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테헤란으로 가는 비행기가 이스탄불 아타튀르크 공항을 막 이륙하였다. 기체가 가파르게 기울었다. 창가 좌석은 야간비행을 위한 나의 공간이었다. '풍경 보는 걸 좋아하거든요.' 작은 창문, 좁은 공간, 불편한 자세, 그리고 어둠의 굴곡을 타고 흔들리는 비행기 안에서 세상을 내려다보았다.
2.
저녁 7시가 지난 것을 확인하고는 작은 배낭을 챙겼다. 냉장고에서 생수 한 병을 꺼내 담았다. 활주로를 미끄러지듯 집 밖을 나섰다. 어둠이 익숙한 거리에 먼저 내려앉았다.
3
기수(機首)가 15도로 들려 하늘의 복부를 가를 때, 아랫 세상은 잔인하게 반짝였다. 이스탄불의 금빛 점들은 나를 삼키려 일렁이는 사막의 신기루였다. '사막 위로 별이 또 휴거 하는군.' 가팔라서, 높아서, 제트엔진 소음이 꿀렁거려서, 속이 메스꺼웠다.
4.
한 번도 들른 적 없는 편의점의 문을 힘껏 당겼다. 카운터의 중년 남자가 심드렁한 눈길을 던졌다. 주류 코너로 직행했다. '4,000원?' 캔맥주 작은 것 하나를 배낭에 담았다.
5
빛과 어둠, 도시와 사막, 그들 사이의 투쟁. 그 순간, 나와 나 사이에도 그런 일이 벌어지고 있을지도 몰랐다. 이란에서 한국으로, 돈이 막혔다. 내가 은행 사람들을 만난다 한들 달라질 것은 없었다. '승산 없는 사명감' 길게 숨을 쉬며, 창밖을 다시 내다보았다. 비행기는 이미 세상의 논리와 멀어져 있었다.
6.
마을버스 종점을 지나자 인적이 끊겼다. 밤에 산을 오른 적이 없었다. 그래서, 호기로웠다. 손전등을 켜지 않았다. 뿌연 느낌으로 산길을 올랐다. 고도가 높아질수록 정적은 깊어졌다.
7.
조종사가 스로틀 레버를 당겼으리라. 비행기가 수평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안전벨트 싸인이 꺼졌다. 화장실 앞에 벌써 여러 명이 줄을 섰다. 남자 승무원들이 웨건을 밀고 올라왔다. 빵쪼가리를 나눠 주며, 시간을 속이려 들었다.
8.
인왕의 밤. 어둡고 깊은 푸른색과 보라색이 연기처럼 피어올라, 나와 하늘의 경계를 흐렸다. '어둠에 먹히긴 싫은데…' 과연 내가 제대로 가는 것일까. 빛이 사라진 길 위로 의심이 자랐다.
9.
중대한 순간에 사로잡힌 사람처럼 자리에서 일어났다. 화장실 앞에 줄을 섰다. 비행기가 갑자기 꿀렁거렸다. 안전벨트 싸인이 켜졌다. 세상을 뒤흔들 발표라도 하는 듯, 자리로 돌아가라는 기내방송이 흘러나왔다.
10.
어둠 탓인지 숨이 더 가빴다. 멈춰 서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섬세한 초승달이 떠 있었다. 그 위, 그 위로는 별의 휴거도, 별의 추락도 보이지 않았다. 별을 흉내 낸 것들이 간혹 가다 보일 뿐이었다.
11.
비행기는 한참 동안 흔들렸다. 그 많은 비행을 비웃듯이, 난기류는 늘 불쾌했다. 나의 의지는 내가 알지 못하는 다른 의지에 의해 지탱되었다. 그 의지가 날개 끝에서 반짝였다.
12.
발아래 서울. 어둡고 차가운 푸른색과 보라색. 밝고 따뜻한 주황색과 노란색. 서로를 부르는 현대적 수묵화. 그 위를 걸었다. 마차도의 시처럼 길이 생겼다.
13.
고도 3만 피트. 고독의 좌표를 읽었다. 숫자에 매몰되었다. 손에 들었던 생텍쥐페리의 <야간비행>을 펼쳤다. 결말을 다 알고 있는 소설. 몇 장 읽다 말고 안대를 쓸게 분명했다.
14.
인왕의 정상. 고도 338 미터. 발아래로, 신기루 같던 야간비행의 기억을 닮아 있었다. 새삼 고도 3만 피트의 고독이 떠올랐다.
15.
"르루, 자네는 살아오면서 사랑에 빠진 일이 많은가?"
"아! 사랑이라..... 소장님도 아시다시피......"
"자네도 나와 같군. 시간이 없었지."
"그리 많지는 않았죠."
16.
가파른 각도로 하늘의 어깨를 치고 솟구치던 젊은 날의 사명감. 캔맥주를 꺼냈다. 딱! 차가운 목 넘김. '이토록 빛나는 세상을, 내가 등지고 살았구나.'
17.
사명감과 두려움, 야망과 상실, 비행기는 그 사이에서 또다시 덜덜거렸다. 지루했다. 하품을 했다. 이란 항공기들은 미국 제재 탓에 정비 부품이 부족하다는 것쯤은 잘 알고 있었다.
18.
광화문 방향으로 손가락을 훑었다. 밤의 들뜬 맥박을 반듯하게 펴려 했다. 생텍쥐페리의 문장들이 손끝에 걸렸다. "그러니까 그 모든 것이 이토록 가까이 있었던가?" 같은 것 말이다.
19.
이란항공 꼬리날개에 그려진 호마(Homa). 페르시아 전설의 새는 쉬지 않고 하늘만 난다. 나는 내 살 길을 찾기 위해 구식 비행기를 타고 밤하늘을 날았다.
20.
평온함과 옅은 외로움이 내 어깨의 곡선을 스쳐 지나갔다. 문득 내 뒷모습이 궁금해졌다. 치열했던 투쟁의 흔적보다는, 관조(觀照)를 담아 어쩌면 차분해 보일지도 몰랐다.
21.
세 시간의 비행. 승무원들이 착륙 준비를 시작했다. "Seatback. Upright Position!" 랜딩기어가 내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비행기가 살아 숨 쉬듯 흔들릴 때, 테헤란의 불빛을 보았다. 신기루처럼 멀었다. 손목시계의 분침을 돌려 시간을 맞추었다.
22.
그만 산을 내려가려 하였다. 산 아래로, 건물들이 밤을 보내려 빛과 어둠 사이를 어슬렁 거리는 모습이 보였다. 그제야 손전등을 켰다.
23.
'별똥별이 떨어지는군.' 누군가는 내가 탄 비행기를 바라보며 그렇게 생각할지도 몰랐다. 어쩌면 나의 투쟁을 향해 소원을 빌지도 몰랐다.
24.
착륙하는 비행기처럼 내 시선의 받음각을 높였다. 진행방향으로 가느다란 비행운이 초승달을 가로질렀다. "너의 야간비행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를 일러주려는 시각적 장치가 아닐까 싶었다. 나는 이제 저 아랫빛의 가장 다정한 높이를 향해 고도 338 미터에서부터 천천히 하강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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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TS가 광화문에서 컴백 공연을 한다고 했다. 그 밤, 인왕산에서 내려다보면 서울 시내가 온통 불 타 오를 줄 알았다. 광! 광! 음악 소리가 밤의 굴곡을 타고 울려 퍼져 내가 선 산꼭대기까지 휘청휘청할 줄 알았다. 그런데, 뜻밖에도, 생텍쥐페리와 어느 옛날 두렵기만 하던 야간비행의 순간들이 반짝였고, 그 반짝임에 내가 어질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