흉중산수: 관념과 현실의 경계를 넘어서
장병언
20대 중반 예술가의 길을 가고자 마음먹은 뒤 내 작업의 화두는 고전과 여행으로 압축되었다. 동양의 고전회화를 보면서 큰 감동을 받았으며, 그곳으로 들어가 여행을 시작했다. 또한, 그 속에서 만난 이들과의 문답을 통해 예술관이 형성되기 시작하였고, 예술가로서 가야 할 방향성을 정립했다.
앞으로 山水, 즉 인류가 발 딛고 있는 이 광활한 대지를 담고자 한다. 더 이상 고전에 머무르고 있는 옛것이 아니라, 지금 현재 우리가 발 딛고 있는 거대하면서 소소하고, 평온하면서 맹렬하게 움직이고 있는 이 땅을 담아내는 것에 가장 행복을 느낀다.
유년시절에 겪은 영향인지는 모르겠으나 대학진학 후 '수묵'과 '산수'를 표방하는 화가로 성장하고 싶은 욕구가 생기게 된다. 대학시절 당시 어떤 장르의 예술이든 앞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습득' 해야만 하는 기술적 문제가 수반된다고 생각하였다. 이런 문제의식을 가지고 선택했던 것이 바로 서예이다. 서법, 즉 붓을 다루는 훈련을 통해 운필에서 좀 더 자유로워지는 것이 이 시점에서 가장 필요한 작업이라 여겼다. 이렇게 대학시절은 스스로 문제를 인식하고, 기법적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것으로 정리되었다.
졸업 후 한국화의 원류를 찾아가는 과정에서 고대산수, 그중에 특히 중국 북송대 그림들에 매료되었고, 선대의 화가가 만들어 놓은 다른 차원의 거대한 자연 속을 여행하기로 한다. 마치 가파른 산길을 갈 때 호흡을 조절하듯, 호흡을 가다듬으면서 획을 그어 나가는 무모한 작업을 반복하며, 나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질문과 답변을 반복한다, 실제 거의 모든 작품 속에는 배낭을 메고 산길을 오르고 있는 나 자신이 작게 그려져 있다. 이것은 단순히 거장의 그림을 베껴내는 것으로만 끝내지 않겠다는 표식이며, 나아가 그들이 구축하고 이루어낸 조형의 세계에 서려있는 정신을 탐구하고자 하는 의지인 셈이다. 어찌 보면 이 과정이 '모사'라는 단순한 행위로 볼 수도 있다. 하지만 나에게 있어 그들의 산수는 자유롭게 거닐 수 있고, 시간적, 물리적 어떠한 것에도 걸림돌 없는 공간, 그리고 무한한 상상력을 제공했던 셈이다.
이러한 과정을 걸어오다 보니 어느 순간 새로운 호기심이 생겨났다. 현대 모든 창작물은 '편집의 예술'이라 했던가? 지금까지 고전 속을 걸으며 접했던 산수의 파편을 가져와 내가 보고 싶은, 혹은 내가 원하는 곳에 배치를 해보면 어떨까?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수많은 고전 명화를 접하면서 가장 마음이 갔던 화가, 나무, 바위, 구름 등을 가위로 오려내고 다시 적절한 곳에 배치해서 나 스스로가 보고 싶어 했던 장면을 연출하는 작업을 진행하였다. 마치 관념산수의 끝을 보겠다는 심정으로 말이다. 그 결과물의 초안이 포트폴리오에 삽입되어 있는 '흉중산수(2016)'이다.
이 작업(편집된 산수)은 처음에는 호기심으로 시작하였으나 고전 그림 속을 걸어왔던 여정을 일단락 정리하는 작업이 되었다고 생각된다. 이렇게 17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얼마 전부터 본격적으로 사생을 하러 다니기 시작했다. 이전까지 경험했던 관념의 세계와 사생을 통해 눈앞에 펼쳐진 실제의 세계가 서로 충돌을 겪고 있다는 것을 내 몸으로 느낀다. 그리고 붓끝에서 바로 반응한다. 혼란스럽긴 하나, 이건 내가 선택한 것에 대한 지금까지의 결과물이다. 이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관념과 실체를 바라보는 관점은 각기 다르겠지만 이제부터 내가 해야 되는 작업은 관념으로 치우쳐진 무게추를 실제적 측면과 균형을 이루도록 만드는 작업이 아닐까 한다. 나는 지독하게 편식을 해왔고, 고립된 환경에서 그림을 그려온 사실을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그 결과 내 작업의 결과물에는 사회성이 결여되어 있으며, 학문적 깊이가 없다 보니 고아한 정취가 아쉽다. 다행스러운 것은 나에게 주어진 시간이 아직 남아 있으며 내가 가진 결함을 충분히 극복할 수 있음을 스스로 믿는다. '모방, 변형, 창조'라고 하는 과정 속에서 나는 과연 어디쯤 서 있을까? 항상 스스로에게 묻고 끊임없이 성찰한다.
2020.12 장병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