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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유경 Apr 12. 2024

복지국가는 위험에 공동으로 대비하는 시스템이 아니다 ①

서론

   최근 단순한 의대 증원을 넘어서 근본적인 의료 개혁의 필요성을 주장하는 한 글이 SNS에서 엄청난 인기를 얻었다(천관율, https://bit.ly/3PVTdqQ). 필자는 이 현상을 보면서 며칠 동안 착잡함을 느꼈다. 물론 글의 내용 중 일부는 타당했다. 예컨대 의사 집단의 이질성에 대한 인식은 그렇게 새로운 통찰이 아닐지라도, 의사들의 행동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하다. 한국 의료 시장의 특수성을 고려했을 때, 미용⋅성형 분야에서 지대 회수가 필요하다는 주장도 일리가 있다. 그러나 글을 수차례 다시 읽어보더라도, 저자의 기나긴 논변 끝에 도출된 결론에는 도저히 동의할 수가 없었다.


   저자는 저성장과 저출산이라는 위기 속에서 사회보험의 지속 불가능성을 단정한다. 그리고 이에 대한 대안으로 "생명에 직결되는 의료"를 제외한 다른 의료를 가격 신호에 맡겨야 한다고 주장한다. 한마디로 복지국가의 존속을 위해 의료 영역에서 상품화(commodification)를 확대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복지국가 모델의 궁극적 목적이 탈상품화(decommodification), 즉 순수한 시장의 힘으로부터 독립하여 인간적인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개인들을 해방(emancipation)하는 데 있다는 점에 비추어본다면, 위의 결론은 자가당착적이다. 누군가는 생명에 직결되지 않는 의료만 상품화하는 것이기 때문에 위의 결론에 문제가 없다고 반박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반박은 복지국가 모델이 애초에 인간 생존에 필요한 최소치를 보장하는 것 이상을 목표로 삼는다는 사실을 간과한다.


   저자는 의료비에 대한 본인부담금을 인상해야 한다는 “쓴소리"가 사람들에게 “인기”가 없을 것이라고 예상하는데, 실제로도 그럴지는 잘 모르겠다. 오히려 그의 정책 처방은 꽤 많은 이들 사이에서 공감을 얻은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공동체 내의 모든 시민이 어느 정도의(certain) 웰빙(well-being)을 유지하고, 충분한 수준의 삶의 질을 누릴 권리가 보장되는 사회를 건설하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그가 내린 결론에 동의할 수 없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앞으로 쓸 글의 목적은 의대 증원 정책의 정당성을 논하는 것이 아니다. 물론 의학 교육의 질이 저하되지 않는 수준에서 의대 증원은 할 수 있고, 필요하다. 의대 증원 이슈가 의료 개혁과 관련된 정치적 논의의 장을 집어삼키고 있는 현실은 분명히 바람직하지 않지만, 한국이라는 정치 공동체 내에서 의사 집단은 자기 직종의 증원에 대해 결사적으로 반대할 정당한 이유(justification)가 없다. 심지어 이들은 그 이유를 스스로 생성할 의지도 없는 것처럼 보인다. 의대 증원만으로 의료 시스템의 고질적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고 말할 정도로 시스템(system)을 잘 이해하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의사 수를 늘리는 정책만을 갖고 이토록 극심하게 반대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쯤은 인식할 때가 되지 않았는가?


   대신 필자는 천관율을 포함한 많은 한국인들이 복지국가와 사회보험을 이해하는 방식을 문제 삼고자 한다. 천관율의 글에서 도출된 결론은 복지국가와 사회보험에 대한 특정 접근에 기초한다. 이러한 접근은 마치 자유주의적 패러다임과 단절된 것처럼 보이지만, 전략적으로 또는 무의식적으로 그 연속성을 유지한다. 구체적으로는 복지국가를 위험(risk)에 대한 보험(insurance)으로 환원하고, 사회보험이 민간보험과 마찬가지로 보험계리적 중립성(actuarial neutrality)의 원리에 따라 작동한다고 오해한다. 예컨대 천관율은 복지국가를 “보편적 위험에 공동으로 대비하는 시스템”으로 정의하고, 사회보험을 투자 수법인 폰지 구조에 비유한다. 그런데 적어도 복지국가를 그것의 총체성(totality) 속에서 이해하고 있고, 사회보험과 민간보험이 작동하는 원리를 정확하게 구별할 줄 아는 정책 전문가라면 절대로 이렇게 이야기할 수 없다. 지금 하는 지적은 단순히 뜬구름 잡는 소리가 아니다. 복지국가와 사회보험의 모델에 대한 이해는 현실에서 나타나는 구체적인 사회 정책의 목적과 작동 여부를 결정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오늘날 한국에서 복지국가와 사회보험에 대한 잘못된 이해가 확산되는 것을 막는 작업이 시급하다. 의대 증원 대신 새로운 형태의 의료 개혁을 정치적 논의 선상에 올리고자하는 사람이라면, 이러한 잘못된 이해의 위험성을 반드시 인식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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