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유할 수 없는 기억도 나름대로 뜨겁다
후시미 이나리 타이샤 신사(神社)를 지났다.
뒷산을 오르는 길에 수없이 많은 토리이(鳥居)가 박혔다.
저승의 새가 주홍색 횃대 위에 내려앉았다.
줄지어 선 토리이는 MRI 자기장 원통만 같았다.
나는 부동자세를 거부한 채
자동항법에 갇혀 토리이 문을 하나씩 통과했다.
토리이는 고주파를 쏘아 내 몸을 훑었다.
내 속의 단면들을 쉼 없이 찍어댔다.
“너의 장기가 기능을 잃어가고 있다.”
그런 말을 듣게 될까 두려웠다.
교토를 찾아온 하찮은 이유들이 점점 희미해져 갔다.
토리이가 읽어낸 것들을 저승의 새가 판정했다.
“차가운 놈이구나.”
안도감에 휩싸였다.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끈적거렸다.
새가 말을 이어갔다.
"이승의 사람이 진심으로 용서한 죄를 저승은 심판하지 않는다."*
나는 걸음을 멈추었다.
“내 죄를 내가 알지 못합니다. 그러니 그 명제는 불성립입니다.”
새는 내 앞을 가로질러 날았다.
“진정한 용기로 용서를 구하는 자는 아주 드물다.”
그러더니, 키득키득 웃었다.
“시간을 거슬러 네가 태어난 곳으로 데려다줄까?”
내가 모를 리 없었다.
어미가 없는.
아비도 없는.
그녀의 감정을 아무렇지 않게 갖고 놀아난.
내가 나쁜 사람일까,
아니면 그저 좋은 의도였을까.
나는 대가를 치를 것이다.
내 존재는 0보다도 하찮아질 것이다.
“기억을 가져갈래?”
새가 다시 물었다.
“아니면 태워버릴래?”
독촉하듯 물었다.
기억이 불 타오르면 주홍빛일까.
재가 되는 것은 두려웠다.
뒷산에 박힌 수많은 토리이들 중 천 번째쯤의 하나는
무채색.
세상을 떠난 어머니의 옛 염원을 닮아 있었다.
미움이 나를 위험하게 만들었다.
내가 만들어낸 그 미움에 사랑을 주었다.
지칠 대로 지친 그곳의 문은
마치 어머니를 묻어둔 곳 표지석만 같았다.
아, 여우의 신이여.
한참을 올라도
수없이 많은 토리이가 박혔다.
저만치
앞서 오르는 아이의 등을 바라보았다.
그 순간
찐득한 생명처럼 염원이 자라났다.
"잘 되게 해 주세요."
잘 된다는 것은 어떤 형상을 하고 있을까.
토리이들 사이의 어떤 것들은 내 염원의 쌍둥이만 같았다.
기억은 숨길 수 없는 증거였다.
내가 더 이상 갈망하지 않을 때,
무슨 생각에 잠겨.. 주홍빛 문의 그림자를 밟아 지날까.
토리이 기둥을 좀먹은 수많은 글자들.
아사히공업(주)
(주)마루쥬식품
OO유한회사
죄다, 같은 염원...
저승의 맑은 법(法)이 이승의 질서에 간섭했다.
"제 미움을 없애주세요."
아, 여우는 과연 어디에 숨었을까.
어느 여름,
교토,
뜨거운 한낮,
여우에 홀린 듯.
나는 무의미한 문들을 지나며
또다시, 그 용도가 무엇인지 궁금해하였다.
텅 빈 문들이
주홍빛으로 물들어 태양처럼 보였다.
어떻게 보든
빈 것은 여전히 빈 것.
후시미 이나리 뒷산 꼭대기엔
햇살이 후텁지근 하니 새소리만 요란하였다.
토리이를 세었더니,
잊힌 소리들이 떠올랐다.
바람에 닳은,
시간에 지워진,
생일 케이크의 위태로운 촛불이 갈수록 늘어나더니,
나는 어머니보다 오래 살게 되었다.
수많은 옛 소리들.
여전히 해는 높고
다시 산 아래로 걸었다.
내려오는 사람들을 따라서
토리이 문들이 줄지어 섰다.
그 표식들이 환영일지 이별일지 모른 채
내 그림자를 따라 저벅저벅 걸었다.
저승의 새가 주홍색 MRI 원통 위에 앉아있었다.
어쩌면
백만 번째를 지날 때쯤
내 장기가 멈출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새
신사로 돌아와 있었다.
그리워해도,
한 번 만나고는 다시는 만나지 못하는 일도 있다지.
그래도
한 번은 만났으니
그걸로 된 것인지도 몰랐다.
뒤돌아 보았다.
후시미 이나리 뒷산을 오르는 길에 수없이 많은 토리이가 박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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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과 함께: 죄와 벌' 중에서
※표지 그림: 영화 '게이샤의 추억'에서 어린 치요가 후시미 이나리 토리이 사이를 달리는 장면. 새로운 희망을 향해 달려가는 순간(모멘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