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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표 쓴 이선생 Apr 28. 2024

지식보다는 태도

<졸업생들에게 쓰는 편지> 2장

3년 전부터 다양한 부분에서 감사하다고 인사드리고 싶었어요. 영어로 글도 적을 수 있게 되었고, 영어 원서도 거부감 없이 도전할 수 있게 되었어요. 사회에 관심이 있다는 것도 영어 뉴스를 읽으며 재밌어하는 걸로 알게 되었고, 선생님께 들은 칭찬이 큰 원동력이 되어 나아갈 수 있었던 날도 많았어요.
- 졸업생의 편지 中



이 제자에 대한 기억은 2020년 6월 3일, 첫 등교일로 거슬러 올라간다. 전교생 기숙학교였기에 첫날부터 야간 면학이 시작되었다. 거리두기 규정 때문에 면학실을 이용할 수 없어 각 교실에서 자습을 진행했다. 중학생티도 아직 벗지 못한 아이들이 밤 11시까지 교실에 남아 공부해야 하고 나는 이 아이들을 관리 감독해야 하는 현실이 가혹하다고 느꼈다. 게다가 전염병이 가져온 완고한 사회 분위기가 학교라고 예외일 리 없었다. 아침부터 발열 체크에, 마스크 점검에, 거리 두기에, 전염병이 없던 시절보다 긴장감이 몇 배는 더 높았다. 나도 평소보다 더 피곤했지만, 아이들은 이 시간에 학교에 있어 본 적조차 없었으니 얼마나 피곤했을지 가늠하기 어려웠다. 뭘 공부해야 할지 모르는 표정이 태반인 와중에, 창문을 열어둔 채 복도를 왔다 갔다 하는 나와 제일 자주 눈이 마주친 학생이 있었다. 복도 창가에 앉은 채 똘망똘망한 큰 눈이 '저 집중이 안 돼요.'라고 말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집중될 리가 없지, 라고 속으로는 공감했지만, 으로 드러낼 수는 없었다. 슬슬 책상에 엎드리는 애들이 하나둘씩 생기고 있는데 그래도 안 자려고 버티는 모습이 가상했다. 이렇게 안쓰러운 감정으로 가득했던 첫날 이후 2년 반이 흘렀고, 이 아이는 감사하게도 졸업식 날 정성스러운 편지를 내게 전해 주었다.


발표 능력이 우수했던 학생이었다. 1장에서 자유 주제 포럼에 대해 언급한 적이 있는데,  학생은 '홈 스쿨링'을 소재포럼에 참여했었다. 짧은 시간이었음에도 자기 경험을 바탕으로 전개해 나가는 발표 과정논리 정연했고 청중을 집중하게 하는 성숙한 화법이 인상적이었다. 친구들이 어떤 질문을 할지 모르는 상황에서도 답변에 막힘이 없었다. 칭찬에 인색한 나도 좋은 발표였다고 피드백을 줄 만큼 의사소통 역량이 돋보였다.


반면 영어 성적이 늘 아쉬웠다. 성적도 성적이지만, 문법이 너무 약했다. 1학년 1학기에 실시했던 에세이 쓰기 수업의 마지막 과정은 일곱 가지 주제 중 하나를 골라 300자 이상의 에세이를 완성하는 것이었는데, 수업에서 배운 에세이의 3단 구성과 세부 요소(thesis, more than 2 arguments, evidence for each argument) 적절히 용했지만 문장 문법 오류가 발견되었다. 포럼에서 보인 논리적 소통 역량이 영어로 쓴 글에서는 전혀 나타나지 않았다. 본인도 문법이 약하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자기 객관화와 겸손의 태도를 갖추고 있었던 건 다행이었다. 수업 외 과제였던 'The Week'의 짧은 영문 기사 번역을 열심히 수행하던 모습과 2학년 시절 영문 단편소설 창작 팀 과제에 주도적으로 참여하던 모습에서 영어에 흥미를 잃지는 않았다는 점을 관찰할 수 있었다. 기다림이 좀 더 필요한 아이였다.


이 학생에 대한 가장 인상적인 기억은 3학년일 때로 남아 있다. '모리와 함께 한 화요일'이란 영어 원서로 1학기 동안 수업을 진행했다. 20대 시절 캐나다에서 우연히 고른 이 책을 한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읽었다. 문장 하나하나가 인생의 의미를 깨닫게 해 주었던 책이었다. 이때 느낀 감동을 아이들과 공유하고 싶었고, 아이들도 잘 따라와 주었다. 책을 거의 다 읽어가고 있을 때쯤, 이 아이가 나를 찾아와서 이렇게 말했다.


  "쌤, 번역본이랑 같이 보고 있는데 번역이 너무 마음에 안 들어서요. 제가 직접 번역해 봐도 될까요?"


이 책의 번역가가 들었다면 참 서운했을 말이었지만, 영어가 약점이었던 학생이 번역상의 아쉬움을 토로하는 건 교사인 나에게는 감탄할 만한 이었다. 게다가 번역본으로 읽으면 원서로 읽는 감동이 와닿지 않는다는 소감도 밝혔다. 가끔 주변 선생님들에게 얘기했던 내 생각과 똑같아서 더욱 놀라웠다. 영어를 공부하는 이유 중 하나가 번역을 거치지 않고 영어권 출신 저자의 감성과 사고를 생생하게 받아들일 수 있다는 점이다. 이 아이는 어느새 이체득하고 원저자의 언어로 읽는 즐거움을 깨닫고 있었다. 전문 번역가가 오랜 시간 공들여 번역한 글이었겠지만, 이 아이의 의견도 존중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한 챕터 정도는 시도할 만하다고 조언하였고, 기말고사 후 아마추어 번역가의 첫 번역작이 제출되었다.


수행평가도 아니었고 자발적인 추가 과제 시도였기 전문 번역가를 향한 도전을 십 대의 객기로만 치부할 수는 없었다. 나도 영어 원서를 읽고 번역할 수 있는 실력이 있단 걸 교사에게 인정받고 싶었던 걸까. 실제로 3학년 때는 영어 성적이 많이 개선되기도 했다. 그런데 성적을 떠나서, 스스로 번역해 보겠다는 아이에게 훌륭한 생각이라고 칭찬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그 결심'감동을 주는 번역이 어려울까'라는 호기심과 '더 좋은 번역을 해 보고 싶다'라는 향상심이 깃들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호기심과 향상심의 태도를 갖추는 것이야말로 달성하기 어려운 교육적 지향점이었다.


3년간 아이들에게 자주 했던 말이 있다. 좋은 대학에 들어가는 것보다 대학에서 잘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이. 학교에는 소위 명문 대학에 들어갈 학생보다 평범한 대학에 들어가게 될 학생들이 더 많을 수밖에 없다. 따라서 학업적으로 우수한 소수보다 평범한 다수를 어떻게 잘 가르치고 키워낼 수 있느냐 하는 것이 교사들이 더 자주 마주치게 되는 고민이다. 물론 당장 입시를 외면할 수는 없다. 수능 공부가 대학 공부와 상관없으니 할 필요가 없다는 의미도 아니다. 고교 3년 동안 문제 풀이만 하는 공부가 대학에서 주도적인 인재로 성장하기엔 부족하기에 평범한 학생들에게도 문제 풀이 외에 대학에서 유용할 다른 유형의 교육을 체계적으로 조직하고 가르칠 필요가 있다는 이었. 좋은 대학에 들어가기 위한 교육이 아니라 대학에서 잘할 학생을 키우기 위해 교육하다 보면 입시 결과도 알아서 따라오는 경우가 많았다. 문제는 어떤 교육이 대학에서 잘하는 학생을 만들어 주냐는 것이었다.


도 교육청 파견 근무 시절, 교사 대상 직무 연수 강사로 전직 교사이자 입학사정관이었던 진동섭 선생님을 강사로 초청했던 적이 있었다. 입시와 교육과정의 최고 전문가 중 한 분이었다. 5년 차 교사이던 시절, 이분의 인터뷰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대학 공부와 고등학교의 교육에 대해 생텍쥐페리의 글을 인용하면서 설명하셨는데 큰 영감을 받았다.


“If you want to build a ship, don’t drum up the men to gather wood, divide the work, and give orders. Instead, teach them to yearn for the vast and endless sea.”

(배를 만들고 싶다면, 사람들이 나무를 모으고 일을 분담하도록 시키는 대신, 저 넓고 끝없는 바다를 동경하게 하라.)


대학 공부는 정해진 범위가 없을 때가 많고 방법을 알려주지도 않기 때문에 자신의 간절함과 열망으로 공부하려는 태도가 중요하다는 것이 요지였다. 바다에 대한 동경으로 스스로 바다에 나가려는 학생이 될 수 있도록 고등학교에서 가르칠 수 있다면 대학이 원하는 인재가 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물론 바다를 동경하게 만드는 방법까지 알 수는 없었다. 막연하기는 했지만, 묘한 울림이 있었다.


나의 대학 생활은 참 보잘것없었다. 배를 만들 줄도 몰랐고, 바다로 나가야 할 이유도 알지 못했다. 1학년 시절 F 학점 9개를 받고, 2학년 때 2개를 추가하여 F11이 되었다. 연속된 학사 경고로 제적 위기에 몰리기도 했다. 나태했을 뿐만 아니라, 대학 수준의 공부를 소화할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리포트를 제출하라고 하면, 표절과 베껴 쓰기가 일상이었다. 내가 신청한 강의의 지식을 왜 공부해야 하는지 설득되지도 않았다. 호기심도 없었고, 향상심도 없었다. 그렇게 정체된 대학 생활을 마치고, 교사가 되어서야 나의 태도가 문제였단 걸 깨달았다. 생텍쥐페리의 글과 나의 대학 생활에 대한 반추가 어떻게 가르쳐야 할지 힌트를 주었다.


이때부터 수업이나 동아리 등의 활동을 준비할 때마다 준비 과정이 굉장히 길어졌다. 지식을 궁금하게 만들고 이러한 지식을 경험하고 이해하는 것이 왜 중요한지 설득력 있게 전달하고 싶었다. 니체의 영문판 서적을 발췌하거나 영문 학술지를 편집해서 준비하는 등 난도 높은 자료도 서슴없이 활용했다. 자료는 어려워도, 쉬운 언어로 설명하면 어느 정도는 수용되어 대학 공부를 위한 자산으로 쓰일 수 있을 거라 믿었다. 장기간의 프로젝트 활동도 장려했다. 장기간이어야 여러 시행착오를 거치며 문제 해결 경험이 쌓일 것으로 예상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쌓인 문제 해결 경험이 대학에서 맞닥뜨리게 될 불확실한 상황에 대해 '이렇게 하면 되지.'라는 경험적 확신과 향상된 자신감을 제공해 줄 거라 기대했다. 이러한 시도 덕분에 대학 공부에 도움이 되는 태도가 어떻게 형성될 수 있는지 어렴풋하게나마 감이 잡히기 시작했다.


이런 경험이 누적되면서 '지식을 얼마나 알고 있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알고 싶어 하느냐가 대학에서 잘할 학생을 결정하게 된다'라는 관점을 갖게 되었다. 특히 호기심과 향상심의 수준이 중요하다. 똑같은 수업을 들어도 영감을 얻는 학생과 아닌 학생의 차이는 호기심의 수준에서 비롯된다. 교과서 속 지식을 당연하게 여기지 않고 왜라는 물음을 던질 수 있는 호기심은 특별한 자질이다. 그런데 호기심만 잔뜩 있고 향상심이 없다면 실천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향상심이 있는 학생들은 반복훈련을 과소평가하지 않는다. 야구선수가 자기 스윙을 만들 때까지 수천 번, 수만 번 배트를 휘두르는 것처럼, 지식과 기능을 자기 것으로 만들기 위해 반복하고 또 반복하는 일을 자기 의지로 해낸다. 교사나 강사가 이해시켜 주는 순간에 의존하기만 하면 그 지식이 필요할 때 정작 꺼내 쓰지 못한다는 사실을 이해하고 있다. 그런데 향상심은 보통 인간을 불편하게 만들기 때문에 편리한 공부에 익숙한 학생들은 향상심의 수준이 높아지지 않는다. 향상되지 않기에 호기심의 수준도 제자리일 때가 많다.


이해관계에 따라 어떤 행동을 취할지 결정하는 학생들이 다. "이거 수행평가예요?"라고 묻고 아니라고 하면 등한시한다. 이런 태도는 평가되지 않는 과제도 열심히 하려는 태도에 비해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다. 2021년, 2학년 1학기에 "Create a fictional setting for your story, and write a scene full of vivid description. (당신의 이야기를 위한 허구의 배경을 만들고, 생생한 묘사가 가득한 장면을 써보세요)"라는 배경 묘사 작문 과제를 낸 적이 있다. Pass/Fail의 2단계 평가였고, 최종 과제인 단편소설 창작 이전 과정에서는 문학적 글쓰기에 대한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아 결정적인 오류만 없으면 문장의 수준은 크게 고려하지 않고 Pass를 주었다. "There was nothing on the street. It was as if no one had ever lived. All of the street lamps were off or flickering. (거리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마치 아무도 살지 않았던 것처럼. 모든 가로등은 꺼져 있거나 깜박거렸다)" 정도의 표현만으로도 충분하다고 판단하여 Pass를 주었는데, 한 아이가 이렇게 작성하여 제출했다.


"That night, there was no other thing floating in the sky. In the sea, where all living things had covered up their traces, only black waves—as if to say that they were the masters of the sea—silently but fiercely rushed to each other and dispersed again. However, their time did not last long. An uninvited guest crossed the Black Beach and headed for the sea. Fragments of a broken glass bottle rolled around beneath his unhesitating steps. After what seemed a long time, he finally stopped in front of the rushing waves, bent down, and lifted something. A pair of white shoes. Strangely pure white."

(그날 밤, 하늘에는 다른 어떤 것도 떠 있지 않았다. 모든 생명체가 자취를 감춘 바다에서는, 마치 바다의 주인인 듯, 검은 파도들이 조용히 그러나 거센 힘으로 서로 부딪치며 다시 흩어졌다. 그러나 그 시간은 오래가지 않았다. 초대받지 않은 손님이 검은 해변을 건너 바다로 향했다. 주저하지 않는 그의 발걸음 아래 깨진 유리병 조각이 굴러다녔다. 긴 시간이 지난 후, 그는 마침내 몰아치는 파도 앞에서 멈춰 서서 몸을 숙이고 무언가를 들어 올렸다. 하얗게 눈부신 신발 한 켤레. 이상하리만큼 순백의 색이었다.)


파도의 특성과 의인화를 결합하고 검은 해변과 하얀 신발의 시각적 이미지를 대비시켜 싸늘한 긴장감을 자아낸 묘사였다. 다른 아이들과 함께 읽으면 좋겠다고 여겨 수업 시간에 우수 사례로 소개했다. 88%의 학생들이 Pass를 받았으니 굳이 이 정도로 문학적 상상력을 발휘하고 어떻게 표현할지 고민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 과제를 구상하며 이상적으로 생각했던 수준의 결과물이 나와버렸으니, 칭찬을 안 할 수 없었다. 평소 평가되지 않는 과제에서잘하기 위한 향상심을 관찰할 수 있었던 아이였다. 졸업하고 나서 이 아이의 어머님으로부터 문자를 받은 적이 있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여전히 바쁘게 학생들 가르치시느라 애쓰고 계시겠지요^^

(중략)

선생님으로부터의 배움 덕분에

영어교수의 요청?으로 OO의 글들이 레퍼런스로 쓰이기도 한다고..

선생님이 제대로 가르치신 결과예요."


누가 시키지 않아도 더 나은 번역을 고민하고 실천해 보려는 태도. 평가되지 않는 것도 잘 해내려는 태도. 호기심과 향상심의 태도. 이런 태도와 비교해  때, 성적을 잘 받기 위해서만 공부하는 태도나 공부를 입시의 도구로만 간주하는 태도가 얼마나 인간의 잠재력을 제한하는 것인지 성찰해 보아야 한다. 나는 이제 학교를 떠났지만, 무엇이 아이들을 위대하게 만드는 태도인지에 관한 사회의 관점을 학교가 긍정적으로 변화시켜 내길 바란다.


지식보다 태도가 중요한 것이라는 믿음을 검증해 준 두 아이에게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졸업 후에 학교로 찾아와 인사를 나누고 대학 생활에 대해 잠시 대화한 적이 있었다. 앞으로 언제 또 만날 수 있을지 알 수 없는 미래이지만, 이 아이들의 삶이 어딘가에서 무척 빛날 거 같다는 나의 상상은 선명하다. 세상을 향한 제자들의 호기심이 특별하게 사용되는 시간이 오길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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