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바의집, 배로나르다 [연극] 후기
CJ문화재단의 2024 스테이지업 창작단체 지원사업에 선정된 성북동비둘기의 신작 ‘알바의집, 배로나르다’가 2024년 8월 9일부터 9월 1일까지 공연을 진행한다. 극단 성북동비둘기는 국내 아방가르드 실험 극단의 대표 주자로 주로 고전을 해체하고 재구성하거나 미디어를 연극으로 수용한 작품을 펼치는 등 도발적인 방식으로 연극의 존재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실험을 계속해 오고 있다.
원작 ‘베르나르다 알바의 집’은 스페인 남부 안달루시아 지방의 한 마을을 배경으로 배르나르다 알바라는 과부의 집에서 벌어진 비극을 다루고 있다. 두 번째 남편을 잃고 다섯 딸에게 8년 상을 강요하는 배르나르다는 딸들을 엄격히 감시한다. 질식할 듯한 감금 속에서 마을 청년 페페의 등장으로 딸들의 억압된 감정이 깨어나고, 결국 막내딸 아델라는 본능적 선택에 따른 비극적 결말을 맞는다.
한편, 김현탁 연출이 재구성한 이번 성북동 비둘기의 신작 ‘알바의집, 배로나르다’는 원작의 이야기 속 끊임없이 이어진 노동에 주목한다. 누군가의 감시 아래 비정규직 노동을 살아가는 청년들의 작업 현장들. 관객은 공연 내내 편의점과 요식업체, 배송업체, 물류업체, 결혼식장, 키즈카페, 학원 강의실 등. 동시대 한국 사회의 다양한 아르바이트 공간을 마주하게 된다.
연극이 시작되기 전부터 배우들은 무대를 설치하느냐 바쁘다. 이 와중에 무대 가운데 위치한 카트 위에서 한 남성은 웅크려 누워있다. 이내 극이 시작되고 누워있던 배우는 신이었음이 밝혀진다. 곰과 호랑이에게 인간이 되는 방법을 알려주고는 다시 원래대로 누워버리기 때문이다. 신은 노동하지 않는다. 꿈쩍하지 않는다. 선물을 나눠주는 것은 신(산타)이지만, 신은 빨간색의 시그니쳐 의상을 입는 것조차 스스로 하지 않는다/못한다. 선물을 나눠주는 것은 무대를 가득 채운 루돌프들의 몫이다. 신은 채찍을 들고 수십 개의 국명을 호명할 뿐이다.
이때 루돌프 역을 맡은 배우들은 무대 양 끝을 미친 듯이 뛰어야 했다. 연출에서 독특한 점이라면 70분이라는 짧은 시간 중에 루돌프의 배달 장면의 비중을 매우 길게 배정했다는 점이다. 이들은 끊임없이 뛰고, 헐떡이며 종국에는 속도가 점점 느려질 때도 신의 채찍이 멈추지 않아 달리기를 멈출 수 없다. 관객은 하는 수 없이 루돌프의 뜀박질을 계속 봐야만 한다. 지겨울 때까지. 이 장면의 목표는 관객이 지긋지긋함을 느끼게 하는 것이었으므로. 관객들이 배달 가방을 들고 뛰는 루돌프들을 보며 각종 화물·택배·배달 노동자를 떠올리기를 애원하는 듯한 장면이었다.
이후 장면들은 미끄러지듯 빠르게 이어진다. 곽영현 배우는 루돌프 달리기를 방금 마쳐 땀으로 얼굴이 범벅이 된 상태에서 다음 아르바이트, 또 그다음 아르바이트로 향한다. 연극은 멈추지 않음을 보여준다. 마지막 컨베이어벨트를 형상화 한 배우들의 몸짓 속에서 일하던 곽영현 배우는 쓰러져 죽는다. 그 후 연극이 시작되기 전부터 신이 누워있던 카트 위로 올려진다. 은색 스테인리스의 카트 위는, 극초반 ‘저기는 절대 올라가면 안 돼!’라고 지목된 공간이기도 하다.
김현탁 연출가는 극 중 한국 사회의 아르바이트 현장과 역사적 사건 간 도발적인 연결 짓기를 시도한다.
“머리! 젖습니다. 옷도! 젖습니다. 신발! 젖습니다. 양말까지 젖습니다. 옷 머리 신발 양말 다 다 젖습니다. 물에 젖고 물만 맞는 여기는 아마존. 아, 마, 존조로존조로존~”
2년 전 유튜브에는 에버랜드의 인기 놀이기구인 <아마존 익스프레스>에서 일하는 한 알바생의 영상이 인기를 끌었다. 인기의 요소는 흥겨운 노래와 상반되는 영혼 없는 눈빛. 많은 이들은 ‘소울리스좌’의 얼굴에서 자신을 발견했을 것이다. 무대 위의 배우들은 오시비엥침의 수감자 옷을 입고 나치 시절 유대인을 상징하는 별을 가슴에 단 채 <아마존 익스프레스>의 노래와 춤을 따라 한다. 그들이 재현한 오시비엥침 입구에는 “ARBEIT MACHT FREI”(노동이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라는 글자가 적힌 간판이 달려있었다.
극의 중반에는 스크린이 내려오고 조선시대 멕시코로 이주한 한인들에 대한 짤막한 영화가 상영된다. 1904년 조선의 신문에는 멕시코 한인 노동자 모집공고가 떴다. 요약하자면 좋은 나라에서 적게 일하고 돈을 많이 벌 수 있다는 내용이었고, 해당 광고를 본 1033명의 한인은 1905년 멕시코로 향하게 된다. 그러나 그 광고는 거짓이었고, 어딘지도 모르는 이역만리에 당도한 한인들은 폭력과 가난, 강제 노역에 시달린다. 스크린 속에서는 멕시코 서부 살리나크루스항에 막 내린 한인들이 인신매매되는 과정에서 상투를 잘리는 장면을 묘사했다.
2024년 우리는 쿠팡을 하루만 나가도 근로계약서를 쓴다. 오시비엥침과 같은 강제 수용소에 수감되어 있는 것도 아니고 20세기 초반 조선인들처럼 거짓 광고에 속아 노무를 제공하는 것도 아니다. 우리의 인신은 자유롭고, 합법적 계약을 맺는다…. 그래서? 라고 연극은 이렇게 비웃고자 하는 것으로 보인다. “노동이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는 간판 아래에서 정말로 죽기 전까지 강제 노역을 하는 수용소와 거짓 정보에 넘어가 인신매매되는 것과 무엇이 그렇게 다르냐고. 이것은 과도한 비약이지만, 연극이 할 수 있는 넘겨짚기이기도 할 것이다.
<알바의집, 베로나르다>는 인간이 되고 싶은 곰과 호랑이라는 단군신화를 모티프로 시작하며 동시에 끝을 맺는다. 그러나 인간이 되고 싶은 곰과 호랑이는 이미 우리가 아는 우람한 모습이 아닌 놀이공원에 어울릴만한 우스꽝스러운 탈을 쓴 채이다. 그들의 우스꽝스러움은 동물이라기보다 인간적이다. 이들에게 신(환웅)은 말한다. 인간은 다른 짐승과 달리 “매우” 인내심이 깊다고, 그 시간을 버틸 수 있겠느냐고.
우리가 아는 이야기대로 호랑이는 중간에 인간 되기를 포기하며 곰은 마침내 인간 되기를 성취한다. 그렇지만, 인간 되기를 포기하는 호랑이도 인간 되기를 성공하는 곰도 모두 인형 탈을 벗음으로써 그 과정을 수행하게 된다. 호랑이는 극의 중반, 탈을 벗으며 말한다. “나 더 이상 이렇게는 못 살겠어.” 강렬한 핀 조명 아래에서 탈을 벗은 뒤 관객을 응시하는 호랑이의 맨얼굴은 결국 인간의 형상이다. 한편, 곰은 모든 이야기가 끝난 뒤에 등장한다. “이제 인간이 되었어.”라고 외치는 인간이 된 곰의 얼굴은 환희보다는 두려움이 앞선다. 중간에 인간 되기를 그만둔 호랑이와 끝까지 버틴 곰의 얼굴이 비슷한 표정이라는 것은 주목할 부분이다.
아르바이트는 일반적으로 이행기의 일자리로 사고 된다. 그러므로 아르바이트가 잘 어울리는 것은 아직 일자리를 잡기 이전의 젊은 청년과 대학생들이다. 올해 ‘그냥 쉼’ 청년은 40만 명을 넘겼다고 한다. 이들은 대부분 20대 후반의 대졸자들로, 반복되는 취업 실패 과정에서 구직을 단념하게 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취업을 실패하게 되는 까닭은 일자리 자체의 부족보다는 좋은 일자리의 부족으로 이해해야 한다. 좋은 일자리가 줄어든 현실은 청년들이 경제활동인구로 이행하는 기간이 장기화되는 것과 관련이 있다. 작업 숙련에 드는 비용과 시간을 기업이라는 조직이 아닌 개인이 부담한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열심히 알바를 하던 배우는 극 중 이런 말을 듣는다. 알바를 하기 싫으면 유명 배우가 되라고. 좋은 일자리를 잡아 아르바이트를 그만하라는 말. 그것은 정말 가능한가. 아르바이트로 표현되는 임시 노동의 제공은 20대 초반에 한정된 것이 정말 맞을까. ‘그냥 쉼’ 청년들은 정말로 그냥 쉬고 있을까. 플랫폼 노동으로 대표되는 오늘날의 일자리 전형들은 우리에게 자유를 약속한다. 일하고 싶을 때 간단하게 지원하고, 쉬고 싶을 때는 일을 하지 않으면 된다고. 아르바이트라는 말에 담겨 있던 일시, 임시, 비정기라는 약속이 일상적인 것이 되었을 때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마침내 인간이 된 인내심 많은 곰에게, 그러므로 이제는 인간에게 좋은 미래가 기다리지 않으리라는 암담함을 받으며 관객들은, 인간이 아닌 AI가 부르는 양희은의 <상록수>를 듣는다. 덩그러니 남은 곰의 탈과 인간 아닌 존재가 부르는 희망의 가사, 그걸 들으며 객석을 떠난다. 변하지 않을 사실은 아마도 신이 누워있든 앉아 있든 춤을 추고 있든 이 객석을 나간 이들은 다음날에도 일을 한다는 것. 그렇게 세상이 굴러간다는 것. 인내심 많은 곰 출신 인간의 안부를 물어본다.
*아트인사이트에 기고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