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삼백 일언이폐지 왈 사무사 / 《논어》 〈위정편〉 제2장
經(경)15. 시인의 마음으로 / 詩三百(시삼백) 一言以蔽之(일언이폐지) 曰(왈) 思無邪(사무사) - 《論語(논어)》 〈爲政篇(위정편)〉 제2장
‘子曰(자왈)’로 시작하는 공자님 말씀입니다.
아마 《논어》 전체를 통틀어서도 ‘學而時習之(학이시습지) 不亦說乎(불역열호)’와 더불어 다섯 손가락 안에 들 만큼 유명한 문장일 것입니다.
끊어 읽기는 ‘시/삼백 일언이/폐지 왈 사/무사’ 정도로 하면 되겠고, 저는 다음과 같이 번역합니다.
“시 삼백, 한마디 말로써 그것을 덮어 이른다면 ‘생각에 간사함이 없음’이겠다.”
워낙 유명한 말씀이라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기 십상이지만, 막상 읽기로 들면 문의(文意)를 이해하기도, 번역하기도 수월하지는 않은 문장입니다.
우선 맨 앞의 ‘詩(시)’는, 이처럼 아무런 앞뒤 부연 설명 없이 단독으로 쓰이면, 《논어》에서는 물론이고, 다른 한문 고전 문장에서도 《詩經(시경)》을 가리킨다고 보면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여기서는 바로 뒤에 ‘三百(삼백)’이라는 말이 나오니까 더더욱 이론의 여지가 없지요.
실제로 《시경》은 그 전체가 311편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 가운데 6편은 제목만 있기 때문에 실제로 온전한 모양새를 갖추어 남아 있는 시편은 모두 305편이지요. 이걸 자투리 ‘5’를 떼어내고 뭉뚱그려 간단하게 300편이라고 이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詩三百(시삼백)’이라고 하면 곧 ‘시경의 시 305편’을 뜻한다고 보면 되는 것이지요.
이에 대해서는 중국 사람들이 2글자, 4글자처럼 짝수로 이루어진 단어나 구를 좋아하는 성향과 더불어, 군더더기나 자투리를 세세하고 번거롭게 따지지 않고 뭉뚱그려 싸잡아 표현하기를 좋아하는 성향 때문이라는 설명이 있기는 합니다. 우리도 대개 그렇지요?
저도 되도록이면 군더더기를 붙이고 싶지 않아서, 흔히는 ‘시경 삼백 편’이라고 번역하는 것을 그냥 ‘시 삼백’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시경’이라는 명칭의 역사적인 연원을 살펴보면, 공자님 당시인 춘추시대에는 ‘시경’이라는 말 자체가 없어서 그냥 ‘시’라고 했고, 전국시대 말기에 가서야 ‘시경’이라는 말이 비로소 생겨났으며, 이 ‘시경’이 공식적인 명칭으로 확실하게 자리를 잡은 것은 송나라 때에 이르러서였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니까 ‘시삼백’을 굳이 ‘시경 삼백 편’이라고 하지 않고 그냥 ‘시 삼백’이라고 하는 것도 전혀 맥락 없는 번역은 아니라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이 공자님 말씀, 이 문장에서 문제가 되는 부분은 역시 ‘一言以蔽之(일언이폐지)’와 ‘思無邪(사무사)’입니다.
먼저, ‘一言以蔽之(일언이폐지)’ 곧 ‘한마디 말로써 덮으면’이라는 말은 ‘시삼백’, 그러니까 ‘《시경》에 실려 있는 시 305편의 성격을 한마디로 표현하면(정의하면, 가름하면)’이라는 뜻일 것입니다.
다음으로, ‘思無邪(사무사)’ 곧 ‘생각에 간사함이 없음’은 ‘그 시에 담긴 시인의 마음이 순수함’이라는 뜻일 것이고요. 여기서 ‘간사함’은 ‘사특함’으로도 많이 번역하는데, 저는 ‘불순함’이나 그냥 ‘삿됨’이라고 하는 것도 괜찮은 번역이라는 생각입니다.
저는 이 말씀, 이 문장을 읽을 때마다, 또는 떠올릴 때마다 공자님이 시를 이토록이나 중요하게 여기셨다는 사실이 참 귀합니다.
역사 속의 유명한 정치가는 물론이고, 사상가나 철학자 들 가운데서도 시를 이렇게 노골적으로 사랑한, 또는 시에 대한 사랑을 이토록 여봐란듯이 표명한 사람이 누가 또 있었는지, 얼른 떠오르지 않습니다.
바로 이런 깊은 애정이야말로 공자님이 ‘생각에 간사함이 없는 것’이라는, 시에 대한 이렇게나 짧고도 아름다운 정의를 내리신 진정한 비결이 아닐까 싶습니다.
물론 시인이 늘 ‘간사함이 없는’ 생각만 하고 사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시인도 어디까지나 사람(人)일진대, 간사하고 사특하고 불순하고 삿된 생각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지 않을까요.
그래서 때로는 누군가를 미워하기도 하고, 어떤 일로 분노에 사로잡히기도 하고, 걷잡을 수 없이 불순하거나 불경스러운 생각에 빠지는 경우도 필경은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적어도 시인이 시를 쓰고 읊조리는 순간에는 그 생각에 간사함이 없지 않을까요.
예, 이것만은 믿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다름 아닌 공자님이 시를 일러 ‘사무사’, 곧 생각에 간사함이 없다고 보증해 주셨으니까요.
실제로 ‘시’라는 말을 떠올리기만 해도 어느덧 생각에서 간사함이 사라지기 시작하는 느낌이 든다고 고백한다면 지나친 과장일까요.
이렇게 간사함이 사라진 ‘맑은’ 생각에서부터 시는 절로 흘러나오기 시작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니까 시인이 시인인 까닭은 이렇게 생각에서 간사함을 몰아내는 능력이 누구보다도 탁월하기 때문이라고 할 수도 있지 않겠나 싶은 것입니다.
하지만, 어쨌거나 시인도 사람인 이상은 생각에 간사함이 전혀 없을 수는 없듯이, 시인이 아닌 사람도 늘 간사한 생각만 하고 살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들 또한 사람이기에 생각에 간사함이 없는 순간이 아주 드물게라도, 더러더러 있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그 간사함이 사라지는 순간에는 그도, 최소한 그 마음의 상태에서는, 잠시나마 시인이라고, 시인이 되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실제로 공자님이 편찬하신 《시경》에 실린 시들은 전문 시인들의 작품이 아니며, 공자님 당시 여항(閭巷)에 떠돌던 노래들 아닙니까.
따라서 전문 시인이 아닌 사람들의 생각에서 간사함이 사라지는 순간 그들 스스로가 저도 모르게 시인이 되고, 그래서 그런 시인의 마음으로부터 절로 흘러나온 노래들이 바로 ‘시삼백’이 아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하여 우리가 시를 읽을 때 우리 마음에서 거짓말처럼 간사함이 깨끗하게 사라지는 경험을 하게 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 아닐까요. 이 경험이 저는 참 귀하고 소중합니다. 제가 시를 사랑하는 이유입니다.
공자님은 《시경》에 담을 시들을 고르실 때 인간의 감정이나 정서의 순수성이 확보되지 않은 시들, 곧 윤리나 도덕의 차원에서 문제가 있는 시들, 나아가 인간의 본성에 위배되는 거짓된 시들, 그리고 자기의 진실한 감정에 충실하지 않은 시들은 배제하셨습니다.
한마디로, 《시경》에 수록된 305편의 시들은 생각에 간사함이 없는, 사특함이 없는, 불순함이 없는, 삿됨이 없는, 곧 문자 그대로 ‘무사(無邪)한’ 시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꼭 전문 시인이 아니더라도 사람이 시를 쓸 때의 마음은 가장 순수한 상태가 되기 마련 아니겠습니까. 그렇게 되지 않는다면 시는 숫제 써지지가 않을 것입니다.
어쨌거나 결국은 우리 마음의 가장 순정한 부분이 시로 표출되는 것일 터이기 때문입니다.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는 마음, 바로 이것이 시인의 마음 아닐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