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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삐삐 Jun 04. 2024

투명인간 물리치료사

‘나도 도수치료를 해보고 싶다.’라는 생각에서 시작됐다.

물리치료사로서는 신입이 아니었지만, 도수치료 경험은 없었기 때문에 신입이었다.

이런 걸 중고 신입이라고 하나?

도수치료를 하기 위해 이직을 준비했다. 신입도 도수치료를 배우면서 시작할 수 있는 병원에 들어가게 되었다. 동네에 있는 작은 정형외과였다. 이 병원에는 ‘서비스 매뉴얼’이라는 치료가 있었는데 우리끼리는 줄여서 매뉴얼이라고 부른다. 물리치료를 받으러 오는 환자들에게 서비스로 10분간 근육을 풀어주는 일종의 마사지로, 도수치료 맛보기라고 생각하면 된다. 공짜로 받을 수 있는 치료였기 때문에 단골 환자들은 매일같이 온다. 매뉴얼을 10분씩 매일 받으면 40분에 10만 원짜리 도수치료와 다름없다고 생각하는 거 같다.

(그럼, 누가 도수치료를 돈 주고서 받으려고 할까?)  

매일 오후에 장바구니 캐리어를 끌고 오는 할머니가 있었다.

“새로 왔나 보네? 열심히 해 “

”난 말랐는데도 아가씨가 하면 하는 거 같지가 않아. 힘이 왜 이렇게 약해 “

”그래도 그만두지 말고 열심히 해 취업이 쉽지 않잖아”

오실 때마다 이런 말들을 하시는데 처음에는 손녀 보는 마음으로 해주시는 말이겠거니. 새겨들었다.

그러나 매번 아무 느낌이 없다. 약하다. 누르는 것 같지가 않다는 말을 하는데 등치도 있고 힘도 센 편인 나는 약하다는 말을 살면서 그 할머니한테 처음 들어봤다.

분노의 마음 반, 간절한 마음 반으로 온 힘을 쏟아부었지만, 그 할머니에게 역부족이었다.

일하다가 우연히 병원 입구에 세워진 할머니의 장바구니 캐리어만 봐도 숨이 확 막히고, 짜증이 솟구친다.

매뉴얼은 순서대로 돌아가면서 하는 거라 남한테 넘길 수도 없다. 내 차례가 오면 해야 한다.

내가 하게 되면 싫은 티를 팍팍 내시는 할머니, 눈칫밥을 먹이신다.

저도 싫어요, 할머니.

어느 날 내가 할 차례에 그 할머니가 왔다.

시작하기 전부터 이렇게 눌러보라는 둥 저렇게 눌러보라는 둥 입을 쉬지를 않으셨다. 엎드려서 말하는 게 쉽지 않으실 텐데 힘이 넘치신다.

‘질 수 없지. 오늘 한 번 으깨보자’ 나는 마음속으로 다짐하고 땀을 뻘뻘 흘리면서 치료하고 있었다.

그때 건장한 남자 선생님이 다른 환자 치료를 위해 내 옆자리에 자리를 잡았다.

갑자기 할머니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내가 깜짝 놀란 사이에 할머니는 고개를 옆으로 돌려 말했다.

 “나 이 아가씨가 하면 받는 거 같지가 않아. 이 아가씨한테 받기 싫어. 선생님이 해주면 안 돼?” 라며 나를 앞에 두고 다른 사람을 치료하고 있던 선생님한테 말하는 거다.

아씨 쪽팔려. 힘이 쫙 빠졌다.

“안 돼요. 저는 이 분 치료해야 돼요.”라고 남자 선생님이 거절하자 할머니는 아무 말 없이 다시 엎드렸다.

차라리 나한테 안 받겠다고 말하길 바랐다. 아무 느낌도 나지 않는다면서 왜 계속 받는 걸까.

나를 투명인간 취급하는 이 할머니에게 화가 났지만,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하던 치료를 계속해야 했다.

치료가 끝나고 앉아있는데 남자 선생님이 오더니 그 환자에게 가서 한마디 했다고 말한다.

기죽은 신입이 신경 쓰이셨나 보다.

평소에도 환자들에게 할 말은 하시는 타입이어서 마음속으로 부러워했던 선생님이었다.

이 두 사람이 무슨 말을 주고받았을지 궁금해하며 물었다.  

“사람 앞에 두고 뭐 하시는 거예요? 만약에 저 선생님이 할머니 치료하기 싫다고 하면 기분 좋으세요?”

”그럼 난 이 병원 안 오면 되지!!!!! 상관없어!!!!” 하며 소리를 지르셨다고 했다.

그 할머니는 원래 말이 안 통한다며 잊어버리라고 했다.

하지만 1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잊히지 않았다.

이 할머니는 이후에도 매일같이 온다. 매일매일 조금씩 내 자존감을 뜯어간다.

나의 내면은 한편으로는 약해지지만, 한편으로는 강해진다.

웬만한 진상은 별 타격이 없어졌다.

맷집을 강하게 길러준 할머니에게 고마워해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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