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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겨울 Jun 06. 2024

남기 씨의 책임감

우리 아빠 정남기

"내가 너 주는 만큼은 일을 해야 돈 주는 게 안 아깝지 않겠어?"

미소를 걸친 입꼬리가 부들부들 떨리며 아슬하게 곡선을 유지했다. 두 사람이 나란히 지나갈 수 없을 정도로 좁아터진 공간에서 사장과 찰싹 붙어 쉴 새 없이 아이스크림을 퍼내고 있던 내게 그가 던진 말이었다. 꽝꽝 언 아이스크림을 다루느라 손목이 시큰거려도, 유니폼 모자 속 머리카락이 흠뻑 젖을 정도로 뛰어다닐 만큼 바빴어도 잘 버텼던 내가 한순간 축 처져 시들거렸다. 그러나 나에게는 지옥 같은 그 아르바이트도 그만두지 못하고 참아야 할 이유가 있었다. 표독스러운 눈앞의 그보다 독한 아빠의 잔소리가 나를 조준한 상태로 상시 대기 중이었으니까. 여러 날을 눈물 콧물 쏙 빼게 만들었던 그 일을 그만하고 싶다는 말을 꺼냈을 때 아빠는 전후 사정은 필요 없다는 듯 얼마 다니지도 않은 자리를 쉽게 포기하려 한다며 나를 나무라기 바빴다. 순간 아빠의 얼굴 위로 1-2g의 오차에 나를 닦달하던 아이스크림 판매점 사장의 얼굴이 겹쳐 보였다. 

문제는 그 이후부터였다. 힘듦을 토로하면 아빠는 또 그만두게? 하며 얼마 가지지도 않은 내 승부욕에 불을 붙였고, 그만둘라치면 머릿속에 두둥실 떠올라 내 알량한 책임감을 꾸짖었다. 부당한 대우 앞에 참지 않고 시원하게 첫 사직서를 써내고 왔을 때도 아빠는 같은 태도로 나를 꼬집었다. 다시 새로운 회사로 가기까지 꼬박 두 달을 가야 할 곳도 구해 놓지 않고 무작정 그만둔 나의 행동에 대해 온 마음이 시퍼렇게 될 때까지 나를 괴롭게 하는 말들을 아끼지 않고 퍼부었다. 그렇게 위로 없는 쓴소리를 듣지 않으려 어디에서든지 일단 버티고 보는 애매한 책임감을 가진 어른이 되었을 때, 내가 본 우리 아빠는 잘도 때려치우는 사람이었다.

건설업 일용직이던 우리 아빠는 이 현장 저 현장을 다양한 핑계로 그만두고 다녔다. 이 현장에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책임자라는 이유로 따라다니며 사사건건 잔소리를 한다고 얼굴을 붉혔고, 저 현장에서는 일하는 사람들이 영 말을 안 들어 같이 일하기가 힘들다며 버럭 댔다. 

내가 한 회사에 정착한 지 오 년이라는 시간이 지날 즈음 아빠의 이직은 우리 가족 사이에서 은은한 놀림거리가 되었다. 출장을 길게 간다고 짐을 싸는 아빠 뒤에서 엄마와 나는 입을 모아 놀리 듯 한 마디를 얹었다.

"가 봐야 알지 내일 갔다가 모레 때려치우고 올지 누가 알아~"

그렇게 우스갯소리를 할 때마다 그동안 쌓였던 설움이 확 줄어드는 기분이 들며 어깨가 솟았다. 과연 버틴 자와 버티지 못한 자가 뒤바뀌며 승리자가 된 것 같은 우월감이 벅차오르는 순간이었다. 

늘 정해진 길을 가는 사람처럼 내일부터 그 현장은 안 나가기로 했어! 하면서도 눈뜨면 출근을 택하던 아빠가 어느 날부터 일이 나가기 싫다는 소리를 했다. 그의 어리광 같은 한 마디와 입버릇처럼 출근하기 싫다는 소리를 내뱉는 나의 말은 무게감이 달랐다. 이 사람이 싫고 저 사람이 마음에 안 들었던들 또다시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러 나서는 그 발걸음이 늘 가벼웠을 리 없었을 것이다. 소위 더럽고도 치사한 일들이 있는 곳에 발을 들였어도 자신의 선택에 책임을 다하려 버틴 순간 또한 셀 수 없이 많았을 것이다. 하지만 아빠는 현장직을 떠나는 선택은 한 번도 한 적이 없다. 무거운 장비들을 들고 쇳소리가 끊이지 않는 그곳에 나가는 일을 업 삼아 나를 키웠고, 우리 가족을 부양했다. 

태어난 자녀로 인해 가장의 무게가 더 무거워졌을 아빠의 그때 나이가 되어서야 나는 깨닫는다. 빈번한 듯 보이는 아빠의 때려치움이 제때를 모르고 사표를 던진 나의 그만둠과는 달랐다는 것을. 당신의 어깨에 둘러진 무거운 책임감이 아직은 애매한 어른인 내가 지고 있는 책임감과는 달랐다는 것을. 가볍게 던진 만큼 아빠의 책임감도 조금은 가벼워지기를 바라며, 내일 가 보고 모레 때려치우고 와도 괜찮다는 마음을 담아 오늘도 새로이 가방을 싸는 아빠 뒤에서 우리는 말한다.

"가 봐야 알지~ 또 때려치우고 올 줄 누가 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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