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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정수 Dec 08. 2024

經(경)14. ‘하우’의 바뀌지 않음이 초래하는 것_2

  - 유상지여하우 불이 / 《논어》 〈양화편〉 제3장

經(경)14. 가장 어리석은 이(하우)의 바뀌지 않음이 초래하는 것_2 / 唯上知(智)與下愚(유상지여하우) 不移(불이) - 《論語(논어)》 〈陽貨篇(양화편)〉 제3장

   唯上知(智)與下愚(유상지여하우) 不移(불이) / 오직 가장 지혜로운 이와 가장 어리석은 이만은 바뀌지 않는다.

   읽을 때마다 참 단호한 말씀, 명쾌한 문장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 문장에서 핵심어는 역시 ‘上知(상지)’ 곧 ‘가장 지혜로운 이’와 ‘下愚(하우)’ 곧 ‘가장 어리석은 이’일 것이고, 핵심 개념은 역시 ‘不移(불이)’ 곧 ‘바뀌지 않는다’일 것입니다.

   제 생각에, 공자님 말씀은 언제나 정사(政事)의 필터로 새겨 읽을 때 명확하게 다가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곧, 철학적으로, 또는 형이상학적으로 복잡하고 난해한 개념들을 끌어들여 해석할 필요 없이, ‘가장 지혜로운 이’를, 예컨대 플라톤의 ‘철인 정치’에서 ‘철인(哲人)’과 같은 존재, 곧 성군(聖君)이나 현군(賢君)에 해당한다고 보고, ‘가장 어리석은 이’를 폭군(暴君), 혼군(昏君), 암군(暗君), 암주(暗主) 따위의 존재에 해당한다고 보면, 이 문장도 그 전체 의미가 얼른 수월하게 파악할 수 있을 만큼 명료해집니다.

   이런 맥락에서 ‘바뀌지 않는다’도 좀 더 구체화하면 ‘가장 지혜로운 이’, 곧 성군의 경우는 ‘바뀌지 않아야 한다’에 가까운 의미고, ‘가장 어리석은 이’, 곧 폭군의 경우는 ‘바뀌지 못한다’에 가까운 의미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다시 말하면, 둘 다 바뀌지 않는 사태인 것은 동일한데, 성군의 경우는 바뀌면 안 되는 것이고, 폭군의 경우는 바뀌지 못하는 것입니다.

   의미는 간단합니다. 성군이 바뀌면 큰일나는 것입니다. 쉽게 생각하면 됩니다. 세종대왕이 어느 날 폭군으로 바뀐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태평성대는 하루아침에 아비규환의 지옥도가 되지 않겠습니까. 물론 다소 논란의 여지는 있지만, 중후기의 연산군 때가 그랬듯이 말입니다.

   그러니까 ‘上知(상지)’, 곧 ‘가장 지혜로운 이’는 바뀌면 안 되는 것입니다.

   한데, 이 상지는 바뀌지 않는다는 것이 공자님 말씀이요 통찰입니다. 얼마나 다행입니까. 왜냐하면, 그것이 상지의 본성(本性)이니까요.

   하지만 폭군은 바뀌어야만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큰일입니다. 왜냐하면, 아비규환의 지옥도가 계속된다는 뜻이니까요. 폭군의 측근(側近)이 아닌 다음에야 누가 그런 세상에서 무사히 살아남겠습니까.

   그래도 연산군이 바뀌어 세종대왕과 같은 성군이 된다면 세상은 하루아침에 지옥도에서 태평성대가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니까 폭군은 바뀌는 것이 당위입니다.

   문제는 하우 또한 상지가 그렇듯 바뀌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좁혀서 말한다면, 바뀌지 못하는 것이지요. 왜냐하면, 그것이 그의 본성(本性)이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바뀌는 것은 언감생심(焉敢生心)이고, 외부에서 그를 바꾸려고 해도 바꿀 수 없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공자님 말씀이요 통찰입니다.

   그렇습니다. ‘상지’가 바뀌지 않듯이, ‘하우’도 바뀌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예전에는 세습제여서 어쩔 수 없었지만, 맹자님이 이 고정관념을 깨뜨리셨지요. 바꾸어도 된다, 아니, 나아가 바꾸어야 한다고요.

   흔히 ‘역성혁명(易姓革命)’이라는 말로 널리 알려져 있는데, 역성(易姓) 또는 ‘혁세(革世)’ 또는 ‘혁대(革代)’가 바로 그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요즈음의 개념으로 단순히 ‘정권교체(政權交替)’의 ‘교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교체라면 ‘하우’에서 다른 ‘하우’로 바뀌(꾸)는 일이 될 수도 있으니까요.

   맹자의 개념은 마땅히 ‘상지’가 있어야 할 자리에 ‘하우’가 있을 때, 또는 그런 일이 벌어졌을 때 그 ‘하우’를 끌어내리고, 다른 ‘하우’가 아닌 명실상부한 ‘상지’를 그 자리에 앉히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러니까 ‘하우’를 ‘상지’로 바꾸는 일이 바른 의미의 역성(易姓)인 것입니다.

   이걸 유학(儒學)의 개념을 살짝 동원하여 표현하면, 천명(天命)에 부합하지 않거나 천명을 거스르는 인물을 천명에 부합하거나 천명을 따르는 인물로 바꾸는 것입니다. 곧, 무덕(無德)하거나 몰덕(沒德)한 인물을 유덕(有德)하거나 지덕(知德)한 인물로 바꾸는 것이고, 무식(無識)하거나 무도(無道)한 인물을 유식(有識)하거나 유도(有道)한 인물로 바꾸는 것입니다.

   이것이 당위이고 옳다는 것이 맹자의 견해입니다. 그러니까 마땅히 하우를 상지로 바꾸어야 하지, 하우를 다른 하우로 바꾸면 안 되는 것입니다. 하우를 다른 하우로 바꾸는 것이야말로 최악의 역성일 것입니다.

   현대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바로 선거가 이 역성의 과정에 해당할 것입니다. 그러자면 유권자에게 상지를 알아보는 눈이 있어야 합니다. 또는 상지와 하우를 엄밀하게 구분할 줄 아는 감식안, 또는 안목이 있어야 하겠지요.

   하지만 그런 눈이 있어도 이해관계나 사사로운 욕망 따위에 사로잡혀 상지를 외면한다면 선거가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여기서 책임이라는 문제가 생깁니다. 공자도 맹자도 책임을 묻지는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당시에는 선거제도가 없었으니까요. 그래서 맹자는 ‘역성’이라는 개념을 통하여 ‘바꿀 권리(또는 의무)’에 대해서만 언급한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엄연히 민주주의에 기반한 선거제도가 있는 시대입니다. 따라서 ‘상지’를 못 알아보거나 외면하고 ‘하우’를 뽑아버리는 일에 대해서는 책임이 발생합니다. 이 책임을 기꺼이 감수할 용의가 없는 사람은 선거에 함부로 참여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 책임은 ‘참는’ 책임만이 아니라, 당연히 ‘바꿀’ 책임이기도 합니다.

   예, 각오가 있어야 하리라는 것입니다.

   그동안의 경험칙(經驗則)에 의거하건대, ‘상지’가 바뀌지 않듯이 ‘하우’도 바뀌지 않는다는 공자님의 혜안 또는 통찰이 참 정확하지 않습니까. 그래도 참고 기다려보면 ‘하우’도 사람일진대 언젠가는 바뀌지 않을까, 또는 바꿀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자기기만(自己欺瞞)인지를 공자님의 이 말씀은, 언제나 그렇듯, 명쾌하고도 준엄하게 가르쳐 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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