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짐 자무시, 〈브로큰 플라워〉
C09. 삶이란 하나의 과정이라는 통찰 – 짐 자무시, 〈브로큰 플라워〉(2005)
이야기, 그 시작과 끝
소설이 이야기이듯 영화도 이야기입니다.
모든 이야기에는 시작이 있고, 끝이 있습니다.
어느 지점에선가 이야기를 시작했다면, 또 어느 지점에선가는 끝을 맺어야 합니다.
독자가 한 편의 소설을 무한정 읽고 앉았을 수 없듯이, 관객 또한 한 편의 영화를 한도 끝도 없이 보고 앉았을 수는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지극히 물리적인 진실이며, 동시에 이것이야말로 거부할 길 없는 인간 육체의 조건입니다.
그렇다면 이야기를 어느 지점에서 끝맺어 주는 것은 차라리 독자나 관객에 대한 예의요 배려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요.
진짜 이야기가 시작되는 지점
하지만 그렇다고 반드시 한정된 시간 안에 이야기가 완결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우리네 인생이 완전하지 않은 것에 비추어볼 때 너무나 염치없고 가혹한 일입니다.
사람은 한 치 앞의 일도 내다보지 못하는 존재 아닙니까.
인생은 흔히 어느 날 느닷없이, 또는 속절없이 끝납니다.
항변해 보아야 소용없습니다.
이것은 우리네 생명이 어느 날 느닷없이, 또는 속절없이 시작된 것에 정확히 대응합니다. 공평하지요.
그러니 현실의 반영인 한 편의 영화도 하등 완전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이런 생각에 공감하지 못하는 한 〈브로큰 플라워〉와 같은 영화를 이해하기란, 아니, 받아들이기란 매우 곤란한 일이 될 것입니다.
심지어 이 영화는 이야기를 완결 짓지 않을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러닝 타임을 몽땅 소진한 다음에야 비로소 진짜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한 편의 영화를 두 번 이상 보는 일이 헛된 시간 낭비요 재화의 허비가 아니라, 꼭 필요하고 유의미한 일이 되는 것은 바로 이런 영화를 만났을 때입니다.
느닷없는 운명의 전개
이야기는 아주 자명하게 시작합니다.
미심쩍거나 난해한 요소는 하나도 없지요.
이제 더는 주름을 숨길 수 없는 얼굴에 머리도 벌써 거지반 희끗희끗해진 한 초로의 사내(빌 머레이)가 하루아침에 느닷없이 동거녀한테서 결별을 당합니다.
뭐, 사정이야 딱하지만, 남녀 간에 흔히 있을 법한 일이지요.
하지만 그의 운명은 생각보다 모질게 전개됩니다.
이제는 세상 잡사에 쓸데없이 시달리지 않으면서 편안한 노후를 고요히 누려야 할 시기 아니겠습니까.
그러한 때에 졸지에 ‘차인’ 것만 해도 마른하늘에 날벼락 같은 일인 터인데―하긴 홀로 된 남자의 노년만큼 처량한 것이 또 있을까요―엎친 데 덮친 격으로 난데없이 발신인도 적혀 있지 않은 이상한 편지까지 도착하여 순식간에 그를 낭패스러운 구렁텅이로 몰아넣습니다.
편지, 이야기의 출발
이 편지가 문제입니다.
이 편지가 도착함으로써 이 영화의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출발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이 편지가 비로소 이야기를 출발시키는 셈입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이 편지가 이 영화의 주인공인 문제의 사내를 움직입니다.
그렇습니다. 여행입니다.
그것도 무려 열아홉 해 전에 어떤 여자가 낳았다는 자기 아들을 찾아 나서는 여행이지요.
또는, 자기 아들을 낳은 여자를 찾아 나서는 여행입니다.
사내로서는 분명히 그렇습니다. 이걸 의심할 수는 없습니다.
편지는 분명히 누군가가, 그러니까 어떤 여자가 지금으로부터 열아홉 해 전에 이 사내와 관계하여 임신하였고, 그렇게 생긴 아이를 낙태시키지 않았고, 그 아이의 아버지인 이 사내 모르게 그 아이를 낳았으며, 낳고 보니 그 아이는 아들이었으며, 이제 열아홉 살이 된 그 아들이 어느 날 느닷없이 자기 아버지인 이 사내를 찾아 길을 떠났다는 사실들을 알려주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기까지입니다. 더할 것도 뺄 것도 없지요.
나서지 않아도 되는 여행
하지만 이 사내는 그 아들에 대해서는 물론이고, 그 아들을 낳은 여자에 대해서도 전혀 아는 바가 없습니다. 아니면, 떠오르는 기억이 없습니다. 그야말로 깜깜합니다.
그러니 이 사내의 여행이 그 아들이나 그 아들을 낳은 여자가 누구인지 궁금하여 찾아 나서는 과정이 될 것임은 너무도 자명합니다.
한데, 놀랍게도 이 자명성에 현혹당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은 영화를 다 보고 난 뒤에야 비로소 떠오릅니다. 이것이 이 영화가 겨냥하고 있는 과녁입니다.
그래도 이 여행은 성급합니다. 또는, 불필요합니다.
편지가 정확히 이 사내의 집에 도착한 것으로 미루어 아들은 조만간 이 집으로 자기 아버지인 이 사내를 찾아올 것이 거의 확실하기 때문입니다.
가만히 기다리고 있으면 머지않아 궁금증은 저절로 풀릴 것입니다.
한데도 사내는 기어이 길을 나서고야 맙니다.
물론 더 정확히 말하면 절친한 이웃 남자의 부추김에 떠밀린 탓이지만, 어쨌거나 사내는 여행길에 오릅니다.
요컨대, 이 여행은 하지 않아도 되는 여행입니다.
그래도 떠나야만 하는 여행
그래도 사내는 여행을 떠나야만 합니다. 그래야 영화의 이야기가 성립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이 여행은 영화의 이야기를 만들기 위한 ‘억지’ 여행인 셈입니다.
만일 사내가 여행을 떠나지 않고 집에 지질러 앉아서 아들이 찾아오기를 하염없이 기다리기로 작정한다면요?
맞습니다. 이야기는 그대로 공중분해 되어버릴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여행은 영화 자체를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설정입니다. 그래서 유의미하지요.
더 엄밀히 말하면, 그 아들과 그 아들을 낳은 여자에 대한 궁금증은 사내의 것이라기보다는 관객의 것입니다.
사내가 그냥 무작정 앉아서 기다리기로 한다면 관객은 좀이 쑤셔 견딜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무엇보다도 사내는 관객을 위하여 여행을 떠나야만 합니다.
이야기를 밀고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러닝 타임의 나머지 부분을 채우는 에피소드들은 이제 더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 영화의 성격을 미스터리로 규정한다면, 영화의 맨 마지막 대목에 가서야 밝혀질 사내의 아들과 그 아들을 낳은 여자의 정체만이 궁금할 따름이기 때문입니다.
나머지는 거기에 이르는 과정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의 내면 헤아리기
문제는, 관객이 최후의 순간 만천하에 드러날 사실에 대한 기대감으로 무한한 인내심을 발휘하여 그 과정을 견뎌내고 막상 마지막 대목에 이르러서 보니, 흡사 거짓말처럼 아무것도 밝혀지지 않더라는 데에 있습니다.
이것이 이 영화의 가장 놀라운 점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처음부터 이 영화를 잘못 읽은 것입니다. 이 자각이 중요합니다.
그렇다면 독법을 바꾸어 다시 읽어야 합니다.
그 아들의 정체를 밝히는 것은 이 영화의 목적이 아니니까요.
그 아들이 어떤 인물인지, 그 아들을 낳은 여자가 누구인지는 중요한 사항이 아닌 것입니다.
그렇다면요?
여기서 우리는 추리 소설의 기본 원리 하나를 빌려와 거기에 기대어야 합니다.
바로 가장 의심스럽지 않은 것을 의심해 보는 일입니다.
그러니까 이 영화에서 진짜 중요한 것은 결과가 아니라, 거기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인 것입니다.
여행의 결과에 모든 기대를 집중하느라 간과할 수밖에 없었던 여행의 과정―.
이 영화가 관객에게 요구하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이 영화에서 어느 날 갑자기 동거녀가 떠나버리고 생각지도 않았던 아들의 소식을 듣게 된 이 초로의 사내의 내면 풍경을 세심하게 헤아려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관객에게 유일하게 필요한 것이 바로 그 헤아림의 자상한 마음입니다.
삶에 시작과 결말이 있다는 것은 오해입니다.
그것은 탄생과 죽음의 다른 이름일 뿐이지요.
삶에는 오로지 과정만이 있을 뿐입니다. 삶 자체가 온통 과정입니다.
이 영화는 바로 이 통찰을 우리에게 가만히 종용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