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그랬듯 사랑 이야기에는 가슴 벅찬 사랑을 느끼며 행복감에 젖었다가, 그 행복을 무너뜨릴 잔인한 진실이 슬그머니고갤 내밀기마련이다.영화의 정체성은 수사, 스릴러, 로맨스?이대로 그저 그런 멜로로끌고 갈수 없다. 달콤한 맛과 향에 취해 있던 해준이마침내합리적 의심을 하기 시작한다.자신의 판단과 사랑을 확인시켜 줄, 좀 더 확실한 증거가 필요했다.
매주 이포에 있는 집에서 정안과 함께 주말을 보내는 해준은 그날도 아내와의 방어전(?)을 치르고, 곤히 잠든 정안 옆에서 잠을 뒤척이며 생각에 잠긴다. 이런저런 생각, 특히 서래 생각. 점점 또렷해져 오는 정신으로 계속 누워 있을 수 없어 잠옷 바람에 긴 패딩 점퍼를 걸치고 집 마당으로 나왔다. 세차 용품을 챙겨 나와 타고 온 차를 닦기 시작한다. 박박 문질러가며 열심히 닦다 보니 어느새 어스름한 새벽 여명이 서서히 밝아온다. 아직 세상이 잠들어 있는 새벽,마당에 나와 힘을 빼고 있는 남편을 자다 깬 정안이 2층 창문으로 어이없이내려다본다. 창을 열고하품을 크게 하며 말한다. 어이, 내차도 부탁! 더 어이없어하는 해준.
그때 해준의 휴대전화가 띠링, 울린다. 서래의 메시지.
화요일 담당 할머니가 위독해 병원으로 이송한 상태이고, 일요일까지 병원에서 할머니의 상태를 지켜보느라 월요일 담당 이해동 할머니 집에 가질 못할 것 같다 한다. 그 메시지에 해준은 '제가 할머니 집에 가볼게요.'라고 흔쾌히 자청하는데......
이해동 할머니를 찾아간 해준은 할머니를 주물러 드리며 말동무를 해드린다. 할머니가 남자 손이 어찌 이리 부드럽냐며 칭찬하자 해준이 서래 손이 좀 거칠죠,라고 대답한다. 그러자 할머니가 말하길 원래 보드라웠는데 요즘 들어 거칠어진 것 같다 한다. 그리고 할머니가 같은 말을 또 하다가 휴대전화에 저장된 노래'안개'를 계속 반복해서 듣는 모습을 보고, 해준이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어 할머니의 휴대전화를 살핀다. 전화기 모델이 서래의 것과 같은 모델이었다. 할머니가 서래가 가입해 준 거라 말하는 사이 해준이 전화기 바탕화면을 살펴보는데, 활성화되어 있는 '계단 오르기 앱'을 있어 열어본다. 유독 한 날짜만 138층 높이로 기록되어 있다. 그 날짜는 기도수가 구소산 기름봉에서 떨어져 죽은 사망 당일이었다. 만약 휴대전화를 소지하고 꽤 높은 구소산 꼭대기에 올랐다면 138층 높이와 비슷하지 않을까. 해준은 할머니에게 오늘이 무슨 요일이냐고 질문한다. 제대로 대답하지 못하고 헷갈려하는 할머니를 보며 해준은 순간 뭔가 깨닫는다. 여태껏 믿어왔던 서래의 알리바이를 의심하기 시작하는 해준은 직접 확인해 보기로 결심한다.
지금부터 해준이 가정하고 확인해 보는 사건 전말의 과정이다.
기도수가 죽던 날 월요일 아침, 이해동 할머니가 사는 아파트로 서래가 들어가는 모습이 입구 CCTV에 찍힌다. 휴대전화를 바꿔치기하고 감시카메라를 피해 뒷문으로 빠져나온 서래는 할머니의 휴대전화를 들고 등산복 차림으로 구소산으로 가는 버스를 탄다. 구소산에 도착할 때쯤 파견 사무실에서 걸려온 출근 확인 전화를 받고 할머니 집에 와 있다는 알리바이를 만든다. 서래 남편 기도수는 이미 구소산 꼭대기를 향해 전문가 등반 코스로 올라가고 있었고 서래 또한 비교적 쉬운(?) 초보자 코스로 구소산을 오른다. 바위로 이루어져 미끄럽고 가파른 암벽을 가까스로 오른 서래는 꼭대기 근처 사각지대에 몸을 숨기고 기도수가 정상까지 올라올 때까지 기다린다. 기도수가 정상에 도착해 위스키를 마시면서 '말러 오번 5악장'을 듣고 숨을 돌리고 있는 동안 서래가 뒤로 몰래 다가가 기도수를 아래로 밀어 떨어뜨린다. 마침내 기도수는 사망한다.
해준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겨우 꼭대기에 도착해 정상 바위에 드러누워 '계단 오르기 앱'을 열어 확인한다. 해준의 예측대로 '138층'이었다. 서래의 범행에 대한 가정이 확신으로 바뀐다.
헤어질 결심 각본 중 일부
해준은 수사에 임할 때는 똑바로 제대로 보려고, 피곤한 눈에 인공눈물을 넣던 남자였다. 그런 해준이 사랑에 미쳐서 수사를 망쳤으니 붕괴될 수밖에. 자부심이 있어서 품위 있던 형사 해준은 진실을 알았지만 자부심을 버리고 진실을 덮기로 한다. 서래에게 범행에 쓰인 할머니의 휴대전화기를 건네며 아무도 찾지 못하게 바다에 버리라 한다. 붕괴되어 무너진 남자는 배신감에 부르르 떨면서도 결국 마지막까지 사랑을 버리진 못했다.
형사로서 자부심을 잃어버린 채 붕괴되어 도망친 곳은 아내가 살고 있는 이포. 아침마다 자욱한 안개가 뿌옇게 끼여있는 바닷가, 우뚝 솟아 있는 원자력 발전소가 있는 고장에서 살인사건이라곤 눈 씻고 찾아볼 수 없는 무료한 나날을 견디며 사는 해준. 침실 구석마다 거무스름한 곰팡이를 보며 잠 못 이루는 밤이 쌓이고 하루하루가 다르게 시들해지는 해준. 아내 정안은 남편과 함께 있어 자신은 행복하고 좋은데 해준은 왜 자꾸 시들해지냐며 걱정한다. 석류를 같이 까면서 석류주를 담그던 해준이 정안에게 자신도 행복하고 좋다며 거짓말을 한다. 살인과 폭력이 난무하는 곳에 있어야 생기가 돌고 삶의 활력을 찾는 남편을 정안은 이미 잘 알고 있기에 거짓말이라는 사실도 알고 있다.
꼭 지켜야 할 약속처럼 의무적으로 하는 성관계라도 하면서 남편을 붙잡아 두고 싶은 걸까. 뜨겁고 절절한 사랑은 아니더라도 살아온 세월이 있으니 정으로, 믿음으로 이어온 부부 관계. 한 공간에 함께 산다고 그 사람에 대해 다 알지는 못한다. 누구에게나 꺼내고 싶지 않은 비밀 하나쯤 있는 법이니까. 해준에게는 서래가 그런 비밀이다. 매혹적이면서 위험하고, 위험한 줄 알지만 버리지 못하는 비밀.
임호신. 서래의 두 번째 남편이다. 죽은 남편 기도수처럼 서래에게 폭력적이지는 않지만 양복 입은 양아치이다. 나르시시스트. 자칭 투자 전문 애널리스트라고 명함을 파서 다니며 전국적으로 투자 사기를 치는 소시오 패스. 영화 상에서 서래와 임호신이 어떻게 만난 것인지 나오지는 않지만 각본집에서는 좀 더 자세히 해당 내용이 나온다. 서래가 병원에 호송하고 돌보았던 화요일 할머니가 결국 사망한다. 사망한 할머니의 장례식장에서 친딸처럼 빈소를 지키며 우는 모습을 어떤 남자가 유심히 살핀다. 그 남자는 할머니의 아들이었는데 바로 임호신이었다. 서래가 참 팔자가 기구한 여자인 걸까. 꼭 만나도 이런 남자만 꼬인다. 자기애와 소유욕이 투철한 쓰레기 같은 남자. 죽은 홍산오가 죽기 전에 하는 말이 있었다. 왜 여자들은 그런 쓰레기 같은 남자들과 자는 거예요? 나도 쓰레기지만. 쓰레기 같은 남자가 남들을 쓰레기라고 하니 아이러니하다.
임호신에게 폰지 사기를 당해 임호신과 서래를 쫓는 사철성이라는 남자가 서래를 찾아와 무자비한 폭력을 가한다. 손바닥으로 철썩, 철썩 잘 때린다고 별명이 찰떡같은 철썩이. 그는 자기 엄마가 임호신과 서래 때문에 병원에서 죽어가는 거 절대 용서 못한다며 반드시 임호신을 죽이겠다, 서래에게 경고한다. 철썩이가 다녀간 뒤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걸려 오는데 임호신이다. 철썩이가 우리 은신처를 알아냈으니 피신하란다. 서래가 철썩이가 이미 와서 한바탕 하고 갔다는 의미로 자신의 줘 터진 얼굴을 찍어 보낸다. 임호신이 미안하다며 그래도 우리 사이 변함없지? 사랑해,라고 입에 발린 소리를 하더니 중국인들 돈 뜯어낼 궁리를 하자며 서래를 꼬드긴다. 사랑한다는 말만 하지, 서래를 그냥 이용해서 또 한탕하려는 심산이었다. 서래도 같이 망가진 걸까. 아니면 원래 나쁜 여자였을까. 이포로 이사 가자고 임호신에게 제안한다. 마음속으로는 다른 꿍꿍이가 있는 서래.
이포로 오자마자 해준 주변을 배회하는 서래. 지은 죄가 있어서 떳떳하게 나타나지는 못하고 괜히 그의 주변만 맴도는 그녀. 스토킹에 가깝다. 운동화 대신 구두를 신은 해준을 몰래 내려다보며 스마트워치에 목소리를 녹음하는 서래. 서래의 실루엣을 본 듯한 느낌에 눈살을 찌푸리며 올려다보는 해준. 서래를 그리워하는 건 해준도 마찬가지. 그렇다면 스토킹이 아닌 건가.
해준과 정안이 이포 수산물시장에서 생선을 둘러보며 장을 보다가 우연히(?) 서래와 임호신을 만나게 된다. 조용하고 좁은 이포 바닥에서 안 마주치는 게 이상한 것인지 절묘한 때에 딱 마주친다. 어색한 분위기를 깨면서 여기 왜 왔냐고, 대뜸 질문하는 해준이 이상한 정안, 그리고 임호신. 서래가 안개를 좋아해서 이사 왔다고 대답하며 일부러 밝은 척 임호신에게 전 남편 사건 담당 형사였다 소개한다. 임호신이 능글하게 아, 그 서래를 용의자로 의심하셨다는 형사 분? 제가 그다음 남편입니다,라고 자신을 밝힌다. 그리고 뭔가 찜찜한 눈빛의 임호신, 손가락을 우두득 꺾는다. 무의식에 하는 습관인 것 같다. 해준도 정안에게 서래를 사건으로 만난 피해자 부인이라고 소개한다. 정안이 이상하다는 눈빛으로 서래를 살피다가 손을 내밀며 말한다. 이포는 안개 때문에 떠나는 곳이지, 안개 때문에 오는 곳이 아닌데. 남자는 남자끼리, 여자는 여자끼리 시선을 주고받고잠시 어색한 대화 중에 주고받는 아재 개그.
- 해준: 사실 원전 완전 안전하거든요.
- 호신: 항문 좋아하는 애널리스트가 아니고요. 하하하.
해준은 서래의 푸른 블라우스를 살피고 서래는 해준의 구두를 눈으로 가리킨다. 해준이 여긴 운동화 신을 일이 없어서,라고 대답한다. 정안과 호신이 서로의 명함을 주고받은 후, 시장 길 한가운데서 각자의 가던 방향으로 헤어진다. 집으로 돌아와서 정안이 묻는다. 지난번에 얘기했던 사건은 부인이 죽고 남편이 미망인이 아니었냐. 맞다. 그런데 오늘은 남편이 죽었다 했잖아. 그것도 맞아. 이상하네, 당신한테만 그런 사건이 연달아 터진 거야? 그래서 사람들이 우리를 싫어하잖아. 우리? 우리 같은 경찰들이 자꾸 의심하니까 말이야. 해준은 참 잘도 둘러댄다. 속은 조마조마하겠지만 한편으론 다시 설레어할지도. 그러는 사이에 아내 정안의 휴대전화기로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온다. 임호신의 전화번호였다.
갑자기 이포에 살인사건이 일어난다. 어쩌다 가끔 자라 양식장 절도범은 나타나도 살인사건은 절대 일어날 것 같지 않은 이포에. 급히 호출이 들어오고 해준은 구두 대신 운동화를 챙겨 신고 황급히 사건현장으로 나간다. 해준의 눈이 순간 번뜩이고 어느 바닷가 고급 펜션에 도착한다. 야외 수영장 계단 난간에 기대앉은 듯 죽어 있는 남자. 죽은 남자는 임호신이었다. 핏기 없는 싸늘한 얼굴로 왼편으로 고개를 숙인 채, 수영복 차림으로 손목에 익숙한 롤렉스 시계를 차고 있었다. 기도수의 롤렉스 시계가 떠오른다. 얼굴과상반신에상처와 깊숙한 칼자국이 주로 오른쪽으로 집중된 모습이었다.범인은 왼손잡이. 해준이 슈트 주머니에서 인공 눈물을 꺼내 눈에 넣고 깜빡인다.
해준이 임호신 아내는 어딨냐, 묻자 여형사가 해녀불턱에서 산책하고 있었답니다,라고 답한다. 해준이 화가 나서 성큼 바닷가에 서 있는 서래에게 다가가 다짜고짜 묻는다.
- 이러려고 이포에 왔어요?! 내가 만만합니까?
- 내가 그렇게 나쁩니까?
해준이 격앙된 표정으로 서래를 노려보고 서래는 슬픈 눈으로 해준을 쳐다본다.
임호신 죽기 전날 무슨 일이 있었을까. 임호신은 시장에서 딱 한번 마주쳤던 정안에게 왜 전화를 했을까. 임호신은 도대체 왜 그런 기괴한 모습으로 죽어 있었던 걸까. 그리고 과연 임호신을 죽인 사람은 송서래일까.
임호신은 주식 방송에 몇 번 얼굴을 비추며 인지도를 높여서 순진한 사람들의 재산을 투자 명목으로 가로챈 후 그 돈으로 호의호식하며 도망 다니던 폰지 사기범이었다. 서래가 임호신과 함께 다니며 그의 사기 행각에 같이 동조한 입장에서 임호신을 당장 죽일 이유가 있을까. 조금 있다가 이포로 관광하러 오는 중국인 부자들에게 한탕할 계획을 세웠는데 굳이 그럴 동기가 부족해 보인다. 해준은 서래가 범인일 거라는 확고한 생각에 빠져 어떻게든 증거를 찾아내려 서래를 취조해 보는데 딱히 엮을 만한 증거가 없다.
- 왜 또 그런 남자와 결혼했어요?
- 다른 남자와 헤어질 결심을 하려고, 했습니다.
사건 당일 오전, 해녀불턱을 산책하는 서래를 목격한 관광객 커플을 찾아가 푸른색 블라우스를 입은 서래가 당시 뭘 하고 있었는지 묻는데 도통 알 수 없는 동작으로 바다 쪽으로 팔을 뻗는 동작을 취해 보였다.
이때 여형사가 사건 당일 펜션 부근 CCTV에 찍힌 차량 하나를 수배하고 차주가 철썩 이, 사철성이라는 것과 그가 임호신에게 개인적인 원한이 있었다는 사실을 해준에게 알린다. 사철성이 죽은 엄마의 장례식을 치르는 모습을 멀찍이서 잠복해서 살펴보던 중 철성이 왼손잡이인 것을 발견한다. 사철성을 연행해서 임호신을 죽였냐, 물으니 단박에 그렇다고 당당하게 이야기한다. 임호신이 저지른 악행에 대해 설명하면서 자기가 호신을 죽인 것은 당연한 것이라 대답하는 것을 보고 해준이 죽은 호신을 찍은 범행 현장 사진을 내민다. 사진을 들여다본 철성이 화들짝 놀라며 이걸 왜 이렇게 해괴하게 앉혀놨냐고 되묻는다. 임호신을 죽인 범인은 확실히 사철성이 맞는 듯한데 시신을 그렇게 앉혀 놓은 건 누굴까.
해준이 여형사를 데리고 바닷가로 가 서래가 찍힌 사진대로 동작을 취해보라 시키고 뭘 하고 있었는지 상상해 본다. 그리고 뭔가 알아차린 해준은 여형사에게 잠수부를 시켜 바닷속 임호신의 휴대전화를 찾아보라 시킨다. 여형사는 이미 끝난 사건을 왜 또 그러냐, 남편 잃은 여자가 불쌍하지도 않냐 질책한다.
서래가 임호신 시신을 옮겨다 그렇게 해놓은 것 같은데 왜? 해준이 서래를 찾아간다. 서래가 반색하며 해준을 안으려 한다. 해준이 떠밀어내며 무작정 집안을 뒤지며 푸른색 블라우스를 찾는다. 세탁실 바구니까지 뒤지지만 찾을 수 없는 해준은 머리끝까지 화가 나서 소리 지르며 묻는다.
- 초록색인지, 파란색인지 파란 단추 달린 그 블라우스 어딨어요? 시신은 왜 또 그렇게 해놓은 겁니까?
- 산책하고 왔더니 피 냄새가 지독해서 당신… 생각났어요. 당신이 와서 이걸 볼 텐데. 당신이 무서워할 텐데.
해준이 사건 현장으로 올 것을 예상한 서래가 피가 흥건한 수영장 물을 다 빼고 임호신 시신을 옮겨다 앉히고 수영장 바닥에 고인 피를 물로 씻어냈다는 이야기를 한다. 바비큐 그릴에서 태우다 남은 블라우스 조각을 발견해 증거로 수집하고, 서래를 사건 현장 훼손한 혐의로체포하겠다는 말을 하는 해준. 서래가 자신의 마지막 부탁을 들어달라며 호미산으로 해준을 이끈다. 해준은 서래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하고 산으로 오른다. 서래가 할아버지와 엄마의 유골을 보관하는 단지를 해준에게 내밀며, 고소 공포가 있는 자신을 대신해 산 아래로 뿌려달라고 말한다. 해준이 유골함을 열어보고 뚜껑에 붙어 놓았던 펜타닐이 없어진 것을 보고 어떻게 했냐고 다그치지만 서래는 대답을 회피한다. 각오를 한 듯 벼랑 끝에 선 해준이 유골을 차례대로 뿌린다. 뒤에서 서래가 인사한다.
- 할아버지, 잘 가요. 엄마, 잘 가!
유골을 모두 뿌린 해준이 그 자리에서 가만히 눈을 감는다. 뒤로 서래가 다가옴을 느낀다. 해준은 뒤돌아보지 않고 그냥 그대로 꼼짝도 하지 않는다. 서래가 해준의 허리를 감싸고 안는다. 안도의 한숨을 쉬는 해준이 뒤돌아 서래의 눈을 쳐다본다. 서래가 이해동 할머니의 전화기를 해준에게 내밀며 전남편 사건을 다시 수사하라고 말한다. 그리고 다시 붕괴되기 이전으로 돌아가라고 말한다. 해준이 서래에게 멀리 바다에 던져 버리라고 했잖느냐, 왜 이걸 가지고 있느냐 원망하는 눈으로 화를 낸다.
- 나는 해준 씨의 미결 사건이 되고 싶어 이포에 갔나 봐요. 벽에다 내 사진 붙여놓고 오로지 내 생각만 해요.
집으로 돌아온 해준이 차를 집 앞에 세워놓고 내리는데 집 출입구에서 낯선 남자가 여행용 캐리어 가방을 밀면서 나온다. 의아한 눈으로 옆을 스쳐가는 남자를 넌지시 보다가 곧이어 집에서 나오는 정안을 만난다. 정안 손에 석류담금주와 자라가 들려져 있다. 정안은 낯선 남자를 이 주임이라고 부르며 남자를 해준에게 소개한다. 지금껏 이 주임이 여자라고 생각했었는데, 남자였다니. 심지어 둘 사이 관계가 심상치 않았다.섹스리스 부부였다는 이 주임은 결국 이혼을 한 것일까. 그리고 정안은 굳건한 약속(?)을 비웃듯이 해준을 경멸한다는 눈으로 쏘아보며 남자의 차를 타고 떠난다. 넌 자라 먹을 자격조차 없다는 것처럼 식용 자라까지 야무지게 챙겨서 쌩 하니 가버린다.
오랜만에 해가 반짝하고 나온 오후, 햇볕을 쬐며 벤치에 누워 있던 해준에게 여형사가 이포 해녀들을 시켜 임호신 전화기를 건졌다 말한다. 복구된 전화기를 통해 임호신 사망 전날 그가 서래가 나눈 메시지들을 확인하고 임호신이 서래에게 퍼트리겠다고 협박한 파일이 지워진 것을 확인한다. 곧장 차를 타고 사철성이 서래 전화기에 몰래 설치했다는 추적앱을 켠다. 바닷가 근처에서 잡히는 서래의 전화기 위치를 따라가면서 서래에게 전화를 한다. 서래에게 해준이 당신이 펜타닐을 사철성 어머니에게 줘서 철썩 이를 자극한 게 아니냐 한다. 임호신이 말한 파일이 도대체 뭐길래, 당신이 그랬냐 하니......
- 당신과 내가 나눴던 대화를 녹음한 파일을 남편이 들었어요. 당신이 나를 사랑한다는 말도요.
- 내가 언제 사랑한다고 했어요?
헤어질 결심 각본 중 일부
서래가 타고 온 차를 해안가에 세워두고 전화기를 차 안에 둔 채 바다로 걸어간다. 해준이 계속 통화를 시도하지만 전화 연결이 되지 않고, 서래 차 가 한 자리에서 멈춘 것을 발견한다. 전속력으로 차를 몰아 도착한 곳엔 서래가 보이지 않고 차만 덩그러니 세워져 있다. 차 안에 둔 전화기를 꺼내 뒤져본다. 음성 파일이 하나 달랑 있는데 제목이 '깨지고 무너짐'이다. 해준이 파일을 열어 귀에 대고 들으면서 바닷가 쪽으로 뛰어가 서래를 찾는다.
그 시각 서래는 시간을 확인한 후 들고 온 양동이로 모래를 퍼내며 깊숙이 구덩이를 판다. 구덩이 앞엔 모래가 산처럼 쌓인다. 만조가 점점 구덩이 쪽으로 밀려오고 있다. 양동이를 던지고 서래가 구덩이 안으로 들어간다. 밀려오는 물결 너머로 저녁노을이 진다. 서래가 코트 안주머니에서 술병을 꺼내 마신다. 바닷물이 모래를 끌어와 구덩이로 들어온다.
나는 해준 씨의 미결사건이 되고 싶어 이포에 갔나 봐요.
벽에다 내 사진 붙여놓고 오로지 내 생각만 해요.
해준은 허공과 바다 이곳저곳을 정신없이 두리번대며 자신이 서래에게 했던 말들을 되뇐다. 뒤늦게 뭔가 깨닫고 억장이 무너지는 해준. 그저 사랑한다는 말보다 더 깊은 고백을 했으면서 몰랐던 거다. 그리고 그녀와 끝을 냈다 생각하며 도망쳤던 해준은 이제야 깨닫고, 풀어진 운동화 끈을 다시 동여맨다. 그의 두 발아래 그녀가 붕괴되어 매몰되어 있지만, 그는 결코 알지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