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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생각쟁이 Jun 03. 2024

#2 엄마 나는 여기가 힘들어요.

 

  고2 겨울방학 무렵부터 나는 기숙사 생활을 하게 되었다. 일명 ‘S대 반’. 전교권 등수에 있는 소수의 학생들 중 희망자에 한해 기숙사에서 생활을 하게 했다. 그 당시 우리 학교에서 10명~12명 정도의 학생들을 S대를 보냈고, 나는 전교 5등 안팎의 성적을 유지하고 있어서 부모님은 망설임 없이 나를 기숙사로 보내셨다. 마음이 한없이 여리고, 민감해서. 불안도가 높아서. 누군가 나를 싫어하면 어쩌지. 착한 사람 병에 걸려 타인의 말이나 시선에 쉽게 휘둘리는 딸이란 걸 미처 모르셔서 기숙사에 보낼지 말지 고민이 더 없으셨는지도 모르겠다.      


  기숙사 생활은 나와 맞지가 않았다. 같은 반 친구 A와 엮이게 되면서 더더욱. 성적이 한참 부족했지만, 어머니회 회장 딸이라는 일종의 특혜로 기숙사에 들어온 같은 반 친구 A는 우리 학교 유부남 선생님 한 분과 비밀스럽게 연애를 했다. 선생님께 편지를 전해달라며 신문지 사이에 연애편지를 끼워 몇 번이나 나에게 전달을 부탁했다. 거절하지 못해서. 싫다는 말을 하지 못해서. 그저 해달라는 대로 해 주었다. 생리통으로 아프다며 보충 수업을 빠지는 그 친구 눈치를 보느라 나도 같이 빠지고, 기숙사를 빠져나와 놀러 가자는 말에 몰래 같이 놀러도 나갔다. 처음해 보는 일탈이었지만, 친구에게 싫다고 말할 수가 없었다. 늘 내 의사는 제대로 표현하지 않고, 다른 사람들에게 맞춰주는 데 익숙하다 보니 거절할 수가 없었고, 그러다 보니 그 친구와 어울려 자주 일탈을 했다.     


  중심을 잡고 공부한 친구들도 있었지만, 노는 재미를 뒤늦게 알아버린 탓이었을까. 나 포함 대부분의 기숙사 친구들은 분위기에 휩쓸려 공부보다 노는데 더 재미를 붙이기 시작했다. 개인 책상이 아니라, 4-5명이 같이 쓰는 오픈형 책상이라, 늘 혼자 조용히 공부하던 것이 버릇이 되어 있었던 나는 공부에 집중하기도 어려웠다. 보여지는 이미지를 중요하게 생각했던 나는 ‘공부를 아등바등 왜 저렇게 열심히 해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친구 A의 말에 나는 다른 애들과는 다르다며. 공부 안 해도 성적이 잘 나오는 이미지를 보여주려 말도 안 되는 치기도 부렸다. 기숙사 사감 선생님은 A 친구와 가까이하지 말라고. 기숙사 물을 다 흐리고 있다며 나를 살짝 불러서 언지까지 주셨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유리멘탈에 타인의 말과 시선에 이리저리 휘둘리고, 타인에게 표현하는 것도 주저했던 나라서 그저 이리저리 끌려 다니기만 했다.     


  또 어떤 날은 기숙사에 같이 생활한 친구 한 명이 영화 영상 하나를 가져와 자율 학습시간에 과학실에서 다 같이 보자고 했다. 기숙사 친구들 다 같이 과학실에 모였다. 보고 싶지 않았다. 제목만 들어도 혐오감이 들었다. 싫다는 말을 하지 못해서 그 자리에 앉아 있다가 예상치 못한 장면을 보고 토가 나올 것만 같았지만, 뛰쳐나올 수가 없었다. 뛰쳐나오면 그 친구가 뭐라고 할 것만 같아서 앉아서 내내 고개만 돌리고 있다가, 하필이면 그 시간 감독을 돌던 선생님께 들켜서 다 같이 혼이 났다.     


 한 번은 엄마 아빠가 이불을 바꿔주려고 기숙사에 잠시 들리셨다. 나와 A만 자리를 비운 것을 안 아빠는 불같이 화를 내며 당장 집에 가자고. 나를 집으로 데려가려고 하셨다. 솔직한 심정으로 ‘지금이 기회’다 싶었다. 엄마 아빠를 따라 그 길로 집에 가고 싶었다. 흔들리기 쉬운 나라서, 기숙사에서 내내 흔들리고 있는 내가 힘들어서 엄마 아빠가 나를 데리고 가 주셨으면 하고 바랐다.      


‘보소. 여보. 다른 애들 다 공부하는데 저래 나와서 다닌 거 보면.. 나와가 집에 있으면 공부 더 안 할 거 같은데. 기숙사에라도 붙들어 놔야 공부하지 싶은데.. 기숙사에 그냥 놔두지요.’


엄마는 아빠를 말렸다.      


‘엄마. 나는 여기 있어서 공부가 더 안돼요. 마음을 잡을 수가 없단 말이야. 엄마 아빠가 계신 집으로 가고 싶어요. 나는 기숙사 생활이 힘들어요.’라고 말하고 싶은데, 말하지 못했다.      

 

  혹시 엄마는 내가 기숙사에 있기를 바라시는 건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엄마에게 나는 왠지 모르게 짐일 것만 같았다. 대식구 건사하느라 매일 지쳐 보였던 엄마라서. 식구 한 명이라도 적으면, 엄마의 하루하루가 조금은 덜 고되지 않을까 싶었다. 그래서 목구멍까지 차오르던 ‘나는 집에 가고 싶어요.’라는 말을 차마 꺼내지 못했다. 말해도 괜찮았을 텐데.. 어쩌면 말하면, 엄마 아빠는 귀 기울여 들어주셨을지도 모르는데.. 상대방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직접 물어본 것도 들은 것도 아니면서 뭘 그렇게 눈치를 봤는지 모르겠다. 그 시절 나는 왜 그리도 망설이고, 표현을 안 하려고만 했는지 모르겠다.    

 

  엄마 아빠가 가신 후, 엄마 아빠가 가져다 주신 커다란 이불 봉투 위에 메모 하나가 붙어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사랑하는 우리 딸 ㅇㅇㅇ, 힘내.” 아빠의 손글씨를 타고 아빠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만 같아서, 엄마 아빠한테 미안해서. 집에 가고 싶어서. 남몰래 눈물을 훔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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