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사표 쓴 이선생 May 06. 2024

독서를 위한 교육적 변명

<졸업생들에게 쓰는 편지> 3장

대학 생활하면서 고등학교 때의 공부가 얼마나 좋은 공부였는지 깨닫는 것 같아요..!! 악의 평범성부터, 익스텐시브 리딩, 그리고 Logical Thinking & Writing 수업 때 배웠던 내용들까지 대학 와서도 정말 유용하게 작용해서 너무 신기해요!! 앗 그리고 제가 지금 듣고 있는 거의 모든 강의에서 발터 벤야민을 배워서.. 진짜 반갑기도 하고 이해하기도 쉬워요..
- 졸업생의 메시지 中




"성인 10명 중 6명, 1년에 책 한 권도 안 읽어... 독서율 최저치 경신"


며칠 전 읽은  제목다. 문화체육관광부의 ‘2023년 국민 독서실태 조사’ 결과를 토대로 독서하지 않는 사회에 경각심을 일깨우기 위해 작성된 기사였다. 전자책과 오디오북을 제외한 종이책을 1년에 한 권이라도 읽은 성인은 32.3%에 불과했다. 반면에, 학생 독서율은 95.8%였다. 기사에 언급되지 않은 학교급별 독서율이 궁금해져 직접 보고서를 다운로드하여 읽어 보았다. 고등학생 독서율은 92.8%로 초중등 학생들보다는 낮아도 절대적인 기준에서는 굉장히 높은 수치였다. 고등학교의 독서 지도율도 92.7% 되었다. 보고서학교 교육이 학생들의 책 읽기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쳤다고 분석하며 "국어 시간에 따로 독서 활동 시간이 있어요.", "우리 학교는 책 1권 읽기 의무제를 시행 중입니다."라는 학교 현장의 목소리를 담고 있었다. 독서를 강조하는 학교의 노력이 어느 정도 결실을 맺고 있는 것처럼 보였. 기사에서도 실망스러운 성인 독서율과 달리, 학생 독서율은 만족스러운 결과라는 논조가 담겨 있었다. 하지만 이 낙관적인 현상 해석에 마냥 동의할 수는 없었다. 그 높은 독서율 수치가 학생들이 얼마나 자발적으로 책을 읽는지, 어떤 수준의 책을 읽는지, 책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알려주지는 않기 때문이다. 보고서를 찾아보니 독서를 매우 좋아하거나 약간 좋아하는 학생들은 39.6%, 성인은 18.3%에 그쳤다. 특히 학생들의 독서율과 독서 선호도 간 격차가 눈길을 사로잡았다. 이 수치에 주목했다면 기사의 제목은 '책 좋아하지 않는 사회'가 더 어울렸을 것이다.  하나 흥미로운 부분은 가정의 독서 권장 활동 부분이었다. 이에 관한 이야기는 뒤에서 다루도록 하겠다.


어른들은 왜 책을 읽지 않을까. "책 보다 재미있는 게 많아."라는 변명이 먼저 떠오른다. 인간은 즉각적인 쾌락을 안겨주는 매체에 약할 수밖에 없는 존재다. 하루 종일 티브이만 봐도 재미있는 채널이 수백 가지인데, 유튜브는 그 선택지가 수십만 개다. 침대에 누워 아무런 행동을 하지 않아도 알아서 쾌락을 가져다주는 편리한 매체다. 반면 책을 통해 쾌락을 얻기 위해선 의식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즉각적이지 않고 편리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정신과 육체를 고단하게 만들 수 있는 매체인 것이다. "읽어야 할 게 너무 많아!"라는 변명도 타당하다. 텍스트가 넘쳐나는 시대다. 매일 스마트폰에는 문자, 카톡, 알림이 찍힌다. 다 읽어야 할 것들이다. 뉴스도 스마트폰으로 읽고 관심 있는 상품 정보도 SNS에서 읽는다. 종이책이나 전자책을 보지 않아도 읽기 활동은 멈추지 않는다. 이뿐만 아니라 직장일, 집안일, 육아, 그로 인한 피로  책에 소원해질 이유가 너무나 많다. 나도 직업상의 필요 외에 책에 손대지 않은 기간이 몇 년은 족히 될 것이다. 이해가 가는 변명투성이다.


더군다나 책을 읽지 않는 삶도 충분히 가치가 있다. 영화, 드라마, 팟캐스트, 음악, 춤, 미술, 스포츠, 사교 등 삶을 다채롭게 만드는 매체와 활동이 방대하다. 책만 지식을 전달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유튜브에만 해도 양질의 강의가 산더미만큼 있다. 앞서 언급했던 기사처럼 성인들이 책을 읽지 않는다고 해서 부끄러움을 느껴야 한다거나 독서하지 않는 사회가 문제라는 식으로 접근할 필요는 없다는 뜻이다. 책을 당연히 읽어야 한다는 식의 접근은 오히려 독서를 방해할 수 있다.


성인은 스스로 가치 판단하고 선택에 책임을 질 수 있는 존재다. 책 읽지 않는 성인이 많다면 책을 읽어야 하는 이유를 그들에게 이해시키면 된다. 이해관계에 재빠른 어른들이니 이득이 다면 어떻게든 독서를 선택할 것이다. 어떤 이득을 가져다줄지 명확하지 않으니, 책과 멀어질 수밖에 없다. 이미 학창 시절 많이 읽었고 인생의 경로가 어느 정도 정해졌기에 독서가 필요치 않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이 모든 가정 속에 도구적 독서관자리 잡고 있다. 재미와 즐거움을 얻기 위한 독서가 충분히 경험되지 않았다면 책을 읽어야 할 구실을 만들어 주는 편이 낫다.


 어른들이 질문할 차례다. "책을 왜 읽어야 해?" 책의 입장에서도 항변할 거리가 많. 문해력, 지식, 공감과 위로 등등. 책을 위한 변명을 내가 대신해 준다면 이렇게 말할 것 같다. 책은 상상력의 원천이며 인간의 이성 활용 방식을 알려주는 도구니까 읽어야 한다고.


책은 상상력을 자극한다.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를 읽는다면 독자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카이사르가 겪은 온갖 흥망성쇠의 장면 하나하나를 자유롭게 창조해 낼 것이다. '체 게바라 평전'을 읽는 동안은 쿠바와 볼리비아에서 벌어지는 게릴라 전투를 우리 의 스케일에 따라 블록버스터로도, 저예산 영화로도 편집할 수 있다. '밤의 거미원숭이'를 읽을 때는 생선 초밥 가게에 앉아 시시껄렁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표정을 그려 볼 수도 있다. 이렇게 각양각색의 상상을 허용하는 책과 달리, 영화나 드라마를 보는 우리의 상력은 눈으로 지각되는 영상 밖으로 탈출하기 어렵다. 영화가 나오기 전 읽었던 해리포터에서 "He-Who-Must-Not-Be-Named(볼드모트를 직접 언급하지 않기 위한 일종의 완곡어)"는 이야기에 등장할 때마다 다른 형상으로  머릿속에서 상상되곤 했다. 영화가 시각적 단서를 제공한 후부터 빌런은 영화 속 이미지로 굳어져 아무리 책을 읽어도 더 이상 변이하지 않는 대상으로 변해버렸다. 누군가의 대단한 상상력이 시각적으로 해석된 작품을 만나는 것은 그 자체로 흥미로운 일이지만, 그 대단한 상상력을 얻기 위해 훈련하려 한다면 책만 한 게 없다.


책은 인간이 어떻게 이성을 활용할 수 있는지 알려주최고의 교보재이기도 하다. 독자는 글을 따라가며 이성이 어떤 일을 할 수 있는지 깨닫는다. 저자가 전달하 지식보다, 거기까지 도달하게 된 이성의 활용 경로가 더 의미 있다. 실용 서적을 쓴 저자는 실생활에 도움을 주는 지식과 비결을 설명하면서 이성을 이렇게 활용했다고 시범을 보인다. 역사 서적은 사료를 해석하는 방식을, 과학 서적은 관찰과 실험을 통해 결론을 도출하는 과정을 가르쳐 준다. 고차원적인 이성 활용 방식에 눈뜨내가 모방할 수 있는 분야를 찾아보게 된다. 나의 이성은 작동하지 않던 사물에 관하여 이성을 활용할 줄 아는 저자의 글을 읽으며 발상의 전환을 이루기도 한다. 글쓴이가 추구하는 삶과 지식과 진리의 여정에 동참하기 위해 나의 이성을 활용해 보겠다꿈을 꾸게 한다. 이 꿈은 저자들이 도달한 세계의 지평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는 디딤돌이 되기도 한다. 엄청난 참고문헌의 수에서 알 수 있듯 수많은 자가 성취해 낸 지식 세계로부터 진일보한 연구와 통찰을 선보인 재레드 다이아몬드의 책처럼 말이다. 나와 다른 인간이 이성을 어떻게 활용하는지 이렇게 자세히 해설해 주는 건 책이 유일할 것이다.


이처럼 이성을 활용할 수 있는 능력에 인간의 상상력을 결합하면 우리가 도달할 수 있는 세계가 넓고 깊게 확장될 수 있다. 그 세계의 끝까지 아직 가본 적이 없으니, 인간의 이성과 상상력이 어떤 대단한 일을 해낼 수 있을지 그 누구도 예측하기 어렵다. 물질적 가치에 경도된 세계가 비물질의 가치와도 조화를 이룰 수 있을지, 인간의 가치가 균등하게 전파되는 세계가 도래할 수 있을지, 우리 삶에 궁극적인 변화를 불러 올 비법을 결국에는 발견하게 될지도 모른다.


하루하루 바쁜 어른들에겐 이런 '책을 위한 변명'이 비현실적으로 들릴 수 있다는 걸 아주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배움이 곧 직업인 아이들은 책이 주는 이점을 최대한 활용할 수 있어야 한다. 앞서간 사람들이 어떻게 이성을 활용해 왔는지 모방하며 인지적 성장의 기초를 마련해야 한다. 또, 호기심은 상상력에서 비롯되기 때문에, 어떤 방식으로 살아갈 수 있을지 상상할 수 없다면 진로에 대한 호기심도 단순해질 수밖에 없음을 기억해야 한다. 주변 어른들을 관찰하여 얻은 단서만으로 진로의 선택지를 고르는 아이들이 많다. 상상력이 발휘되기 어려운 환경 속에서 인생의 경로를 결정하기보다는 책을 읽으며 자유롭게 꿀 수 있어야 한다. 자신의 미래를 여기저기 대입해 보이성을 활용하여 인생의 가능성을 테스트할 수 있어야 한다. 20대가 되어서, 30대가 되어서 미래가 바뀌어도 좋다. 모든 아이가 10대부터 가야 할 길이 정해진다면 오히려 상상력이 빈곤한 사회라는 방증이 아니겠는가.


어른들의 역할은 이거다. 십 대들이 책을 읽어야 하는 이유를 설명해 주는 거다. 미래가 정해지지 않았고 책을 읽고 얻을 수 있는 이득이 어떻게 쓰일지 아직 알 수 없으니 "독서가 네 미래에 엄청나게 도움이 될 거야."처럼 근거 없는 조언도 어느 정도 먹힐만하다. 불확실한 미래가 주는 유일한 장점이다. 혹은 아이들과 함께 책을 읽고 책에 관한 대화를 나누는 거다. 서두에 얘기했던 '국민 독서실태 조사' 보고서에는 가정의 독서 권장 활동에 대한 학생들의 응답이 나와 있었다. 우선 책을 읽는 학생과 읽지 않는 학생 간 부모의 독서 권장 정도에 15% 차이를 보인 점이 눈에 띄었다. (독서자 57.2%, 비독서자 42.8%) 더 흥미로웠던 수치는 '평소 독서 대화'를 하는지 묻는 문항에 독서자와 비독서자 모두 20%에 못 미치는 답변을 보였다는 점이다. (독서자 19.3%, 비독서자 12.9%) 책을 권장하지도, 대화하지도 않는 가정 상당수였다. 대화의 소재가 되지 않으니, 독서가 부자연스러운 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학생들이 독서와 관련하여 가정에 바라는 점은 '독서 강요 자제(62.5점) - 가족과 함께 도서관이나 서점 이용(57.6점) - 책 구매(56.4점) - 함께 하는 독서 시간(52.4점) - 책 관련 대화 시간(50.7점) - 독서하는 모습 보여주기(50.4점)' 순으로 나타났다. 야생의 동물은 쫓고 쫓기는 생존 행위에서 자연스럽게 몸을 단련시키는 반면, 인간만이 살을 빼고 건강해지려고 일부러 운동이란 걸 하는 동물이다. 그렇다면 독서도 일부러 행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 스스로 재미와 즐거움까지 느끼지는 못하더라도 어른들이 자녀와 함께 책을 읽고 서로의 책에 관하여 대화할 수 있다면, 그 대화가 아이에게 독서의 유용함을 가르쳐 줄 수 있다면, 이보다 더 책을 읽어야 할 명확한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물론 학교는 다원화 사회를 살고 있는 학생들을 가르치는 곳이기에 다양한 교육적 배경을 고려하여 독서 교육을 하고 가정교육을 보완할 수 있어야 한다. 선생님이 아이들과 함께 독서하고 대화할 수 있다면 생업 때문에 바쁜 학부모들에게는 감사한 일이 될 것이다. 재미와 즐거움을 위해 독서하는 습관까지 학교에서 가르칠 수 있다면 금상첨화라 할 수 있겠다. 하지만 다량의 유머가 코딩된 책이나 만화가 아니라, 진지한 책을 읽고 즐거움을 맛보는 수준에 도달하는 건 진짜 어려운 일이다. 재미와 즐거움은 지극히 주관적이어서 학교에서 독서 활동을 체계적으로 조직한다고 해도 이런 독서 습관이 다수에게 습득될 수는 없다. 독서를 깊이 있게 하는 방법은 수업을 통해 가르칠 수 있다. 반면에, 재미와 즐거움을 얻고자 독서하는 습관을 기르위해선 철저히 개별화 교육이 필요하다. 고등학생을 가르쳤던 나는 독서 교육 실천 방안을 두 단계로 나누었다. 첫 번째, 독서가 주는 이득이 무엇인지를 구체화하는 단계. 두 번째, 독서가 주는 이득이 어느 정도 수용되면 독서의 재미와 즐거움을 끌어내기 위해 학생의 특성을 고려하여 개별적으로 접근하는 단계. 이런 방식을 통해 독서의 즐거움을 느끼는 학생들이 조금씩 많아지길 기대했다.


2020년, 외고에 발령받자마자 학년에서 운영할 독서 활동을 신중하게 계획했다. 우선 독서가 주는 이득이 무엇인지 구체화하고 설득하기 위해 입시를 적극 활용했다. 1학년 때는 학급별 독서, 2학년 때는 진로 독서, 3학년 때는 고전 독서라는 활동명으로 학년 간 연계하여 생활기록부에 기록해 줄 거라 공지했다. 2장에서 언급했던 '대학에서 잘하는 학생'이 되기 위해서도 독서가 필요함을 설명해야 했다. 그래서 아래와 같이 독서활동 매뉴얼을 만들었다. 


독서 교육을 위해 입시를 활용하고 독서의 목적을 설명한다고 해서 갑자기 책에 대한 진지함이 생겨나고 독서 교육의 목표를 이룰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프로 스포츠 선수에게 우리 팀의 올해 목표를 공표한다고 해서 모두 우승할 수 있는 건 아니지 않은가. 독서의 필요성에 어느 정도 동의했다면 어떤 방향으로 노력해야 할지 세부적으로 알려주어야 한다. 나의 경우 각 항목의 의도를 설명한 Book Report 양식을 만들고, 이 양식이 요구하는 사고력을 3년간 훈련하게 시키고자 했다.


주제 활동과 호기심 탐구 활동이 핵심이었다. 주제 활동에서는 사고의 유형을 5가지로 나누었다. 사실적 사고나 추론적 사고는 문제 풀이 과정에서 자주 훈련할 있으므로, 독서 활동에서는 공감평가분석비판성찰 등의 목적으로 사고하는 경험을 주고자 했다. 호기심 탐구 활동은 궁금한 모든 것을 질문하면서 발산적 사고를 수행하고 지식의 상호 연결성을 발견해 보라는 의미로 설계했다. 책의 내용을 수용하기만 하는 게 아니라, 책을 읽는 매 순간 능동적으로 질문을 떠올리고 스스로 답을 찾아보는 과정에서 지적인 즐거움을 느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소망을 품었다.


독서 활동의 전체적인 틀과 방향을 설정하고 나니 2단계인 학생의 특성을 고려한 개별적인 접근이 필요했다. 간단히 말해, 아이들과 책에 관한 대화를 나누는 것이었다. 거창하고 지적이어야 할 필요도 없다. 가장 쉬운 대화 방식은 책을 추천하는 거다. 전에 어떤 책을 왜 읽었는지 물어보면 대답을 듣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학생의 관심사가 보인다. 해당 분야에서 잘 알려진 책이나 다른 학생이 선택했던 책을 추천하면 아이들도 주목할 때가 많다. 내가 읽었던 책이라면 나의 감상까지 덧붙여 더 구체적으로 추천해 줄 수 있다. 그리고 늘 두 개 이상의 책을 추천하여 선택의 여지를 려 했다. 선택했다면, 책임감을 더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책을 추천하다 보면 교사인 나도 독서의 필요성을 체감하고 실천하게 되는 장점이 있었다.


책을 추천할 때 신경 썼던 점은 이해하기 쉬운 책, 익숙한 책만 고르지 않게끔 하는 것이었다. 선정한 책에 따라 아이의 사고가 정체되는 경우도 많다. 사고 수준의 향상을 위해선 까다로운 책도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 물론 모두가 읽어야 하는 책은 없다. 각자 가치를 느끼는 부분이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고전이라 불리는 책도 나와 맞지 않아 중도에 멈출 수 있다. 그런데 내가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서 그 책을 폄하하지는 않기를 원했다. 수많은 독자가 나와는 다른 생각과 경험으로 이 책을 소화해 냈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겸손하게 책을 대하는 자세를 배웠으면 했다. 그래서 고등학생이 읽기엔 다소 어려운 책을 추천하기도 했는데, 아이들의 반응은 제각각이었지만 책 선택에서도 도전적인 태도를 함양하는 것은 의미가 있을 거라 믿었다. 3학년 시절 우리 반 아이에게 에리히 프롬의 '자유로부터의 도피'를 추천한 적이 있었다. 이 아이는 이메일로 북리포트를 제출할 때 좋은 책을 추천해 주어 고맙다는 말과 함께 엄마한테도 추천해 드렸다는 메시지를 남겼다. 나의 책 추천이 가정에서의 책 대화로 이어지는 상상을 할 수 있어 보람을 느낀 기억이었다.


 대화에 좋은 두 번째 방식은 아이가 쓴 글을 보며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다. 내가 활용한 북리포트 양식은 줄거리를 생략해도 되기 때문에 내용을 요약하는 연습은 되지 않는다. 대신 아이의 사고 과정 파악에 집중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2학년 때 우리 반 아이 한 명이 '북유럽 신화'를 읽고 북리포트를 제출한 적이 있다. 그리스로마 신화 속 강력한 권능을 지닌 신들과는 달리, 북유럽 신화의 신들은 인간처럼 약한 존재로 묘사되었다고 쓴 내용이 흥미로웠다. 왜 이런 차이가 나타났을지 대화하는 과정에서 지리적 조건에 따라 신을 인간의 믿음 정도가 달랐기 때문이생각을 읽어낼 수 있었다. 춥고 척박한 풍토로 생존의 난도가 높아진 북유럽인은 신에 대한 믿음이 약화될 수밖에 없지 않았겠는가 하는 것이 이 아이의 추론이었다. 이렇게 사고 과정이 들여다보이는 대화가 아쉽게도 매번 이루어지진 않았다. 하지만 추천받은 책을 진지하게 읽고 학기별 2편의 북리포트 작성을 포기하지 않았던 아이들과는 짧게 대화하더라도 독서와 사고의 수준이 조금씩 높아지고 있다고 확신할 수 있었다.


이번 장 첫머리의 글은 졸업 후 4개월이 지나서 받은 제자의 메시지다. 졸업식에서 받은 편지보다 더 의미가 있어 이번 장에서 소개했다. 이 제자에 관한 첫 기억은 1학년 1학기 'When My Name Was Kyoko'라는 영문 소설을 수업 시간에 같이 읽었을 때로 남아 있다. 원서 수업에 대한 부담을 덜어 주기 위해 매 수업 15분에서 20분 정도는 읽을 시간을 충분히 주곤 했다. 일제 학도병으로 징집된 주인공이 가미카제 특공대가 되어 작전을 수행하던 당시의 내적 갈등이 묘사된 내용을 읽던 날이었다. 책을 읽고 여느 때처럼 "어땠어?", "어떤 내용인지 이해됐어?"라고 간단한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이 아이가 대답한 말이 인상에 남았다. "읽는데 계속 가슴이 두근거렸어요." 상기된 표정으로 책에 대한 몰입감을 이렇게 표현했는데, 태도에서 느껴지는 진정성 때문에 말의 의미가 순수하고 겸손하게 전달되는 특징을 발견할 수 있었다. 다른 수업에서도, 수업이 아닐 때도 이런 태도가 유지되었던 아이였다. 북리포트를 쓸 때도 그랬다. 문장 하나하나에 정성이 담겨 있었다. 한 가지 아쉬웠던 점은 책 선정 동기가 단편적으로 느껴질 때가 있다는 거였다. 책에 대한 몰입감이 좋은 학생이니, 책을 선택동기가 보다 성숙해질 수 있다면 더 고차원적인 독서도 충분히 소화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했다.


3학년 논술 수업에서 제임스 조이스의 '더블린 사람들'을 읽고 논술문을 작성했다고 해서 어떤 글을 썼는지 궁금해져 읽어 보았다. 아일랜드인의 '정신적 마비'를 키워드로 하여 작성된 글이었다. 이때, 책을 매개로 문학과 비문학을 넘나들며 지식을 쌓아 보면 이 아이에게 유익한 경험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아이를 따로 불렀다. 제임스 조이스의 다른 소설에도 비슷한 문제의식이 나타날지, 식민지를 경험한 다른 사회에서도 유사한 문제가 발견될지 공부해 보았으면 한다고 조언하니, 시도해 보고 싶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탐구 과정에 관한 대화를 나누고, 자료 수집을 돕기 위해 몇 권의 책을 추천해 주었다. 이 아이는 제임스 조이스의 '젊은 날의 초상'과 프란츠 파농의 '대지의 저주받은 사람들'을 읽고 영국 식민지였던 아일랜드와 프랑스 식민지였던 알제리 사회를 비교했다. '젊은 날의 초상' 속 어린 스티븐이 경험하는 부당한 폭력과 억압을 독립 후에도 아일랜드 사회에 내재한 '식민성'과 '수평 폭력'의 심리를 연결하여 해석하였고, 부당한 억압과 폭력에 노출된 '하위주체'들의 목소리를 왜곡하지 않고 표현하는 것이 식민지를 경험한 작가의 문제의식이어야 한다는 내용을 20페이지 정도로 썼다. 참고문헌의 해석 방식에 다소 의존하긴 했지만, '젊은 날의 초상'과 '대지의 저주받은 사람들'에서 참조해야 할 텍스트를 골라내고 26편의 국문영문 참고문헌 중 어떤 내용을 인용하고 어떤 지식을 합성할지는 모두 아이 스스로 결정해서 완성한 글이었다. 3년 동안 이 아이가 쓴 글 중에서 최고의 글이었다고 단언할 수 있었다. 논술 과목 담당 선생님도 수업에서 썼던 글보다 훨씬 나은 글이라며 감탄하였다. 좀 더 욕심이 나 발터 벤야민의 책도 추천했더니 열심히 읽고 북리포트를 제출했다. 추천해 준 책은 절대 대충 읽지 않는 학생이니 시간이 흘렀어도 첫머리의 메시지에 나와 있듯 발터 벤야민을 배우는 대학 강의가 반가웠을 거라 짐작한다.


이 아이뿐만 아니라 3년을 가르친 제자들 다수가 평생 독서를 실현할 수 있는 독서 근육을 키우길 희망했다. 이해하는 세계가 깊고 다양해지면 책을 읽는 즐거움이 배가될 것이란 믿음이 얼마나 실현되었을지 정확히는 알 수 없다. 3년간 이 아이들이 겪은 독서 활동에는 부족함도 참 많았다. '교육은 특정 단계에서 완성되는 것이 아니니까', '대학에서 더 나은 교육을 받고 더 나은 독서를 실천하면 되니까'와 같이 생각하며 교사로서 부족해서 미안했던 마음을 위로해 본다.


독서의 이유를 잘 이해해 주었던 아이. 자살특공대였던 주인공의 내적 갈등에 가슴이 계속 두근거렸다는 아이. 제임스 조이스의 '젊은 날의 초상'을 세 번이나 읽어야 했다는 아이. 고등학교 때의 공부가 얼마나 좋은 공부였는지 깨달았다고 말해 준 아이. 자신이 얼마나 괜찮은 사람인지 아직도 잘 모르고 있을 것만 같은 아이. 이 아이가 독서의 힘을 믿고, 현재의 태도를 유지한 채 세상의 끝을 넓혀갈 수 있는 사람으로 성장해 나가길 소망한다.

매거진의 이전글 지식보다는 태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