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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단 독자 Jun 13. 2024

새겨두고 싶은 어떤 것.

5월 17일 화요일, 과나후아토의 호스텔 주방에서.

  중심 광장인 마요르 광장에서 시작된 우연한 퍼레이드는 깊은 여운을 남겼다. 스페인어로 '중심'을 뜻하는 '마요르'라는 말이 붙은 이 광장은 또 다른 명칭이 있다. 바로 <라 파즈>라는 이름이다. '라 파즈'는 스페인어로 '평화'를 뜻한다. 도무지 근심이라고는 찾아보기 힘든 과나후아토. 눈 가는 곳에는 아름다운 색감의 건축물들이 도시를 생기 있게 하고, 도시 자체가 가진 흥겨움 덕분에 입가에는 늘 미소가 지어지는 과나후아토. 단연 '평화'라는 과나후아토 중심 광장의 별칭답다. 이렇게 평화로운 광장에서 마주했던 여전히 이유는 모를 퍼레이드의 즐거운 여파와 함께 숙소로 돌아왔다.


  숙소에서는 곧장 옥상으로 올라갔다. 기대하지 않았던 이 숙소는 모든 게 기대 이상이었다. 특히 옥상에 위치한 테라스 자리는 더욱이 그랬다. 얼마나 많은 여행객들이 이 호스텔을 다녀갔을까? 또, 얼마나 많은 이들이 내가 앉은 이 자리에 앉았던 걸까? 홀로 테라스의 의자에 앉아 잠시나마 고요한 시간을 보낼 때에도 나는 내가 자리한 이 테이블 위로 셀 수 없는 이들의 이야기가 쌓여 있음을 느꼈다. 그건 하루짜리 가벼운 여독이기도 삶의 깊은 성찰이기도 했다. 나처럼 환희와 기쁨을 맛보고 자리에 앉은 이도 있을 것이다. 반대로 어떤 감정은 소소한 실망과 후회로 뒤엉켜있기도 할 것이다. 혹, 누군가에게는 일생일대의 고뇌였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게 누군가가 남겨둔 흔적 없는 추억 속에 앉아있을 때였다. 편안한 테이블의 의자에서 몸을 기대 혼자만의 고독으로 들어가던 그 찰나, 뭐지? 어디선가 맛있는 냄새가 난다.


'이거 무슨 냄새더라?'


  익숙하다. 이건 분명 내가 아는 냄새다. 이 맛있는 향기의 정체는 뭘까? 이곳은 멕시코의 과나후아토, 이 땅 위에 내가 아는 냄새라니! 얼마 만에 맡는 아는 냄새인가! 근데 대체 어떤 음식이었더라? 반가움과 친숙한 향기에 오감이 살아나는 기분이었다. 익숙하고도 잘 아는 이 냄새는 알듯 모를 듯 정체를 숨긴 채 내 코끝을 자극했다. 나는 마치 오래된 친구를 만난 듯한 반가움으로 의자에 살짝 뉘었던 몸을 저절로 일으켰다. 안 되겠다. 몸을 바로 세우는 것으로는 부족해. 그 길로 곧장 주방으로 향했다.


  호스텔을 묵을 때 고려해야 할 편의 시설이라 함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취사 시설 또한 그중 하나일 테다. 내가 묵은 이 숙소의 편의시설이라면 머무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용할 수 있는 주방이 자랑이었다. 대부분의 호스텔들이 2구짜리 가스레인지 하나 정도로 간단한 조리시설을 갖춘 아담한 주방이 있는 반면에 이 호스텔처럼 꽤나 넓고 쾌적한 주방을 가진 곳은 찾기가 드물었다. 특히 여기 주방은 중앙에 식탁이 꽤 크게 놓여있었는데. 여느 파인다이닝의 단체석 식탁 같기도 했다. 그런 이점에서 이 신통방통한 테이블은 그곳에 요리사가 서 있으면 넓은 조리대가 되고, 음식을 먹고자 하는 이가 의자를 가져와 앉으면 그대로 식탁이 되어주었다.


  이렇게 주방이 있는 것은 숙소 선정의 큰 메리트였다. 나 역시 때때로 찾아오는 고향의 맛에 대한 그리움을 해결할 요량으로 한 번씩 굳이 취사 시설이 되는 곳을 찾아서 숙소를 예약하곤 했다. 그러나 멕시코의 주방은 누구나 사용할 수 있지만 모두가 이용하지는 않았다. 여기는 멕시코니까. 값싸게 맛있게 먹을 수 있는 음식들이 즐비해서 만들어 먹는 수고를 할 바에는 무엇이든 검증된 요리를 사 먹는 것이 이득이었으니까. 나도 여기서 머무는 동안 굳이 내가 한식을 요리해 먹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럴 필요 없는 게 멕시코 음식은 그 자체로 입맛에 잘 맞고 매번 너무 맛있었다. 그런데 냄새에 이끌려 온 오늘의 주방은 그 모습이 좀 달랐다. 아는 냄새. 익숙한 냄새. 그래서 더 맛있는 냄새다. 한식인가? 그럴 리가? 그럼 뭘까? 이토록 익숙하고 잘 아는 냄새라니. 과나후아토의 대체 어떤 음식이 이런 향이 난단 말인가!


"Hola!"


  반가운 냄새에 업 된 인사를 건네며 주방으로 들어갔다. 주방엔 두 명의 요리사가 맛의 대결을 펼치고 있었다. 흡사 만화 <요리왕 비룡> 속 요리 대결이다. 놀랍다. 만화라서 가능한 줄 알았던 요리사의 후광이 눈앞에 보였다. 그것도 두 개나! 그들은 누구보다 진지한 눈빛으로 각자의 요리를 만들며 맛의 드래건 블루스를 이루고 있었다. 호스텔에서 이런 퀄리티의 요리가 가능하구나. 이들이 만들어 내는 맛있는 냄새에 이끌린 다른 여행자들도 하나 둘 주방으로 모였다. 이야기를 나눠보니 둘은 며칠 뒤 과나후아토에서 열릴 <마스터 셰프 멕시코>에 도전장을 낸 요리사들이란다. 둘 다 각각 타지에서 온 열정 가득한 요리사로서 요리 연습을 위해 쾌적하고 큰 주방을 찾다 보니 우연히 이 숙소에 오게 되었단다. 그 우연 덕분에 나는 맛있는 냄새는 물론 티브이 속 요리 경연을 눈앞에서 볼 수 있게 되었다. 보기만 했던가, 맛보는 것도 함께했지!


  내 코를 사로잡은 익숙한 냄새의 정체도 알아냈다. 그건 바로 <살사 피칸데> 멕시코의 칠리로 만든 소스다. 칠리, 즉 고추로 만든 소스. 어딘가 익숙하지 않은가? 그렇다. 그건 한국의 '고추장'이었다. 물론 장을 담가 만든 깊이까지는 아니었고, 만드는 방법도 달랐지만 향도 맛도 정확히 고추장이었다. 반갑고 또 반가웠다. 나는 <살사 피칸데> 한 입 먹자마자 외쳤다.


  "이건 고추장이야! 한국에도 이런 소스가 있어! 정말 똑같아!"


  그렇게 칠리의 본 고장 라틴 아메리카에서 대한민국의 고추장 소스를 널리 외쳤다. 요리사들은 후하게 우리를 대접해 주었고, 운 좋게 우리는 그들의 요리 모습을 감상하는 것은 그들이 만든 요리도 맛볼 수 있었다. 고향의 향, 고추장을 느끼게 해 준 고추장 소스 <살사 피칸테>는 타코 위의 소스로 뿌려 먹었다. 멕시코에서 만난 고향의 맛이란! 이건 찐이었어! 그렇게 <마스터 셰프 멕시코>를 숙소 주방에서 느꼈다. 게다가 그들은 경연에 나갈 요리들을 정리한 각자의 비법 노트도 구경시켜 주었다. 이건 내가 처음으로 본 요리사의 비법 노트이다. 그것도 멕시코 요리사라니.



[ 몰레 블랑코 ]


2kg의 닭

1/2컵의, 아몬드

1/2컵의 호두

1/2 컵의 잣

1/2컵의 참깨

5개의 의 고추

8조각의 마늘

큰 양파 1개

1 하얀 모카

1/2 컵의 흰 초콜릿

2컵의 우유 크림

소금

닭 육수


  몰레 블랑코는 크리스마스나 부활절과 같은 특별한 날에 먹는 로스트치킨 요리라고 한다. 하얀 소스가 특징적인 이 요리는 오악사카의 전통 소스로 견과류와 여러 종류의 씨앗들, 화이트 초콜릿으로 풍부하고 꾸덕한 식감을 낸다고 했다. 거기에 오악사카 특유의 아로마틱 한 재료들이 더해져 풍미가 남다르고 한다. 예선에 통과하고 본선에 가면 만들 요리라며 소개한 몰레 블랑코. 가장 기본이 되는 음식의 재료를 적어둔 페이지를 본 것이지만 요리사의 비법 노트를 본다는 점에서 신기하고 반가운 시간이었다. 거기에 그 요리가 평생토록 내가 한 번도 맛보지 못한 전혀 색다른 이국적인 요리라니! 비록 그날의 몰레 블랑코를 맛보지는 못했지만 재료 설명을 본 것만으로도 이미 맛을 본 듯 충만했다. 그러다 문득 비법 노트를 들고 있는 그의 손목이 눈에 들어온 것이다.

 




  포크와 나이프, 그리고 스푼.


   비법 노트를 보았을 때의 반가운 호기심이 그의 문신으로 옮겨갔을 때, 내 시선은 이미 전율에 휩싸였다. 요리를 내어줄 때에 빠질 수 없는 세 가지의 커트러리 세트. 그게 새겨진 그의 손목. 요리를 인생의 전부로 생각하는 셰프의 철칙에 걸맞은 문신이었다.


  "요리는 나의 삶이야. 내 인생을 바칠만한 전부지. 그래서 문신으로 남겼어."


   요리사의 포부는 그의 팔 한쪽에 문신으로 각인되어 언제 어디서나 시선을 함께했다. 그리고 그게 그의 인생을 다잡아주고 있었다.


  과나후아토의 평화로운 오후, 맛있는 냄새에 이끌려 우연히 함께하게 된 그날의 만남. <살사 피깐떼>로 한국의 <고추장>을 느끼며 즐거웠던 셰프들과의 시간은 오감의 흥겨움에 그치지 않고, 나를 무한히 사유하게 했다. 그의 문신은 처음본 그때의 전율 그대로 내 마음에도 새겨져 생생하게 남아있다. 그리고 이따금씩 스스로에게 묻는다. 내 삶에도 내 몸에 새겨 놓고 싶을 정도로 가치 있는 어떤 의미가 생길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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