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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숨의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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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숨 Jan 26. 2020

"아저씨. 제일병원 사거리로 가주세요"

려홍과 오랜만에 식사를 마치고 집으로 가는 길이었다.

나는 물건을 잔뜩 사 두 손에 가득 쥔 짐들이 버거워 택시를 잡아탔다.

이 주에 몇 번째 택시인지, 잘 가늠되지 않았다.

택시를 많이 타고 있다는 뜻은 내 삶을 내가 컨트롤하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씀씀이가 얼마나 헤픈지, 무슨 짓거리를 하고 돌아다니는지 복기하는 시간을 갖지 못하면, 나는 종종 무의미하게 돈을 허비한다. 


기사님께 목적지를 말하려고 하는데 한참을 뜸 들였다. 

아직도 우리 집을 목적지로 말할 때 특별히 지칭할 건물이 없어 헤맨다. 

한참을 생각하다 제일병원을 떠올렸다. 

제일병원 사거리 근처쯤이요라고 하면 기사님 절반은 알아들으신다. 


지금은 없어진 지 오래지만, 이 제일병원은 규모가 꽤 컸었던지 서울에서 운수업을 하시는 분들은 대개 이 제일병원을 알고 계신다.

그것도 다 옛날 얘기고 지금은 그 병원이 있던 자리엔 중국인을 대상으로 하는 면세사업장이 들어서 있다.


이 년째 이 동네에 살고 있는데 제일병원의 히스토리에 대해 아는 기사님을 만난 건 오늘이 처음이었다. 


제일병원이 한 때야 잘 됐지 이제야 다 옛말이지. 그 동네에 병원이 잘 되겠나. 

그 건물주를 내가 잘 알거든. 그 양반이 800억에 그 건물을 팔았지. 

전라도 양반인데 지금 한 87세인가 다 됐지.

고향엔 여전히 사슴 500마리를 키우고 있다더군. 

택시회사 운영해서 떼 돈 번 사람이거든. 

딸은 서초동에서 유치원하고 있고, 사위는 00구 국회의원인가 하고 있지.


게으름을 자책하는 승객과 그 게으름 덕분에 생계를 이어가는 운전수 사이에는 

이 둘의 세계에선 절대 있을 수 없는 사람들의 세계에 대한 대화로 가득해져 버렸다. 


우리 세계의 사람들은 고급 타워펠리스에 사는 사람들의 아들이 5급 행정고시에 합격한 이야기,

강남 모처의 오래된 아파트가 재개발에 들어가 떼돈을 번 사람들의 얘기. 

건물을 쌓아 올려 그 차익으로 떵떵거리며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 


등을 이야기하며 열을 올린다. 

때론 시샘하고, 부러워하며, 혹시나 그 사람들 덕을 보진 않을까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며. 

그 세계가 나의 세계인마냥 떠들어댄다. 


나는 이런 하찮은 이야깃거리를 가십 삼아 떠드는 사람들이 혐오스러우면서도,

그들을 향한 부러운 시선을 거둬들이지 못하는 자신에게 역한 기시감을 느낀다. 


나는 여전히 강한 사람들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이 세상이 낯설다.


나는 또 얼마간 의미 없이 택시를 타야 하며, 그럭저럭 다니고 있는 회사 생활에 만족해하며,

가끔씩 하사품처럼 떨어지는 볼품없는 휴가를 자기 위안 삼으며 타인에게 나의 삶이 얼마나 볼 품 있음을 얼마나 더 인증해야 하는 것일까. 


세상은 점점 이해할 수 없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고,

나는 여전히 외톨이가 된 것 같은 기분으로 씁쓸하게 웃을 뿐이다.

양 손엔 이 따위 비관적인 자본주의 덕분에 벌어들인 월급으로 산 사치품들이 가득했다.


집 근처에 다 와갔다.

제일병원이 있었던 건물 옆에는 어느새 오래된 건물이 헐리고 그 몇 배쯤 되는 높은 건물이 올라와 있었다.

세상은 점점 더 빠르게 높아져만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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