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치듯 지난

나는 아직 봄을 알아본다

by 블루밍드림


암스테르담 아랫동네에

2월이 오면

크로커스가 솟아났다.


2월 10일, 우리 집 현관 앞에 크로커스가 피어났다


하얀 것

보라색 것

하룻밤 새 피어났다


우리 집 현관 앞

버려둔 세 뼘 땅에

그만치 봄이 들었다


첫 꽃 틔운 바람에

마음을 툭툭 털어

널어두었더니


몇 시간이고

몇 날이고

쉬도 않고 살랑거렸다


나의 옛날, 봄은 늘 그렇게 시작되었다. 작은 꽃 몇 송이가 사람의 계절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을 그때는 알았다. 크로커스가 피어나면, 밀린 봄맞이 청소를 하였다. 겨우내 쌓인 내 가슴의 먼지를 털어내고선, 바람 찬 줄도 모르고, 한 줌 햇살에 걸어 두곤 하였다.




서울은 3월이 되어도 여전히 시린 계절이었다. 무채색 빌딩 사이, 점심거리를 찾아 무리 지어 이동하는 여의도 직장인들 사이에 끼어 발걸음 가는 대로 거리를 걸었다. 기대 따윈 없었다. 아스팔트와 시멘트가 하릴없이 몸을 맞댄 삭막한 길 위에 꽃 트럭 하나가 서 있었다. 트럭 옆에 내려놓은 화분 속 꽃들이 낮은 햇볕을 쬐고 있었다. 그 곁에서 바람이 차가웠다.


뭉툭한 화분 속 꽃들이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마지못해 멈춰 섰다.


"나 어때요, 아저씨?"

"봄이 왔어요."

"나 좀 데려가요."


꽃들이 말을 걸어왔다.


"뭐라고?"

"벌써 봄?"

"아, 그것도 몰랐네."


꽃들은 입에 가득 저마다의 봄을 물었다. 나비와 벌과 새들이 그 곁에 환상의 둥지를 틀었다.


'봄이 참 예쁘구나.'

'내가 꽃을 좋아했었나?'


이런 일이 일어나리란 걸 미처 알아채지 못하였다.


아,


지난겨울



잘 살았구나!


다시 걸었다. 길고 어두운 겨울의 터널을 막 빠져나오던 순간이었다. 세상에게 묻고 싶어 졌다. 나 좀 봐달라고, 내 마음도 이 봄의 꽃처럼 충분히 예쁘지 않냐고, 삭막한 도심에서도 꽃을 알아본 내 눈이 여전히 반짝이지 않냐고.




암스텔 강 옆 동네에

4월이 오면



아이들 눈높이에서

하얀 꽃이 흐드러졌다


창이 열리면

꽃잎이 들어오고


아이들은 웃었다

꽃을 닮았다


난 그런 순간을 좋아했다


.

.


벚꽃 잎은 금방 떠나버렸다


이유가 뭘까


.

.


아,


봄은


스치는 거구나


2층 아이들 방 창가에 서 있던 벚나무 한 그루. 아이들 눈앞에서 하얗고 앳된 꽃잎이 흩날렸다. 열린 창으로 방 안까지 흘러들 때, 벚꽃보다 더 환하던 아이들의 미소. 나의 봄은 늘 그제야 완성되곤 하였다. 그날의 봄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웠다.




밖에 나가보니, 새들이 지저귀고 풀도 나무도 이미 푸르렀다. 여의도 윤중로에 벚꽃이 막 피어났다.


봄은 이제 시작인데,


벚꽃 그늘 아래

한갓되이

봄과 멋지게 작별하는 방법을

고민하였다


우리 집 창가에, 벚꽃이 졌다. 4월도 따라 졌다.


나를 스치는 것들

그리고, 잔상으로 남는 모든 것들


봄이 오면,

내가 가장 좋아하는 그곳에서

다음 봄을 또 기다린다


그랬다. 이 봄, 스치듯 지날 게 불 보듯 뻔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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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로커스의 꽃말은 "I'll be always waiting for you."

당신을 기다리는 그 순간마다, 내 마음의 화단에는 2월의 크로커스가 피어난다.

토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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