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만의 영화 잡설(雜說)_186
CA926. 폴 그린그래스, 〈본 슈프리머시〉(2004)
꼭 그렇게 프란카 포텐테를 일찌감치 처리(!)해야만 했을까. 이런 장르의 영화가 얼마나 억지로, 또는 고의로 삭제하는 ‘일상(日常)’이 많은지를 다시 한번 확인한다. 이 경우 영화에 불필요하다는 것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그러니까 그녀의 죽음은 운명이 아니다. 영화 또는 서사구조의 메커니즘에 희생당했을 뿐이다. 따라서 이 영화 또한 명백히 판타지다.
CA927. 폴 그린그래스, 〈본 얼티메이텀〉(2007)
‘얼티메이텀(ultimatum)’이라는 어휘의 본디 뜻이 이것으로 온전히 구현되었다고 믿을 관객이 과연 있을까. 영화를 만드는 쪽에서도, 아니 영화를 만드는 쪽에서야말로 더더욱 믿지 않을 것이다. 제이슨 본은 결코 행복해질 수 없다. 이게 결론이다.
CA928. 폴 그린그래스, 〈제이슨 본〉(2016)
후일담은 출발부터 한계를 안고 있다. 프리퀄의 한계와는 다르다. 후일담으로 망하기보다는 차라리 프리퀄로 시리즈의 이야기 구조를 보완하는 편이 역시 조금은 낫지 않을까. 물론 물리적으로는 후일담 쪽으로(만) 나아가는 게 맞을 테지만.
CA929. 박희곤, 〈타겟〉(2023)
타겟(깃)을 선택하는 쪽과 타겟(깃)이 된 쪽은 처음부터 불평등한 관계다. 불평등하기 때문에 타겟(깃)이 그토록 생고생을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관객의 마음이 불편한 것은 타겟(깃)의 고생에 대해서가 아니라, 그 관계의 불평등 또는 불공정에 대해서다.
CA930. 한덕전, 〈이프〉(2000)
세상의 모든 여자는 임신하는 순간 ‘커리어우먼’의 모든 자의식을 벗어던진다? 그렇다면 이 영화의 사상은 지나치게 불온한 것이 아닐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