콜세지의 〈분노의 주먹〉(1980)을 떠올리게 합니다.
아무리 파리하게 야위어 가는 젊음에도 그렇게 문득문득 찾아오는 빛나는 순간은 있는 법이지요. 그런 빛나는 순간들이 힘겨운 젊음을 잠시나마 견딜 수 있을 만한 것으로 만들어 줍니다. 구스 반 산트는 바로 이 점을 잘 알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고마운 마음이 든다고 하면 지나친 감상일까요.
이제부터 저는 〈아이다호〉보다 〈말라노체〉가 더 좋다고 말하면서 살게 될 것 같습니다.
고백하건대, 제 눈에는 〈아이다호〉의 리버 피닉스와 키아누 리브스보다 〈말라노체〉의 팀 스트리터와 더그 쿠아이엣이 더 아름답게 보입니다. 달리 말하면, 더 정이 가는 커플이라고 하면 될까요.
〈말라노체〉에 견주면 〈아이다호〉는 아무래도 과잉의 느낌이 짙습니다. 흡사 쌍둥이 같은 영화지만, 저는 〈아이다호〉보다 〈말라노체〉의 젊음이 더 마음에 듭니다. 아니, 〈말라노체〉의 젊음이 조금 더 강한 힘으로 제 마음을 끌어당깁니다. 조금 더 안쓰럽고, 조금 더 사랑스럽고, 조금 더 애처로우며, 아주 많이, 꾸밈이 없습니다.
음악의 매혹
그리고 음악이 이토록 매혹적으로 쓰인 데뷔작을 저는 달리 만나본 기억이 없습니다.
이 영화에 담겨 있는 멕시코 특유의 아름다움으로 가득 찬 정서와 견줄 만한 사례는 기껏해야 리 언크리치의 애니메이션 〈코코〉(2018) 정도를 꼽을 수 있지 않을까, 싶은 정도입니다.
영화 중간에 느닷없이 끼어들어 있는 베토벤의 교향곡 제9번 〈합창〉의 4악장 한 대목과, 교향곡 제3번 〈영웅〉의 4악장 도입부는 그래서 더 보는(또는 듣는) 이의 가슴을 아주 깊은 곳까지 묵직하게 울리고 듭니다.
이 영화의 엔딩 자막이 뜨는 동안 화면에 펼쳐지는 그들의 즐거운 촬영 모습, 그 컬러 화면을 보는 동안 저는 문득 그 길 위로 떠나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습니다. ‘그 길을 통하여 어딘가로’가 아니라, 바로 ‘그 길 위로’ 말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