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삐삐 May 28. 2024

이런 게 물리치료사야?

“쌤, 여기서 일하다 보면 진짜 별의별 사람들이 다 있어요. 방금 들어온 저 아저씨 보이죠? 조심해요.”

“왜요? 저 아저씨랑 무슨 일 있었어요?”

 “제가 이 병원 들어온 지 얼마 안 됐을 때, 저 아저씨 치료한 적 있었거든요. 치료받고 나서 일어나더니 “이딴 게 치료야? 너 말고 다른 사람 데려와!”라고 나한테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난리도 아니었어요”

선생님은 본인에게 손가락질하며 불같이 화를 내는 아저씨를 흉내 냈다.

“진짜요? 저분 엄청 조용하시던데… 말도 안 돼…”

“아 그때 너무 화나서 얼굴 시뻘게지고 사람들 다 쳐다보고… 어휴 다시 생각해도 열받네.”

그 일을 회상하던 선생님의 얼굴은 점점 빨개졌고, 자리를 피해서 담배를 피우러 나가셨다.

그 선생님이 말한 환자는 내가 치료할 때마다 아무 말 없이 받고 가시던 아저씨였다.

항상 과묵하시던 아저씨가 병원 로비에서 소리를 지르셨다니 갑자기 사람이 다르게 보였다.

그 이야기를 듣고 나니 ‘나한테는 안 그러셔서 다행이다’하는 마음이 드는 동시에 나한테도 언제 돌변할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생겼다.

일명 ‘진상 환자’는 주위에서 저 사람은 조심해라. 이런 일이 있었으니 무슨 말을 들어도 그러려니 해라. 등등 아무리 예방주사를 맞아도 항체가 생기지 않는다.

늘 생각지도 못한 방식으로 사람 속을 뒤집어 놓는다.

진상 환자에게 한 번 당하면, 그 뒤로 아무 일이 없더라도 내 마음속에는 이미 ‘저 사람은 진상 환자야.’라는 각인이 새겨진다.

그 뒤로는 병원에 오기만 해도 그 사람은 나한테 미움을 받는다.

(겉으로 티는 못 내고, 속으로만 미워할 수밖에 없는 처지다.)

하지만 그 사람도 ‘누군가에게는 좋은 사람이고, 소중한 사람 일 텐데.’라고 생각하면 미워하던 마음도 서서히 가라앉는다.

어느 날에는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난 이런 취급을 받아도 돼? 저 사람은 나한테 왜 그래?’

‘자기 손녀가 밖에서 이런 일을 당했다고 해도 아무렇지 않으실까?’

점점 화가 나다가, 결국 마지막에는 내가 부족한 탓이지. 하며 자책하는 나를 발견했다.

물론 좋은 환자분들도 많다.

치료를 정성껏 해줘서 고맙다고 하시며 다음에는 까까를 사 오시겠다는 할아버지, 선생님이 너무 친절해서 병원 홍보부장을 하고 싶다 하신 아주머니 등 생각만 해도 웃음이 나는 환자분들도 많다.

사람에게 상처받고, 사람에게 위로받는 게 참 아이러니하다.

그러나 병원생활에 지쳤던 나는 환자가 건네는 칭찬은 작게 들리고, 비난은 큰 소리로 들렸다.

나는 남에게 내 이야기를 잘하지 않는다. 슬픈 일도, 기쁜 일도 남에게 이야기하는 게 익숙하지 않다.

내가 나를 가장 잘 아니까 나를 잘 이해해 줄 사람은 나밖에 없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막상 내 이야기를 해보려고 해도 누군가에게 말한 적이 없어서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가끔 누군가에게 내 마음을 털어놓고 싶어지면, 나는 글을 썼다.

그렇게 내가 쓴 글에는 병원에서 일하면서 겪은 일들이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했다.

하루에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기도 하고, 많은 사람들이 오니까 그만큼 다양한 일이 생겼다.

병원에서 살아남기는 내가 병원에서 겪었던 희로애락을 담은 이야기이다.

환자 때문에 도망치고 싶었지만, 또 환자 덕분에 버틸 수 있었던 나의 짧은 병원생활을 이야기하고 싶다.

고객에게 상처받고 또 위로받는 것은 다양한 서비스 직종들이 겪는 일이지 않을까?

많은 감정 노동자들이 공감하고, 서로 위로할 수 있는 글이 되었으면 좋겠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