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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삐삐 Jun 26. 2024

내 눈앞에 나타난 아수라 백작

“하~ 오늘 진짜 바쁠 거 같은데요?”

병원에서 일주일 중 가장 바쁜 요일은 바로 토요일이다.

평일에는 시간이 없어서 병원에 못 오던 직장인들도 토요일이 되자 병원을 찾는다.

토요일 아침,

병원 대기실에는 사람이 바글바글했고, 몇몇 사람들은 앉을 곳이 없어 우두커니 서 있는다.

심지어 최근 물리치료실은 4명 중 2명이 그만둬서 인력도 부족했다.

남은 사람이라고는 남자 선생님과 나, 둘 뿐이었다.

진료가 시작되기 전, 남자선생님은 혼자 골똘히 뭔가를 생각하더니 나에게 말했다.


“쌤, 오늘은 매뉴얼* 하지 말죠. 둘이 충격파도 하고 전기치료도 하려면 바쁠 거 같아요…”

“그럼 매뉴얼 받으셨던 분들은 뭐라 하시지 않을까요?”

“어쩔 수 없어요. 오늘 우리 둘이 매뉴얼까지 하면 힘들어 죽어요.”


그렇게 우리는 매뉴얼을 제외하기로하고, 벌떼처럼 몰려드는 환자들을 치료하며 정신없는 토요일을 보내고 있었다.

“아 언제까지 기다려요? 물리치료를 먼저 해주든지. 주사를 먼저 놔주든지. 사람 가만히 앉혀놓고 뭐 하는 거야!”

한 아주머니가 간호조무사 선생님께 화를 내는 소리가 병원을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아이고. 누가 또 화나셨구나.’

“주말이라 사람이 많아요. 어머니 방금 오셨잖아요. 먼저 오신 분들도 아직 못 받으셨어요.”

간호조무사 선생님이 담담한 목소리로 아주머니의 불만에 대응했다.

“아니. 뭐라도 해줘야 할 거 아냐. 이렇게 가만히 앉혀둘 거야?!”

나는 그 모습을 쳐다보다가 간호조무사 선생님과 눈이 마주쳤다.

선생님은 나만 보이게 입을 삐죽이더니, 아주머니의 처방차트를 나에게 내밀었다.

“쌤, 이분 물리치료 좀 먼저 해주세요….”

“넵.”

나는 아주머니가 더 화나기 전에 얼른 물리치료실로 불렀다.

“환자분, 이쪽으로 들어오세요~”

“오늘 저거 안 해줘요?! 나 그거 받으러 오는 건데?”

아주머니는 손가락으로 매뉴얼 하는 곳을 가리키면서 인상을 찌푸렸다.

“아, 오늘 저희가 사람이 부족해서 저거 못 해 드려요. 다음에 오시면 해드릴게요~”

나는 최대한 안타까운 표정을 지으며  아주머니에게 말했다.

아주머니의 미간에는 주름이 잡혔고, 짜증 섞인 목소리로 불평불만을 털어놓았다.

“아니. 내가 지금 얼마나 기다렸는데 물리치료를 먼저 해주든지 사람 가만히 앉혀놓고 시간 버리게 하더니 저것도 안 해주고. 이 병원 안 되겠네. 어휴 진짜 뭐 하는 거야!”

“그러니까요.. 죄송해요.. 선생님들이 갑자기 그만두셔서 사람이 없어요..”

잔뜩 화가 난 아주머니는 물리치료실 침대에 앉아서 자신이 얼마나 기다렸고, 이 병원이 얼마나 효율적이지 못한 지를 하나하나 짚어준다.

나는 아주머니의 이야기에 고개를 끄덕이며 앞에 서서 한참 동안 벌을 섰다.

그때 우리가 있는 곳의 커튼이 착- 쳐지더니 남자 선생님이 들어왔다.

‘바빠 죽겠는데 얘는 왜 안 나와?’ 생각하며 들어오셨을 거다.


남자 선생님은 조금 짜증이 섞인 목소리로 아주머니에게 말했다.


“환자분! 저희가 오늘은 사람이 부족해서 못 해 드린다니까요? 다음에…”

“어머!! 선생님~~~”

‘응?’

나는 남자 선생님을 보자마자 아주머니의 눈이 반짝하며 얼굴에 함박꽃이 피는 것을 목격했다.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것처럼 얼얼하다.

“아니~~ 나 선생님 기다렸잖아~~~ 어디 갔었어! 나 선생님한테 저거 받으러 온 건데~~ 오늘 못 해준다고 하구~~”

‘아주머니, 갑자기 이렇게 살랑살랑한 목소리로 말씀하시기 있어요?’

남자 선생님도 아주머니의 반응에 적잖이 당황한 얼굴이다.

남자 선생님은 눈동자를 굴려 내 표정을 살핀다.

아주머니가 화내는 소리를 밖에서 듣다가 나 대신 한마디 해주러 들어왔는데 아주머니가 자신을 반겨주니 얼마나 당황스러울까?

나는 얼빠진 표정을 숨기지 못하고, 두 남녀가 다정하게 대화하는 것을 가운데에 서서 멍하니 보고 있었다.


“오늘은 진짜 못 해드려요~ 다음에 오시면 더 잘해드릴게요!  오늘은 전기치료 잘 받고 가세요~”

“알겠어요~~ 어쩔 수 없지~~ 나 다음에 오면 진짜 잘해줘야 해~?”

방금까지 나한테 인상 팍팍 쓰면서 짜증 내시던 분이 이렇게 싹 바뀌다니.

나는 기가 차서 웃음이 나왔다. 내 눈앞에서 아수라 백작을 볼 줄이야.   


‘이렇게 재밌는 공연을 내가 공짜로 봐도 되는 거야?’


그렇게 남자 선생님이 아주머니를 진정시키고 나서,  우리는 커튼을 치고 나왔다.

나는 남자 선생님을 쳐다보며 허탈하게 웃었다.

남자 선생님은 내 어깨를 토닥토닥 쳐줬다.

사람은 단편적이지 않다더니, 그 말이 딱 맞아요.

제가 오늘 두 눈으로 똑똑히 봤거든요. 하하하





*매뉴얼 : 병원에서 환자에게 서비스로 해드리는 마사지. 2편 ‘투명인간 물리치료사’에서 좀 더 자세한 설명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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