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주 전에 친한 후배를 만났었다. 회사를 벗어나 야인이 되기로 선택한 이후로도 꾸준히 연락을 이어가는 인연이 내게도 여럿 있는데 그중 가장 빈도 높게 만나고 있는 친구이다. 그와의 만남이 늘어나는 만큼 함께 공유하는 경험도 늘어나고 있다. 매번 볼 때마다 즐겁고 편안한 시간을 보냈음은 말할 것도 없다. 덕분에 알지 못했던 맛집도 알게 되고 겪어보지 못했던 소소한 그러나 재미있는 삶의 경험을 차곡차곡 쌓아가고 있는 중이다. 그의 안내가 없었더라면 그 작은 몇 가지 재료가 들어가지도 않은 꼬마 김밥이 왜 마약 김밥으로 불리우는지도 알 수 없었을 것이다. 그의 인도가 없었더라면 인천에 이렇게 이색적인 수제맥주 양조장이 있는지도 몰랐을 것이다. 물론 내가 이런 곳들을 알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그런 곳들은 계속 나의 인지 밖에서는 실존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의 인지 밖이라는 것은 내가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기 때문에 결국 그런 곳들은 내 세상에는 존재하지 않는 것과 다름이 없다고 해야 할 것이다. 실존 하지만 내게는 없는 것과 같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무언가를 알지 못하면 그것은 내가 아는 혹은 내가 인식하는 세상에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그 친구 덕분에 내 세상이 확장되고 있다. 30년간 나 스스로도 어이없을 정도로 단조롭게 시계추처럼 집과 회사만 오가며 삶을 채워왔기 때문에 내가 경험할 수 있었던 세계는 매우 제한적이었다. 그래서인지 그 길고 긴 30년간의 생활중 내 기억에 특별한 감정과 함께 깊게 남아 있는 것은 드문것 같다. 원래 어떤 것이 기억에 남으려면 깊은 인상을 받아야 하는데 회사 생활이라는 것이 늘 하던 것의 반복이었기 때문에 기계적으로 내 뇌 속에 각인이 되었을 뿐이지 어떤 깊은 인상이나 느낌이 함께 심어지지는 않았기 때문이리라. 좀 심하게 이야기 하면 하루 하루 생산량과 매출액만 계산하면서 30년을 보낸 느낌이다. 그래서 야인이 된 이후에도 꿈속에서 매출액 걱정을 하기도 한다. 이런 종류의 기억 혹은 인상을 특별하다고 할 수는 없을 것 같다.
그리고 회사 생활중 방문한 곳도 회사와 연관된 곳들이 거의 대부분이기 때문에 역시 내 기억에는 그리 인상이 깊게 남아 있지는 않은 것 같다. 굳이 꼽자면 출장 갔었던 대만의 TSMC 사내에 스타벅스가 있었던 것과 미국 쿠퍼티노에 있는 애플의 사옥에 방문했을 때의 기억 정도이다. 일을 하기 위한 출장이었지만 세계 최고의 회사에 방문 한 것이기 때문에 그나마 강한 인상이 여전히 남아 있는 것이리라. 일 그것도 맡은 과업의 진도 관리를 위한 점검을 받으러 간 시험대의 자리였기 때문에 결코 편한 자리는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기억에 남아 있는 것은 앞서 언급한 각 사의 특별한 지위 때문일 것이다.
그래도 나는 회사를 다니는 동안 회사를 꽤 좋아했다. 좀 과하게 표현하면 회사에 대한 애정도 많이 있었다. 회사돈을 내돈처럼(아주 가끔은 아니었지만) 생각했었다. 좋은 사람들이 비교적 내 주위에 많았고 일도 나와 적성에 잘 맞았기 때문일 것이다. 회사는 내게 비교적 나쁘지 않은 근무 여건을 제공해 준 멋진 공간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내 기준에서 내게 주어진 노동 강도도 그리 높지 않았다(물론 높지 않은 노동 강도는 보상 수준에 정확하게 반영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게 남아있는 회사 생활에 대한 기억은 앞서 언급한 몇 가지를 빼면 흐릿하기만 하다. 아무리 좋았어도 회사는 사회 생활을 하는 곳이고 결국 경제 활동을 위한 수단이라는 본질적인 존재였기 때문이리라. 즉 이권이 개입된 관계였다는 것이다. 이권이 개입되어 있다고 해서 그런 관계 속에서 쌓이는 경험이 전부 무가치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권이 관계되어 있지 않은 관계 속에서 발생하는 경험과는 피할 수 없는 차이가 있는 것이 분명하다. 이권이 없음에도 어떤 관계를 이어가려면 뭔가 매개체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 매개체의 존재 유무가 바로 둘의 차이다.
앞서 언급한 후배와는 당연히 어떠한 이권도 관련되어 있지 않다. 단순하게 사람대 사람으로서의 관계만 정립이 되어 있다. 정서적으로 비슷한 점도 많고 따라서 서로 생각이 일치하는 부분이 많아서 자연스럽게 관계가 이어지고 있는 것이고 따라서 이권이 없어도 그 관계가 지속적으로 이어지고 있고 앞으로도 그럴 가능성이 매우 높은 것이 아닐까 한다. 그리고 그렇게 되도록 노력할 것이다.
내 관점에서 그 친구는 내게 다양한 경험의 기회를 만들어 주었다. 열거하기 어려울 정도이다. 그리고 최근에 만났을 때에는 일정을 소화하고 헤어지면서 이렇게 말했다. '혹시 저녁에 다시 잠시 댁에 들릴지도 모르는데 집에 계실 건가요? 어디 나가시는지요 ?' 물론 일정이 없었기 때문에 집에 있을 것이라고 답하고 손을 흔들고 헤어진 후에 집으로 들어왔다. 집에 돌아와서는 곧 그와의 마지막 대화를 잊고 있었는데 초저녁에 다시 그의 전화가 왔다. '안나가셨지요? 지금 잠깐 지하 주차장으로 와 주세요. 잠깐이면 됩니다'. 전에도 우리집 근처에 왔다가 들렸다면서 '지방에 간 김에 몇 병 사온 막걸리' 혹은 '집에서 담근 식혜'를 나눠줘서 맛있게 먹은 적이 있었고 식혜를 너무 맛있게 먹었다는 나의 말에 또 하게 되면 가져 오겠다는 말을 했기 때문에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갔다.
이번에는 가슴에 큼지막한 흰색 자루를 안고 얼굴에는 미소를 띄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방금 도정한 올해 햅 쌀이 좀 생겨서 맛이나 보시라고 가져왔습니다' 적지 않은 양이라서 우리 두 부부가 한동안은 먹을 수 있는 양이었다. 뜻밖이기도 하고 너무 고맙기도했지만 당시에 나는 고맙다는 말 밖에는 못했고 그 친구는 미소띤 얼굴로 차를 몰고 쌩하고 바로 돌아갔다. 그의 행동은 친한 사이에서 충분히 전할 수 있는 정깊은 나눔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더 감사한 것은 그와 동시에 무엇보다 이번 나눔은 내 가슴속에 너무도 깊게 베어 있었던 그러나 나도 모르게 지난 수십년간 잊고 있던 행복했던 경험을 일깨워줬다는 측면에서 더 강력한 나눔이되었다. 지극히 평범한 햅 쌀이고 마트에 가면 그리 어렵지 않게 구입할 수 있는 햅 쌀이지만 '자루에 담긴 갓 도정한 햅 쌀'은 나를 40년전의 기억 속으로 돌려 보내기에 충분했다. 그 햅 쌀은 집에 돌아오자 마자 40년 전의 한 순간으로 나를 광속이동시켰다.
'다른 것은 몰라도 쌀 만큼은 좋을 것을 먹어야 해'
먹을 거리가 풍성하지 못했던 80년대에 학창시절을 보냈던 내게 어머니가 자주하시던 말이다. '다른 것은 몰라도 쌀 만큼은 좋을 것을 먹어야 해'. 물론 형편이 좋은 집에서는 좋은 반찬을 먹었겠지만 당시에는 형편이 넉넉한 집이 그리 많지 않았고 우리집도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끼니를 걱정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잘 차려 놓고 먹을 정도의 형편도 아니었다. 그래도 좋은 햅 쌀값을 감내할 정도의 형편은 되었기 때문에 적어도 쌀 만큼은 제일 좋은 것을 사다가 식사를 준비하셨던 것이다. 난 지금까지도 당시에 먹었던 찰지고 쫀득쫀득하고(찰지다는 말과 비슷한가?) 풍미가 짙은 밥을 먹어본 적이 별로 없다. 쌀의 품종이 기억나지는 않지만 당시에도 존재했던 스탠 압력 밥솥의 압력 신호추가 힘차게 돌아가는 소리는 명확하게 기억한다. 물론 그 스탠압력밥솥 속에서 '제일 좋은 쌀'이 들어 있었다. 요즘의 전기 압력 밥솥에도 동일한 기능의 신호추가 달려 있고 따라서 비슷한 소리를 내기 때문에 둘의 차이는 거의 없겠지만 어쩌면 40년전 가스 레인지 위에서 그 신호추가 더 힘차게 돌아갔기 때문에 내 기억에 더 선명하게 남아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럴리는 없겠지만 말이다.
물론 좋은 한식집에서 혹은 나름의 철학을 가지고 식당을 운영하는 작은 맛집에서 맛난 쌀 밥을 먹었던 기억은 가끔 있긴 하다. 지금은 폐업한 인천 효성동 골목에 있는 '더 고기'라는 고깃집이 바로 그 나름의 철학을 가지고 밥을 제공했던 식당이었다. 다시 가고 싶지만 이젠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어 아쉬울 따름이다. 이런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면 어느 식당을 방문하건 거의 대부분은 적당한 품질의 쌀로 지은 밥을 먹었을 뿐이다. 그리고 식생활의 변화에 따라서 쌀의 소비량이 줄어드는 속도에 비례하여 나 역시 쌀 대신에 면 종류를 소비하는 경우가 많아졌기 때문에 양질의 쌀로 지은 밥을 먹는 경우는 매우 드물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나는 찰밥을 좋아한다. 그래서 지금도 밥을 할 때면 현미를 주로 넣지만 거기에 간혹 찹쌀을 자주 섞어서 밥의 찰진맛을 즐기곤 한다. 아마도 오래 전에 어머니가 해 주시던 쫀득쫀득하고 찰진 밥에 대한 기억이 나의 머리와 가슴에 깊게 새겨져 있기 때문에 나도 모르는 사이에 찰진 밥을 좋아하게 되었을 것이다.
사실 그 당시의 '가장 좋은 쌀로 지은 맛난 밥'에 대한 기억이 강하게 남아 있는 것은 사실 밥 이외의 반찬에서 특별한 경험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일 것일지도 모른다. 가정 경제를 운영하시는 어머니가 밥상의 주인공인 밥에 대부분의 에너지(돈)을 쏟았기 때문에 반찬들은 지극히 평범했고 따라서 내 기억에 깊게 남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어머니의 정성이 들어간 수 많은 찬을 먹었겠지만 그중 맛갈스러운 김치 종류와 철마다 준비하시던 양념게장이 기억날 뿐이다. 지금과 달리 80년대의 밥상은 가장의 입맛을 중심으로 차려졌던 것 같다. 물론 지금도 가장의 입맛을 고려한 밥상이 준비되는 가정이 있겠지만 그리 비중이 높지는 않을 것 같다. 게다가 집에서 식사를 하는 경우도 별로 없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집에서 식사하는 경우가 많은 자녀들의 입맛에 맞는 밥상이 준비되는 경향성을 띄게 되었을 것이다. 아무튼 40년 전의 우리집 밥상은 '강력한 가장'이셨던 아버지의 입맛을 기준으로 준비되었고 따라서 청소년이었던 나의 입맛에는 김치 종류를 제외하고는 별로였던 모양이다. 그래서 더 '질 좋은 햅 쌀'로 만든 밥의 고소하고 쫀득한 맛만이 40년도 더 지닌 지금까지 끈덕지게 나의 혀와 뇌를 자극하고 있는 모양이다.
그 친구는 내게 많은 경험을 선물해 주고 있다. 그렇게 활동적인 성향이 되지 못하는 나는 아쉽게도 그 친구를 포함한 다른 이들에게 별다른 경험을 선물해 주지 못하는 것 같다. 그 친구의 친절한 '경험의 선물'에 대하여 깊은 감동과 감사함을 느끼고는 있지만 그렇게 느끼는 것 만으로는 안 될 것 같다. 내가 어떤 식으로 그를 포함한 타인에게 좋은 경험을 선물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방법을 찾아 봐야 할 것 같다.
내가 직접 경험해서 더 절절히 느끼게 되었기 때문인지 모르지만 새로운 경험을 하게 해 주는 것 혹은 과거에 경험했던 너무 귀한 경험을 다시 일깨워 주는 것은 대단히 가치있고 보람된 일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경험을 선물한다는 것은 삶을 다채롭게 하고 풍성하게 하는 것이다. 이보다 더 가치와 의미가 있는 선물은 별로 없을 것 같다. 고귀한 경험, 잊혀진 경험을 되돌려 받았던 그 순간이 아직도 기억에 선명하다. 40년전으로 나를 회귀시켜준이에게 다시 한 번 고마움을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