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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정수 Dec 19. 2024

C10. 지뢰는 밥, 탱크는 집

  - 바흐만 고바디, 〈거북이도 난다〉

C10. 지뢰는 밥, 탱크는 집 – 바흐만 고바디, 〈거북이도 난다〉(2004)

순수한 악

   전쟁을 가리켜 ‘순수한 악’이라고 하면 지나친 정의(定義)일까요?

   ‘순수한’이라는 꾸밈말과 ‘악’이라는 명사의 이 불균질한 조합이 야기하는 길항(拮抗)―.

   너무나 순수해서 그 악의 악스러움이 자칫 느껴지지 않는 수가 있을 정도로 순수한 악―.

   악 이외의 모든 ‘잡티’가 말끔히 제거되고 없는 악―.

   그래서 어느 순간 문득 악이 아닌 것처럼 느껴지는 악―.

   그 단계로 접어들면 ‘누군가’는 과감히, 아니, 감히 전쟁을 일으킵니다.


또렷한 선과 악

   한때 전쟁영화를 좋아하던 시절이 있었지요.

   당연하게도 그 대부분은, 서부극의 영웅 존 웨인이 나왔던 〈지상 최대의 작전〉(1962, 켄 아나킨·앤드류 마튼·대릴 F. 재넉·베른하르트 비키·게르트 오스왈드)류의, 제2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한 다소, 더러는 매우 ‘낭만적인’ 할리우드 영화들이었습니다.

   따져 보면 두 가지 특징 때문이었던 것 같습니다.

   하나는 선악이 분명하게 구분된다는 점이었고, 또 하나는 보는 이의 눈을 휘둥그렇게 만드는 스펙터클로서 볼거리가 풍성하다는 점이었지요.

   그리고 저 개인적으로는 여기에 전투기, 탱크, 장갑차, 대포, 기관포, 소총류 같은 무기와 장비들의 기계공학적인 매력도 추가할 수 있겠네요.

   미군을 주축으로 한 연합군은 명실상부한 선이요 정의의 편이었고, 독일군은 이론의 여지가 없는 악이요 불의의 편이었습니다.

   승리는 언제나 미군의 몫이어야 했고, 독일군이 패하는 것은 아주 마땅한 사태였습니다.

   고민할 이유도, 의심할 필요도 없었지요.


스펙터클의 매혹

   따라서 그처럼 선이 악을 이기는 이야기의 스펙터클은 화려하고 거창할수록 신나는 것이었습니다.

   고백하건대, 그 시절 저는 전쟁 스펙터클을 즐겼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전쟁 스펙터클 자체를 즐기는 데 그 어떤 정서적인 불편함이나 문제의식도 느끼지 못했던 것이지요.

   한마디로, 스펙터클에 매혹된 것이었습니다.

   전장(戰場)은 비극이 아닌 활극의 무대였고, 따라서 전쟁은 하나의 모험이었습니다. 거기에는 선과 악의 대결, 엄밀히 말하면 스포츠 성격의 힘겨룸만이 있었습니다.

   게다가 그것은 악에 대한 선의 응징을 목표로 한 것이었습니다. 그것으로 충분했지요.

   전쟁이라는 스펙터클에 그렇듯 매혹된 영혼이, 아니, 전쟁을 스펙터클로만 받아들이게 된 영혼이 ‘정의로운 전쟁보다는 차라리 불의한 평화가 낫다’라는 명제의 의미를 옳게 이해하기까지 꽤 많은 시간을 허비해야만 했던 것은 그야말로 속절없는 노릇이었습니다.


시각의 교정

   영화에만 국한하자면, 전쟁을 바라보는 시각을 달리하게 된 첫 계기는 물론 〈디어 헌터〉(1978, 마이클 치미노)나 〈지옥의 묵시록〉(1979,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 또는 〈플래툰〉(1986, 올리버 스톤) 같은 일련의 베트남전 영화들이었습니다.

   이를 통해 저는 세 가지를 배웠습니다.

   첫째, 전쟁은 2차 대전만이 아니라는 것이었지요. 전쟁은 얼마든지 있었습니다. 한국전쟁을 포함하여 세계 도처에 전쟁이 있었던 것입니다. 2차 대전은 그 무수한 전쟁들 가운데 하나에 지나지 않았고요. 어처구니없을 만큼 자명함에도, 제가 이 사실을 깨닫는 데는 적지 않은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둘째, 전쟁에는 선과 악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었지요. 더 정확히는, 전쟁의 쌍방, 또는 당사자들은 선악의 개념으로 파악할 수 없다는 점이었습니다. 있다면, 단지 입장의 차이만이 있을 뿐이었습니다.

   아무리 양보해도, 전쟁을 촉발한 직접적인 동기야 무엇이 되었건, 그것은 결국 이해관계의 충돌이었습니다. 그렇게 벌어진 전쟁에서 선악의 소재를 가린다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었습니다. 자기 이익을 위해 싸우는데, 누가 선이고 누가 악이란 말입니까.

   셋째, 전쟁에는 승자와 패자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었지요. 물론 전쟁이란 싸움이니, 그 결과 당사자들은 이긴 쪽과 진 쪽으로 나뉘게 마련입니다. 설사 전쟁의 끝을 보지 못하고 휴전한 경우라도 그 이후의 상태를 엄밀히 검토하면 결국 그 전쟁을 통해 어느 쪽이 더 덕을 보았고, 어느 쪽이 더 손해를 보았는지를 가려내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 것입니다.

   문제는, 전쟁에는 언제나 승패의 개념이나 결과와는 무관한 ‘피해자’가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이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더욱이 피해자는 패자 쪽만이 아니라, 승자 쪽에도 존재하는 것이었습니다. 전쟁이 ‘순수한’ 악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저 낭만적인 할리우드 스펙터클 전쟁영화들은 피해자를 보여 주지 않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저는 스펙터클에 매혹된 것이 아니라, 현혹된 것이었습니다.

   스펙터클에 현혹된 영혼의 눈에는 피해자가 보이지 않습니다.

   피해자를 보지 못한다는 것은 진실을 보지 못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진실의 실체는 피해자의 눈으로 볼 때 비로소 드러납니다.

   전쟁을 구경거리로 만드는 순간, 그 구경거리에 현혹되는 순간, 전쟁의 참상은 자취를 감추고 맙니다. 그리고 전쟁은 오락이 되는 것이지요. 피해자 따위에 신경을 쓰면서 오락을 즐길 수는 없는 법이지 않겠습니까.

   따라서 전쟁을 정직하게 묘사한다는 것은 그 ‘피해’의 실상을 외면하지 않는다는 뜻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전쟁영화는 반전영화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반전영화가 아닌 전쟁영화는, 미안하지만, 사기일 것입니다.


피해자, 어린이, 잃어버리는 것

   그렇다면 전쟁의 가장 큰 피해자는 누구일까요.

   고약하게도 피해자의 자리는, 여전히 또(!), 사회적 약자, 신체적 약자의 몫으로 남습니다.

   그러므로 어린이가 가장 큰 피해를 보는 자리에 놓이는 것은 어쩌면 운명적입니다.

   그 가운데서도 여자 어린이는 강간의 위협에 무방비로 노출된다는 점에서 두 겹의 피해자입니다.

   〈거북이도 난다〉는 바로 이 전쟁의 피해자인 어린이들에게 ‘순수하게’ 집중하는 영화입니다.

   그 어린이들이 전쟁에서 입은 피해의 내용은 우선 ‘잃어버린 것’으로 드러납니다.

   그들은 부모를 잃었고, 형제자매를 잃었습니다. 가족을 잃은 것이지요.

   무엇보다도 그들은 신체를 잃었습니다.

   팔을 잃었고, 다리를 잃었고, 눈을 잃었고, 나아가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 대부분은 지뢰로 인한 것입니다.

   전쟁은 악하지만, 무기는 더 악합니다. 왜냐하면, 무기는 아무도 차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 지뢰를 어느 편에서 설치했느냐의 여부는 그것이 설치된 순간 철저하게 무의미해집니다. 정말 무도합니다.


무너진 세상

   이 영화는 그 전쟁의 참상 속에서 어린이들이 어떻게 살아가는가를 묘사합니다.

   어린이들은 무기들 속에서 살아갑니다. 아니, 차라리 죽어간다고 말해야 옳은지도 모르겠습니다.

   주변에 널린 것이 무기들이니, 그것들과 친해지지 않을 도리가 없습니다.

   그들은 무기 속에서 놀고, 무기를 수거하여 내다 팝니다. 그렇게 번 돈으로 먹을 것을 사지요.

   그들에게 지뢰는 밥이고, 탱크는 집입니다. 무기가 생계 수단인 것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그들은 바로 그 무기 때문에 죽어갑니다.

   그들이 어린이 특유의 생기발랄함으로 웃고 떠들고 뛰어다닌다고 그것을 희망의 표징으로 새기는 것은 몰염치한 일일 것입니다.

   어린 소녀가 강간당해 낳은 아이를 버리고 자살을 선택할 때 이미 세상은 무너진 것입니다.

   이 대목에 이르면, 이 영화가 이란과 이라크와 터키 국경을 떠도는 쿠르드족 이야기이고, 감독도 쿠르드족 출신이며, 출연자들 대부분이 실제로 전쟁 피해자들이라는 따위 사실들은 하나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전쟁이라는 순수한 악, 그 순수하게 덩어리진 악 앞에서 우리는 그저 치 떨리는 분노와 참담함으로 망연할 따름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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