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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단 독자 May 06. 2024

저녁 식사는 대체 언제 하는 거야?

3월 14일 월요일,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의 마지막 저녁 식사

  '저녁'이라는 시간은 몇 시까지 허용돼야 하는가? 사전적 정의로 저녁은 해가 질 무렵부터 밤이 되기까지의 시간을 말한다. 나에게는 보통 6시 정도에서부터 8시가 저녁, 뭐 9시도 가능하다. 인심 좀 썼다 하면 10시까지도 늦은 저녁이라는 단어로 통용할 수 있겠다.


  그럼 저녁식사의 시간은? 마찬가지로 저녁 식사도 이르면 대여섯 시에 시작하거나 늦어도 7시에서 8시엔 먹어야 하는 거 아닌가? 아까처럼 관용을 베풀자면 9시나 뭐 10시가 지나 먹는 음식도 늦은 저녁식사라 치겠다.


  그러나 시간이 오후 11시가 넘어간다면 말이 달라진다. 단어도 저녁 11시라는 말 보다 밤 11시가 더 어울리잖아. 명백히 11시는 저녁이라기보다는 밤이고 이 시간에 먹는 음식은 저녁식사라기보다는 밤에 먹는 야식이 어울린다. 그렇다. 내가 이렇게 구구절절 저녁의 의미와 저녁식사의 시간에 대해 곱씹는 것은 11시가 다 되도록 저녁식사를 못 먹었기 때문이다. 시간은 이미 내가 생각하는 저녁의 바운더리를 한참 벗어나고 있다.


  밥이야 한 끼 거를 수도 있는 건데, 굳이 먼저 “오늘 저녁은 너를 위한 <바비큐 파티>를 하자!”던 이 집 식구들이 11시가 다 되도록 전혀 “밥 먹자! “는 소식이 없으니 그게 답답할 노릇이다.


  <바비큐파티>는 집으로 돌아오는 길 이뤄진 그들의 제안이었다.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근 2주를 보내다 보니 하루쯤은 근교 여행을 다녀오자 싶은 날이었다. 그렇게 정한 <티그레>는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도심을 벗어나 만날 수 있는 한적한 강가의 유원지였다. 어느 날 거실에서 식구들과 함께 마테차를 마시다 며칠 뒤 티그레에 다녀올까 싶다는 말을 했었다. 그 말을 들은 마리오 씨는 그날 자신도 시간이 된다며 ‘비용’을 내면 티그레까지의 왕복은 물론 거기서 탈 보트까지 제공해 주겠다고 했다. 마리오 씨는 감탄이 절로 나오는 이 멋진 집뿐만 아니라 티그레에 보트도 소유하고 있는 재력가였다.


  대중교통으로 가자면 티그레로 향하는 기차역까지만 해도 삼십 분이 걸리는 거리였다. 거기서 기차를 타고도 한 시간 남짓이 걸리니, 혼자 간다면 족히 한 시간 반은 넘게 걸릴 거리였다. 그러나 자차를 타고 간다면 30분 정도에 도착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집에서 곧장 편하게 이동하며 준비된 보트까지 탈 수 있다니! 게다가 티그레를 잘 아는 현지인인 마리오 씨의 추천 코스대로 티그레를 구경할 수 있는 너무나도 반가운 제안이었다.


  잠시 후 경비를 적어오겠다는 마리오 씨가 제시한 금액은 900페소. 바가지, 바가지, 생 바가지였다. 마리오 씨는 자동차 기름값과 보트 기름값, 거기에 톨게이트비용 등 상세 내역을 꼼꼼히 적어 보여주며 가격에 진심을 표했다.


  혼자 기차를 타고 다녀왔다면 반에 반에 반도 안 되는 가격으로 다녀왔을 거다. 그러나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의 막바지 무렵이기도 했고, 티그레에서 나만을 위한 개인 보트를 타는 메리트도 무시 못하기에 그 정도는 기꺼이 지불할 만했다. 그렇게 편하게 하루를 보내려고 돈을 좀 썼다. (많이) 그때만 해도 마리오 씨가 자신의 친구 둘을 같이 데리고 갈 거라는 것은 몰랐고, 그 친구들이 20대 청년들인 것도 몰랐다. (마리오 씨는 70대가 훌쩍 넘은 노인이다.)


  아무튼, 내가 돈 낸 김에 겸사겸사 마리오 씨가 친구들을 불러 함께 가는 여행이 된 모양새였지만 결과적으로 티그레 여행은 즐거운 데이트립이었다. 그들은 내내 나의 하루를 도와주었고 덕분에 오랜만에 배낭여행자를 벗어나 대접받는 프라이빗 투어를 하는 느낌도 났다. 그렇게 한나절을 보내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나를 위한 <바비큐 파티> 이야기가 나온 것이다. 티그레 데이트립으로 꽤나 많은 비용을 지불했기에 내가 낸 돈으로 친구들까지 함께 여행한 것도 그렇고, 나에게 돈을 너무 많이 받은 게 내심 미안해서 겸사겸사 ‘밥 한 끼 먹자’는 의미인가 싶었다.


   그동안 만나온 남미의 사람들이 대게 먼저 대가 없는 친절을 베푸는 쪽이 많았다면, 아르헨티나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는 철저히 달랐다. 처음 며칠을 묵었던 카우치서핑의 파투네 집에서도 그랬고, 지금 열흘 치 방세를 지불하여 묵고 있는 여기 마리오 씨의 집에서도 그랬다. 마리오 씨는 친절하지만 이번 티그레 일에서도 그렇듯 처음부터 늘 계산이 먼저였다. 집에 머무는 동안에도 철저하게 나를 돈 쓰러 온 관광객으로 여겼다. 그도 그럴 것이 나는 숙박비를 지불하고 그의 집 한 칸을 빌려 묵고 있으니 당연히 관광객이 맞다. 어쩌면 이렇게 이해 타당한 관계가 삶에서는 정확하다.


  앞 선 두 명의 집주인과 부에노스 아이에스 여행 중 마주친 현지인들과의 만남으로 내게 부에노스 아이레스 사람들은 깍쟁이라는 이미지로 각인되어 있다. 여행 중 내가 마주친 부에노스 아이레스 사람들이 100명 정도는 되려나? 아니 200명? 300명? 이렇게 큰 도시에서 내가 만나게 된 몇몇의 사람들 만으로도 한 나라의 문화와 분위기가 느껴지고 그 나라를 판단하게 되는 척도가 되는 것이 놀랍다. 완벽하게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겠지만, 뭐 어때? 내가 그렇게 느껴버린 걸? 지금 내가 보고 느낀 것, 그게 진짜잖아. 그걸 알기 위해 온 것이 이 여행이고.


  그러나 마리오 씨가 거짓말할 인물은 아니란 말이지. 아니, 대체 왜 저녁을 먹자고 안 하는 걸까? 주방을 기웃거려 보았는데 아무도 없다. 마리오 씨는 방에서 나올 생각이 없는 듯 보인다. 잠에 드셨나? 마리오 씨는 70이 넘은 노인이니까 11시가 다 된 이 시간에 자는 게 당연할지도. 그런데 그의 친구들은? 걔네는 나보다도 어린 20대 초반의 청년들이었는데? 얘네 대체 왜 저녁 먹자는 말이 없는 거야?


  내일 아침 떠날 짐을 싸며 오후의 저녁 시간을 물음표가 가득한 기다림으로 보냈다. 아침 비행기를 타야 하니 일찍이 자야 하는데, 저녁 먹자는 말에 저녁을 기다렸더니 벌써 11시가 넘었다. 이쯤 되면 다들 낮의 약속을 잊은 건가 싶다. 배고파서 기다린 게 아니라 그들의 말이 반가워 기다려온 저녁식사다. 이젠 저녁이고 뭐고 내일을 위해 잠이나 자려던 참이었다. 갑작스럽게 티그레에 함께 갔던 친구들이 기쁜 얼굴을 하며 나타났다.


  "단! 저녁식사 하러 올라가자! 바비큐 파티 해야지!"


  엥? 바비큐 파티를 하러 옥상으로 가잔다. 뭐야? 이 시간에????? 그렇게 11시 30분이 다 되어갈 무렵, 마침내 그들은 저녁 식사로 먹자는 바비큐 파티를 위해 화덕에 불을 피웠다.

 

  그날 밤, 아니 그날 저녁은 아르헨티나 인들에게 있어 진정한 '저녁식사'의 의미를 느낄 수 있는 길고 긴 파티였다. 아르헨티나의 사람들은 파티를 할 때 바비큐가 필수다. 그런데 바비큐를 먹는 방법이 좀 독특하다. 준비물은 고기랑 바게트뿐! 잘 구워진 고기를 썰어서 테이블에 올려 두면 그걸 쪼갠 바게트 빵 사이에 싸서 고기빵과 같은 바게트 쌈을 싸 먹는다. 접시도 필요 없고, 포크도 필요 없다. 거기에 심지어 채소도 따로 안 먹는다. 포인트는 이 저녁식사는 우리가 생각하는 저녁보다 한참은 더 늦은 야식에 가까운 시간에 한다는 거다.


  '아! 마리오 씨의 뱃살은 여기에서 비롯되었구나!'


  '아!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는 매번 아침 식사로 손바닥보다 작은 크로와상 한 조각과 커피 한 잔만을 마시곤 하더니......'


  충분히 야식이란 말을 붙여도 무방한 이 늦은 저녁식사의 경험은 그동안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느꼈던 모든 물음표를 느낌표로 만들어 주었다. 이렇게나 늦은 저녁밥을 먹고 자니까, 아침 식사로 빵 한 조각과 커피 한 잔이 충분한 거구나. 식구들이 저녁마다 주방에 없던 이유 또한 나와는 다른 저녁 식사시간 때문이었구나.


  그렇게 평범하게 시작한 밤 11시 30분의 저녁식사는 새벽 2시까지 이어졌다. 그날 밤 우리는 깊어가는 밤만큼이나 두터운 식사를 함께 나눴다. 이런저런 이야기들 속에서는 삶이 묻어나기도 했다. 마지막날이 되어서야 친해졌다고나 할까. 마리오 씨는 다음에 부에노스 아이레스에 오게 된다면 꼭 집에 다시 들르라는 신신당부도 잊지 않았다. 물론 비용은 내야겠지만~~~ 기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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