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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송 May 24. 2024

한 베이비 부머의 호찌민 생활

부마민주항쟁 (1)

나는 1979년 10월 16일 발발한 부마민주항쟁의 시발점이 되었던 부산대학교 시위를 주동한 사유로 그날 밤 자정 무렵부터, 그 해 11월 28일 부산구치소에서 석방될 때까지 동래경찰서, 15P 헌병대, 계엄하의 군사재판까지, 젊은 생명마저 앞날을 기약할 수 없는 상태로 참담한 나날들을 보내는 시련을 겪은 적이 있다.


10.16 부마민주항쟁은, 부산대 상대 몇몇 학우들이 순수한 정의감으로, 유신독재에 대한 항거를 기획하고 실행에 옮기면서, 이에 부산대 전체 학우들 및 타 대학 학우들과 부산시민들까지 가세하고, 나아가서 마산까지도 시위가 확대된 민주 항쟁이었다.


 그때 그 시절, 너무나 순수했던, 그 순수함이 학우들 속에 하나 되고 부산 시민들의 메아리가 되어 결국 한 시대의 역사를 마감하게 만든 어마어마한 사건이 되고, 그 당사자들은 휘몰아치는 역사의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 들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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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 많네!” “살아 있는 사람들 많네!”

어둠이 내린 교정 저 건너편에서, 가끔씩 들려오는 원망 섞인 듯한 누군가의 외침이 나의 관심을 끌었다.

아래 조그만 계곡에 서클 (동아리) Park들이 많이 위치한 미리내 다리와 상대 건물 사이로 나 있는, 긴 경사진 길을 걸어, 나는 운동장 방향으로 내려가고 있었다. 

그 외침 소리가 점점 나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너 광민이 아니냐?” “조용한 학교에서 무슨 이유로 혼자서 고함을 지르고 있냐?”

나는 광민이를 데리고 구 정문 앞 다방으로 가서 앉았다.

정광민은 1학년 때 우리 반 친구였으나, 둘이서만 대화를 나누어 본 적은 없는 친구였다. 

그 후 2학년 때 광민은 경제학과로, 나는 경영학과로 가면서 더욱 만날 기회가 없어졌다.

“무슨 일인데?” “네 이야기 한번 들어 보자.”

이렇게 정광민과 개인적인 대화를 처음으로 나누게 되었다. 

1979년 10월 초순경으로 기억된다.


광민은 당시 암울했던 시대 상황에 울분을 토하며, 양심 있는 우리들이 나서야 된다고 주장했다.

그는 잘못된 독재정치를 타파하고 민주화를 반드시 쟁취해야 된다고 강조했다. 

나는 그에게서, 언제든지 어떠한 희생도 감수할 각오가 되어 있는 비장함을 느꼈다. 

“광민아, 네 주장이 옳다. 그러나 방법은 아니다. 네가 주장하고 싶으면 네 주장을 정리해서 당당하게 학우들에게 협조를 구해라. 지금처럼 혼자서, 남들이 모두 비겁하다고 고함을 질러 대는 식으로는 그 누구의 동조도 얻지 못한다.” 


그런 일이 있은 후, 영어회화 서클회장 출신이었던 나는, 여전히 영어회화 서클 생활을 중심으로 나름대로 분주한 나날들을 보내고 있었다.


“태언아, 나 좀 도와주라.” “내일 D-Day로 잡았다.”

1979년 10월 15일 저녁 무렵, 난 집에서 광민의 전화를 받았다.

나는 순간적으로 뇌리를 스쳐 지나가는, 난생처음 느껴 보는 묵직한 공포감을 느꼈다.


이 순간 나는 어떻게 해야 하나?.... 태어나서 대학 2학년 생이 되도록 단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내 인생이 헤어나기 어려운 나락으로 추락하는 어마어마한 시련을 맞이해야 될지도 모를 선택을, 어쩌면 난 강요받고 있었다. 숨죽이며 살아가던 유신 독재 시절이었다. 마음속 불만이 행여라도 입 밖으로 노출될 까봐 주위를 의식하면서, 계란으로 바위 치기라며 많은 사람들이 유신독재체제에 대해 애써 외면하던 시절이었다.


얼마 전 발생했던 YH 무역 여공들의 생존권 보장 요구에 공권력은 무자비한 폭력으로 진압했고, 야당 총재였던 김영삼 총재가 의원직에서 제명되기도 했다.

진리의 전당인 대학 내에도 형사, 보안대 요원들에 의한 학원 사찰이 공공연히 진행되던 때였다.

당시, 이론과 현실의 괴리에 의문을 느끼는 일부 대학생들은, “창작과 비평”, 리영희 교수의 “전환시대의 논리”, “우상과 이성”, 김동길 교수의 “젊은 청년에게 고함”, 조세희 작가의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 등의 교양서적들과 사회과학서적들을 통해 지적 호기심을 달래며 울분을 삭이기도 했다. 


침묵이 흘렀다. 

달포 전 나누었던 광민과의 대화가 떠올랐다.

”좋다! 도와주마!” 

정의를 위해 옳은 일을 하겠다고 어렵게 도움을 청하는 친구를 외면하기 싫었다. 

의리없이 비겁하게 도망가기 싫었다.


10월 16일 아침이 밝았다.

아침 9시 30분, 상대 건물 앞 벤치.

같은 경영학과 친구 서현과 나는 무거운 마음으로 친구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날 서현과 성식의 합류 계기에 대한 정확한 기억은 나지 않는다.


훗날 서현과 성식으로부터 확인한 바에 의하면, 서현은 10월 15일 내 전화를 받았고, 10월 16일 상대 건물 앞 벤치에서 만나기로 서로 가볍게 약속했는데, 통화 시 내 목소리에서 평소와는 다른 분위기를 느꼈고, 뭔가 안 좋은 일이 벌어질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고 했다. 

성식은 정확히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나의 사전 상황 설명과 동참 요청으로, 동참한 것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몇 분 후 무역학과 대표였던 이성식이 나타났고, 이어 마지막으로 경제학과 정광민이 나타났다. 모두 1학년때 같은 반 친구들이었다. (B10반)

상대 건물 앞 벤치 앞에서, 나를 포함한 4명이 다 같이 모이기까지는 몇 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정광민은, 전날 경제학과 전도걸, 경영학과 박준석과 함께 유인물을 제작하느라, 밤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다. 특히 전도걸과는 거의 밤을 꼬박 새웠었다.

당시 나는 전도걸과 박준석이 상대 건물 앞 벤치에 오기로 정광민과 약속되어 있는 줄은 전혀 몰랐었다. 그때까지 두 사람은 나타나지 않았다.


주위를 둘러볼 겨를도 없이, 재빠른 동작으로 광민은 가방에서 유인물 뭉치를 꺼내어 나와 성식에게 건네주었다. 광민에게서 넘겨받은 유인물 뭉치를 받아 든 나와 성식은 그것을 재빨리 각자의 가방 속에 넣은 뒤 종종걸음으로 각자 2교시 수업이 있는 강의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아침 10시에 인문사회관 2층 206호 강의실에서는 경영학과 허화 교수님의 증권 금융론 수업이 예정되어 있었고, 3층 306호 강의실에서는 경제학과 2교시 수업이 예정되어 있었다.

상대 건물 2층에서는 무역학과 2교시 국제경제학 수업이 시작될 무렵이었다.

당시 부산 상대 78학번은 경영학과 120명, 경제학과 80명, 무역학과 40명, 회계학과 40명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나는 인문사회관 206호 강의실 앞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광민이 오기를 기다렸다. 몇 분이 지나, 인문사회관 3층 강의실에서 한 걸음에 뛰어내려 온, 광민이 바로 아래 2층 경영학과 강의실로 뛰어 들어왔다. 

다행히 허화 교수님은 아직 강의실에 도착하시지 않았다.


“여러분! 드디어 때가 왔습니다. 저 유신독재정권에 맞서 우리 모두 투쟁합시다!”


뛰어 들어온 광민이 궐기를 촉구하는 구호를 큰 소리로 외치는 동시에, 나는 학우들에게 유인물을 뿌리기 시작했다. 

평소 학우들과 원만한 친분관계를 맺고 있었던 내가 유인물을 배포해서 그랬는지 모르겠으나, 3~4명의 학우들을 제외한 대부분의 학우들이 긍정적인 호응을 보이기 시작했다.


일이 되려고 하는 것인가? 

산발적으로 웅성거림만 있은 후, 불발 시위로 끝났다고 나중에 들은, 그 전날과는 너무나 판이한 상황이 벌어졌다.

교실에 있던 학우들이 마치 기다렸다는 듯, 분연히 일어나 교실 문을 박차고 나갔다.


그 시간 인근 상대건물 2층에서는, 무역학과 대표였던 성식이, 경영. 경제학과에서 시위를 시작할 예정이기에 무역학과만 빠질 수 없음을 교수님께 양해를 구하고 있었다.

최초 30~40명 정도의 경영, 경제학과 학우들이 운집해 있었던 인문사회관 건물 밖으로 서서히 학우들이 동참하고, 인근 상대 건물로 이동한 뒤에는 백여 명에 가까운 꽤 많은 학우들로 인원이 늘어나, 본격적인 시위의 진영이 갖춰진 상태가 되었다. 


“독재타도!” 상대 건물 앞에서 시작된 시위행렬은 도서관으로 향했고, 광민은 선언문 뒷장에 “자유”라고 검은 사인펜으로 쓴 종이를 높이 들고 대열을 선도했고, 나와 광민은 교대로 구호를 선창하며 대열을 이끌었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불렀고, “자유”와 “민주”로 개사한 노래들도 부르며 행진했다.

시위행렬이 도서관에 도착했을 때에는 학우들의 숫자가 이미 수백 명으로 불어나 있었다.


학우들은 도서관 앞 잔디밭과 벤치 주위에서 애국가, 아침 이슬, 선구자, 교가 등을 부르며 타 학우들의 동참을 촉구했다. 

학우들의 동참을 촉구하던 광민에게 사복경찰 2명이 달려들어 체포하려고 하자, 주위에 있던 학우들이 달려들어 광민을 구출했다. 

사복경찰의 등장으로 자극을 받은 시위 동참 학우들은 스크럼을 짜고 본관과 운동장으로 내닫기 시작했고, 운동장을 돌 때는 어느새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의 많은 학생들이 동참하고 있었다.


“유신 철폐!” “독재 타도!”


바야흐로 부산대학교 10.16 부마민주항쟁의 서막이 시작된 것이었다.

그동안 침묵을 지켜왔던 학우들 가슴속 깊이 묻어 두었던, 양심과 정의를 위한 함성이 폭발한 것이다.

거칠 것 없는 시위 행렬은 계속해서 늘어났고, 학교 밖 시내 진출을 시도했지만, 정문에서 미리 대기 중이던 경찰 기동대의 저항을 받게 되었다.

정문에서 경찰 기동대 대원들과 투석전이 한바탕 벌어지고 난 뒤, 갑자기 정문이 열리고 돌진해 들어오는 페퍼포그 진압부대가 학생들을 더욱 자극하기 시작했다.


학교 안으로 진출한 경찰 기동대의 최루탄 발사가 계속되고, 학우들과 경찰 기동대의 본격적인 쫓고 쫓기는 전투가 벌어졌다.

거의 모두가 난생처음 경험했던 최루탄 공격에 여기저기서 비명소리가 나고, 최루탄 가스로 얼굴이 범벅이 되어 있는 서클 후배의 모습도 보였다.

경찰 기동대의 교정 진입 이후에는 학내에 있는 모든 학생들이 진압대상이 되었고, 이로 인해 시위 규모는 점점 확산되기 시작했다.


누군가가 본관 옥상에서 사복 경찰들과 보안대 요원들이 사진을 찍는다는 이야기를 했다.

광민이 옷을 바꾸어 입자고 했다. 순간적으로 광민을 보호해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광민과 옷을 서로 바꾸어 입었다. 

“광민아, 네가 할 역할은 다했다. 이제 어디로든 빨리 피신해라!” 

몇몇 친구들이 십시일반으로 돈을 모아 광민에게 주었다.

광민을 보내고, 나는 다시 시위대열로 합류했다.


학우들은 여러 개의 통로를 통해 시내 진출을 도모하게 되었다.

우리 시위대열은 사대부고 담장을 뛰어넘어, 학교 밖으로 탈출했다. 시위행렬은 미남 로터리를 거쳐 부산역으로, 부산역에서 남포동으로 이어졌고, 남포동에서도 한 바탕 전경들과 쫓고 쫓기는 시위가 계속되는 가운데, 분노한 시민들까지 합세를 하면서 학생시위가 어느 듯 부산 시민들의 시위로 확대가 되었다.

시민들은 시위 학생들에게 격려와 함께 물과 빵을 제공하기도 하고, 상점 주인들은 경찰에 쫓기는 학생들을 아들 딸처럼 상점 안으로 몸을 숨겨 주기도 했다.


남포동, 창선동, 광복동, 대청동 등을 중심으로 한 학생들과 시민들의 시위대열은 흩어졌다, 다시 모여 시위를 하며 골목골목을 누볐다. 시내는 온통 “독재 타도!”, “유신 철폐!”의 함성으로 뒤덮였다.

그렇게 밤늦도록 시위는 계속되었다.

하루 종일 긴장과 흥분 속에서, 가슴속 응어리졌던 뜨거운 함성과 함께 내달렸지만 피곤한 줄도 몰랐다.

두렵기도 했지만, 양심적인 우리들의 행동은 많은 부산의 학생들과 시민들이 분출하려고 했던 바로 그 행동을 대신했던 것임을 그날 확인할 수 있었다.


늦은 밤 귀가하니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집안은 조용했다.

바로 아래 동생이 잠깐 보자고 했다.

조금 전에 보안대에 근무를 한다고 하는 나의 고등학교 선배라고 하는 사람이 집으로 찾아와서, 내가 귀가하면 아무 소리하지 말고 멀리 피신하라고 일러주고 갔다고 했다.

내가 체포 대상자 1호라고 하면서….


순간적으로 후배를 걱정하는 선배가 진심으로 고마웠다.

당시, 나는 매일 학교 갈 차비 걱정을 할 정도로 집안 형편이 어려운 상태였고, 길기만 했던 격정적인 오늘 하루동안 이루어진 일련의 행동은 내가 선택한 정당한 행동이라고 생각했기에, 내심 걱정은 되었지만 집에 머물러 있기로 마음을 먹었다.


“내가 잘못한 것이 없는데 집을 두고 어디로 가란 말이냐? 걱정하지 마라”

나는 어디든지 서둘러 떠나라고 하는 동생을 안심시키면서, 숨 가쁘게 전개된 하루를 회상하면서 내일을 위해 늦은 잠을 청하고 있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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