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해송 May 22. 2024

한 베이비 부머의 호찌민 생활

대학 시절

아무튼 재수 후, 나는 부산대학교 상과대학 (경영학과)에 입학하게 되었다.

정섭이도 같이 합격했다.

서민층이 많이 살던 우리 동네에는 대학교에 입학한 학생들이 많지 않다 보니, 나의 부산대학교 입학은 동네에서 화재가 되었다. 독서실에서도 무척 흥분된 분위기였다. 


대학교에 입학하자마자 내성적인 성격을 외향적인 성격으로, 성격부터 고치기로 마음먹었다.

대학교 같은 학년으로 공부하게 된, 병철, 봉준, 봉철, 시순, 상조 등 중앙고등학교 1년 후배들을 본관 앞 잔디밭에 불러 앞으로 잘 지내자고 악수를 청했다. 같은 반 친구들을 위해 여학생들과의 미팅 주선도 앞장섰다. 재수한 친구들과 각별히 친하게 지내면서 신입생의 특권을 마음껏 누렸다. 


특히, 대학교 후문 근처의 누님 댁에서 학교를 다니던 서현이하고는 거의 매일 붙어 다니다시피 했는데, 서현이 누님 댁에는 내 집 드나들 듯 드나들었다. 누님은 한결같이 환한 미소로 우리를 맞이해 주셨는데, 경제적으로 여유가 없던 나는 서현이 누님이 자주 시켜 주시던 자장면과 중국 요리가 그렇게 맛있을 수 없었다.


수업이 오전에 일찍 끝난 무더웠던 어느 날, 서현과 나는 동시에 눈이 마주쳤다. 오랜만에 번화가인 남포동으로 놀러 나가기로 했다. 우선 그날 서로 지닌 현금을 확인한 결과, 두 사람이 합계 오백 원을 지니고 있었다. 버스는 회수권을 사용하면 되었다. 당시에는 회수권을 구매해서 버스를 탈 때마다 1장씩 내고 타는 시스템이었다. 오백 원만 더 확보하면 파전 안주에 시원한 막걸리를 먹을 수 있었다. 남포동을 한 바퀴 돌았다. 


낯익은 얼굴이 앞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서울 모 사립대학에 진학했던 우리 동네 알짜 부잣집 중 하나인 국숫집 아들 유민이었다. 어린 시절, 우리 동네 아이들이 윗동네 아이들과 야구나 축구시합을 할 때 돈을 걸고 내기를 하곤 했었는데, 나보다 한 학년 아래였던 유민이는, 그 당시 항상 용돈이 풍부했던 우리 동네 물주 중 한 명이었다. 유민이로부터 오백 원을 단숨에 확보한 우리는 대청동 큰길 바로 아래 골목에 위치한 “천우파전” 집으로 향했다.


기분 좋게 막걸리 한 병과 파전을 주문했다. 우리는, 노릇하게 방금 구워진 파전에 막걸리 한잔을 단숨에 들이켰다. 아뿔싸, 이 무더운 여름날씨에 막걸리가 냉막걸리가 아니었다.

이미 한 잔씩 들이켠 뒤라, 어쩔 도리없이 나머지 남은 밍밍한 맛없는 막걸리를 비울 수밖에 없었다.

아쉬운 입맛을 다시고 있는데, 옆 테이블에 앉아 혼자서 소주를 마시던 중년 신사 한 분이 일어섰다.

주인아주머니한테 계산을 하고 있는데, 가만히 보니 그 테이블에 소주 반 병이 남아 있었다.


이게 웬 횡재! 우리는 옆 테이블에 놓여 있던 소주 반 병을 들고 와서, 단숨에 막걸리 주전자에 부었다.

중년 신사분이 앉았던 테이블을 정리하러 왔던 주인아주머니가 갑자기 소리를 지르며 밖으로 뛰쳐나간다. “아니, 이 사람이 소주 반 병 먹는다고 하더니, 소주 한 병을 모두 비우곤 나갔잖아!”

당황한 우리는 순간적으로 막걸리 주전자에 퍼부었던 소주 반 병을 막걸리 잔에 얼른 나누어 붓고 나서 단숨에 잔을 비워 버렸다.

“이 양반이 웬 동작이 이리 빠른 지 잡을 수가 없네.” 주인아주머니가 씩씩거리며 돌아왔다.


천 원을 계산하고 나온 우리는 모퉁이를 돌자마자, 갑자기 취기가 오른 얼굴로 박장대소했다.

훗날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하던 시절, 사과하기 위해 찾아간 그 파전집은 이미 옷가게로 변해 있었다.


신나게 즐기던 재수생 친구들과의 어울림이 다소 식어갈 무렵, 나는 대학 단짝 서현이와 함께 파인트리 클럽 (PTC, Pine Tree Club)이라는 영어회화 클럽 동아리에 가입하게 되었다.


파인트리 클럽은, 1958년 서울에서 인재양성, 사회봉사, 국제친선을 목적으로 창립되었는데, 매주 영자 신문(Weekly)을 발행하고 영어로 회의 진행을 한다. 한국파인트리클럽(Pine Tree Club of Korea) 산하에 국내는 서울, 대구, 부산, 광주 4개 지역에, 국외에는 미국, 캐나다, 영국, 프랑스, 일본, 중국 등에 지부 (Chapter)를 두고 있으며, 지금도 1만 명 이상의 회원(고등학생: Junior회원, 대학생: Regular회원, 대학졸업생 및 일반인: Senior회원)이 활동하고 있다. 


내가 가입한, 부산 파인트리 클럽 (Busan Pine Tree Club)은 부산지역 대학생 연합 클럽으로, 부산 지역 내에 있는 대학생이면 누구나 가입해서 활동할 수 있었는데, 매주 화요일과 토요일 모임을 가졌고, 토요일 미팅은 영어로 진행되었다. 부산 지부에서는 매주 (Weekly) 영자 신문인 “Jupiter”를 발간하곤 했다. 

각 지부 (Chapter)에서는, 계절별로 한 학년에 3명의 회장을 차례로 뽑아 4개월씩 회장직을 수행케 했는데, 회장의 권한은 절대적이었고, 회장이 결정하면 그 누구도 이의 없이 이를 따랐다.


부산 파인트리 클럽에서는, 봄 Term에는 국제친선의 날 (International Goodwill Festival), 여름 Term에는 전국 모임인 Summer Camp, 가을 Term에는 PTC Night라는 행사가 가장 중요한 행사였는데, 각 Term 회장단에서는 해당 주요 행사를 성공적으로 개최하기 위해 학업을 거의 포기할 정도로 준비를 철저히 했다.


나는 1학년 겨울 방학 기간인 12월에, 1979년 1월~4월 4개월간의 봄 Term을 맡을 회장 선거에 출마했다.

1학년인 내가 입후보한다고 하니 여러 선배들이 나의 출마를 만류했다.

봄 Term은 국제 친선의 날 (International Goodwill Festival)이란 대규모의 국제적인 행사를 준비해야 되기에, 클럽(Club, 동아리) 경험과 전년도 행사를 치른 경험이 있는 2학년이나 3학년이 통상 도전하는 회장직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런 대규모의 국제행사를 치르는 봄 Term 회장 이야말로 매력적인 동시에 꼭 도전해보고 싶은 역할이었다.


더군다나 1년 전 봄 Term에서는 우여곡절 끝에 그 행사를 치르지 못한 아쉬움이 남아 있어, 새로 선출되는 회장단에서 이 행사를 치르느냐 마느냐는, 우리 클럽의 중요한 관심 이슈였다.

국제 친선의 날 행사를 반드시 성공적으로 치르겠다는 선거 공약으로, 나는 압도적인 표차로 제37대 회장에 선출되었다. 


매주 화요일 오후에는 “스탭 미팅 (Staff Meeting)”을 했었는데, 스탭 미팅은 스탭만 참석하는 회의가 아니라, 전체 회원들이 지정된 광복동의 한 다방 (커피숍 (Coffee Shop))에 모여 당면한 주요 이슈나 행사에 대해 협의를 하는 시간으로 정확한 내용 전달과 토의를 위해 한국어로 진행되었다.


한편, 매주 토요일 오후에는 서면에 있는 한 외국어 학원 교실을 무상으로 빌려 “레귤러 미팅 (Regular Meeting)”을 했는데, 모든 회의는 영어로 진행되었고, 사회는 회장이 맡았다. 

회장의 공식적인 개회 선언 (Opening Announcement) 후, 몇 사람의 자유 주제 5분 발표 (5 Minute Speech)가 있고, 지정된 주제로 토의를 벌이는 Main Session이 끝나면 게임, 퀴즈, 노래 등을 즐기는 시간을 갖곤 했었다.


마지막으로 전 회장 (Ex-President)의 “Closing Remarks” 시간을 끝으로, 영어로 진행되는 공식 회의가 끝나면, 오후 내내 가졌던 긴장감을 해소하고 회원 간 단합을 위해 우리는 인근식당으로 이동해서 술자리를 갖곤 했는데, 그 시간 (After Meeting)이 너무 좋아 밤이 늦어도 누구 하나 먼저 집으로 돌아가려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매주 발행되는 영자 신문 내용들을 채우기 위해 편집장 (Editor in Chief)과 편집회원들은 매주 동분서주했다.


회원들과 함께 우리 37대 회장단은, 약 3개월간의 치밀한 준비 끝에 4월 7일, 부산대학교 대극장을 가득 매운 관객들 앞에서 제7회 국제친선의 날 행사를 성공적으로 치렀다.

우리는, 6개국의 외국인팀을 초청, 우리의 전통인 탈춤과 영어연극 배비장전을 보여주고, 미국의 록음악, 독일가족팀의 독일민요, 일본의 차 문화 (Tea Ceremony), 중국의 민속춤 등 당시로서는 경험하기 어려운 다양한 외국 문화를, 많은 관객들의 호응 속에 다 같이 공유하는 의미 있고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

3개월간의 나름대로 치밀한 준비 끝에 행사를 성공리에 마친 경험은, 대학 졸업 후 조직생활을 하는 가운데서도 어려운 도전을 즐길 줄 알고 많은 사람들과 공동의 과제를 함께 해결해 가는 지혜의 밑거름이 되었다.


그러나, 회장으로서 최선을 다한 국제 친선의 날 행사가 완료되고 임기를 마치고 나니, 연극이 끝난 뒤 관객이 모두 떠난 무대를 쳐다보는 배우처럼 허전함이 밀려왔고, 공허함은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되돌아보면 나의 대학시절은 동아리인 PTC 생활 그 자체나 다름없었고, 그 경험이 향후 나의 인생에 큰 도움이 되었다는 생각이 든다.


작가의 이전글 한 베이비 부머의 호찌민 생활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