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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송 May 28. 2024

한 베이비 부머의 호찌민 생활

부마민주항쟁 (2)

“꽝”하는 소리와 함께 낯선 사람 2명이 집으로 들이닥쳤다. 사복형사들이었다.

“1호 체포 완료!” 나의 신분을 확인하자마자 형사들이 본부에 무전을 보내면서 한 첫마디였다.

짚 차에 태우고 간 곳은 동래 경찰서였다.

이미 수십 명의 사람들이 유치장에 갇혀 있었다.


경찰서에 도착하자마자 형사들은, 핵심 주동자 중 처음으로 체포한 나를 상대로 조사실에서 진술서를 작성하게 했다.

나는 1979년 10월 초순경 정광민과 학교 구 정문 앞 다방에서 시국에 관해 의견을 교환한 일, 정광민으로부터 지원 요청을 받아 유인물을 배포하고 시위를 같이 주도하게 된 점, 부산대 및 교외 시위 전개과정, 내가 한 역할과 행동 등에 대해 있는 그대로 소상히 진술서에 적었다.

형사들은, 같이 부마항쟁을 모의하거나 주동한 핵심인물 3명만 대면 나를 바로 풀어주겠다고 회유했다.


한 형사의 손에는 부산 상대 동급생 명부가 들려져 있었다.

사진을 한 장 한 장 보여 주면서 눈치를 본다. 낯익은 친구들의 사진이 한 장 한 장 지나간다. 

시위에 같이 동참했던 친구를 거명하면, 미안함 때문에 그 친구를 평생 못 볼 것 같았다. 정광민을 제외한 다른 사람들은 모른다고 말했다.

별 소득이 없자, 늦은 오후에 형사들이 경찰서 계단 밑 지하 밀실로 나를 데리고 간 후 육체적 고통을 주기 시작했다. 고난과 시련의 시간이 시작되었다. 


다음 날은 지하 전기 고문실로 데리고 내려간다고 하면서 협박을 했다. 

지하 밀실에서 형사들의 심문이 다시 시작되었다.

“너희들 배후가 누구냐?” 그들은 내가 알지 못하는 재야인사, 종교계인사 등을 거명하며 그들이 원하는 어떤 큰 그림을 요구하는 것 같았다. 대답할 것이 없었다.

그들은 손바닥과 주먹, 구둣발과 경찰봉으로 나의 전신을 기술적으로 타격했다. 그들에게 나는 아무 대항력 없는 한 마리의 짐승이었다. 사지가 축 늘어지고 순간 정신을 잃었다.


“1호”라고 생각했던 나한테서 답을 얻지 못하자, 그들은 내가 대단한 각오로 배후를 숨기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 같았다.

도피한 광민이 아직 체포되지 않았기에, 이번 사태에 대해 관련 당국에서는 아직 상황 파악이 전혀 되고 있지 않은 것 같았다. 

나는 순간적으로, 시위를 함께 주도했던 친구들이 멀리 피신하길 바랐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그 당시 시위와 전혀 관계없어 아무 문제가 없을 것으로 생각하고 평소 자주 만나던 사람으로 이름을 댄 동네 여자친구가 대신, 영문도 모르는 상태에서 조사를 받는 불편함을 겪었다고 한다. 

또한, 당시 미국유학을 다녀오신 분으로, 너무나 개방적이시고 제자들에게는 무한한 신뢰와 애정을 보여주셨던, 그래서 내가 평소 무척이나 많이 존경하던 영어 회화 서클 지도교수님도 아무 이유 없이 나 때문에 경찰서에 불려 가는 불편함을 겪으신 사실도 나중에 알았다. 

아직도 미안한 마음을 간직하고 있다.


동래 경찰서 유치장에는 시간이 갈수록 더 많은 사람들이 잡혀 왔다.

일부 시민들은 학생이 아니라는 이유만으로도 가혹한 폭행을 당하기도 했다. 


다음날, 형사 1명이 나를 부산대학교로 데리고 갔다.

격동의 그날, 10월 16일 내가 급우들에게 돌리고 남은 유인물을 교탁 뒤에 던져두었다고 이야기함에 따라, 그 형사가 유인물 증거물을 수집하기 위해 그날 수업이 있었던 강의실 교탁 뒤를 조사했다. 유인물은 없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친구 1명이 남은 유인물을 추가로 급우들에게 돌렸다고 한다. 


“엄태언이한테 또 한 방 먹었군, 두고 보자.”

그날 대학교 정문 앞에는 탱크가 배치되어 있었고 길에는 사람 한 명 보이지 않았다.

사태가 엄청 심각하게 돌아가고 있음을 느꼈다. 비상계엄 상황이었던 것이다.

형사들에 의한 심문과 무자비한 폭행은 이날도 계속되었다. 


육체와 정신의 인내력이 점점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더 이상 저항할 힘도 의식도 없어졌다.

이렇게 계속 맞다가 여기서 죽을 수도 있겠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존재하지도 않는 불순세력의 조직도가 만들어졌다는 소문도 돌았다.

순간적으로 죽음의 공포와 함께, 몸에서 소름이 돋았다. 


그날 이후 한동안 나를 다시 부르는 형사가 없어 의아하게 생각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정광민이 자수해서 동래경찰서에 들어왔던 것이었다.

정광민의 자수 이후, 시위의 모의과정과 최초 시위전개과정을 어느 정도 파악한 후로는 나에 대한 형사들의 폭행과 심문은 많이 줄어들었다.


들어온 정광민도 물고문을 수 차례 받고, 인근 대동병원에서 응급치료를 받고 왔다는 이야기가 유치장 내에 전해졌다.

밤이 되면서 앞날을 예단할 수 없는 괴로운 심정과 공포감에, 어떤 사람은 일정 거리에서 뛰어와 유치장 콘크리트 벽에 머리를 부딪히면서 심한 자해를 가하기도 하고, 혼미한 정신으로 철망을 오르는 정신장애 증세를 보이기도 했다.

유치장 안에 갇혀 있는 학생들의 부모님들은 하루가 멀다 하고 경찰서를 방문, 찢어지는 가슴을 부여안고 바깥 먼발치에서 자식들의 안위를 걱정만 하시다가 발걸음을 돌리시곤 했다.


그런데, 그 후 며칠이 지난 어느 날, 경찰서 전체가 술렁이기 시작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시해되었다는 뉴스가 나왔다.

10월 26일이었다. 믿기지가 않았다. 유신의 심장이 쓰러진 것이다. 

장기집권을 위한 7년간의 무리한 유신체제의 고수, 그리고 이를 통한 정치적인 탄압과 인권 유린을 서슴지 않았던 독재 권력자가 한 시대의 종말을 고한 것이었다. 

많은 젊은이들이, 또한 양심 있는 민주인사들과 지식인들이 그렇게 오랫동안 원했던 유신 독재체제의 종말이 다가오는 순간이었다.


이제 드디어 대한민국에도 민주화가 오는 것인가? 아니면 또 다른 형태의 독재체제가 올 것인가?

이번 사태로 인해 우리에게는 어떠한 시련이 닥쳐올 것인가? 

이런저런 생각이 뇌리를 스쳐갔다..

동래 경찰서를 떠나는 마지막 날, 형사 1명과 마지막 대면을 했다.

“너 앞으로도 데모할 거야?” “저는 사회가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판단되면 또 데모를 할 겁니다.” 


동래 경찰서에 구금된 지 열흘 정도가 지난 어느 날, 우리는 양정에 있는 15P 헌병대로 이송되었다.

무슨 이유로 군 헌병대로 이송이 되어야 되는지도 모르는 채.

우리의 운명은 우리의 의도나 의사와 전혀 관계없이, 아무것도 알 수 없는 가운데, 안타깝게도 먹구름 속을 헤매고 있었다.


15P 헌병대에서는, 중간 통로를 사이로 양쪽에 침상이 있는 한 개의 내무반에 30명 전후 정도의 구속자들이 같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헌병대에서는 동래 경찰서에서 보냈던 고통스러운 나날들에 비하면, 잠이나마 그래도 누워서 청할 수 있었다. 화장실은 헌병대원의 통제하에 그룹으로 갔다 와야 했다.

헌병대에서는 1~2번의 조사를 받았다.


같은 내무반에 있었던 당시 고신대 학생 (이일호 목사)이, 우리들 중에 누가 언제 어디로 불려 갈지도 모르는 불안한 하루하루에 희망의 불씨를 살리기 위해 매일 기도를 해 주었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다른 한 사람은 침울한 분위기를 호전시키기 위해 노래를 가르쳐 주기도 했는데, 다 같이 그 노래를 부르면서 잠시나마 분위기를 반전시키기도 했다.

“하늘이 울어야만 사나이가 운다던데 ~~” 


15P 헌병대에서 1~2주 정도 보낸 이후 나는 부산 구치소로 이송이 되었다.

어떤 사람이 어디로 이동이 되었는지는 기억이 나질 않는다.

부산 구치소에서 같은 방에 수감된 사람들 중에 기억이 나는 사람은 이진걸, 이현오, 이주홍 등의 학생들이다. 같은 방에 수감된 대부분의 사람들은 외부에서 보내 준 책을 읽으면서 시간을 보냈다. 

나도 서클 동기생이 보내 준 책을 읽으면서 시간을 보냈는데, William Somerset Maugham(윌리엄 서머싯 몸)의 “인간의 굴레”를 감명 깊게 읽은 기억이 난다.


이후 계엄사령관이 재판장인 군법재판이 열리고, 나는 최종적으로 공소기각 판정을 받았다.

그때, 동아대학교 학생회장 출신 학생도 같이 재판을 받은 것으로 기억된다.

그리고, 나는 그 해 11월 28일 부산 구치소 문을 나와 집으로 돌아왔다.

동래경찰서에 구금된 이후 15P 헌병대와 부산 구치소 생활을 거쳐 한 달 열흘만 이었다.

세상에 다시 태어난 기분이었다. 


그러나, 그 이후에도 10.16 부마민주항쟁 관련 구속자란 이유만으로, 군 복무 중이던 1980년 5월 18일, 당일 발발한 광주민주화운동의 예비 검속으로, 부산 망미동 소재 삼일공사라고 불리던 보안대에 끌려가서 약 1주일가량 구금되는 고통을 겪기도 했다.


1979년 11월 28일 부산 구치소에서 풀려 난 뒤부터 그 해 12월 9일 군에 입대할 동안, 그리고 입대후까지도 끈질기게 우리 집으로 출근하다시피 했던 형사의 사찰로 인해, 결국 스트레스를 받은 아버님은 뇌졸중 증세로 쓰러지셨고, 오랜 병고 후 아버님이 돌아가신 후, 어머님도 3년 후 동일한 병명으로 돌아가시는 비극도 맛보았다.

두 분께 불효에 대한 용서를 다시 한번 진심으로 표하고 싶다.


구치소에서 출소한 뒤 세월이 40년 넘게 흘렀지만, 동래경찰서, 연산동 15P 헌병대, 보안대 등을 거치는 동안 쌓였던 극심한 공포와 악몽이 반복되는 트라우마도 30년 이상 경험했다.


그렇게 세월은 흘러, 10,16 부마민주항쟁도 역사와 사람들의 뇌리에서 서서히 잊혀 가고 있는 것 같다.


이러한 부마민주항쟁은, 권력을 찬탈한 전두환, 노태우 군사정권 이후, 3당 합당에 의해 탄생했던 회색 빛 정체성의 김영삼 정권도, 부산운동권 주도세력이 참모로 포진되었던 노무현 정권을 포함한 민주정권에서도 오랫동안 관심을 받지 못했다.


그리고, 이후 박근혜 전 대통령은, 오직 대통령 당선을 위한 득표를 위해 어쩔 수 없이, 부친의 유신장기독재에 항거했던 부마민주항쟁의 진실규명과 관련자 명예회복을 공약사항으로 내세웠는데, 집권시절 최초의 부마민주항쟁 진상규명 위원회가 설립된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이다.

물론 그러한 위원회가 제대로 주어진 역할을 했을 리가 만무하다.


한편, 진상규명 위원회의 소극적이고 지지부진한 활동 속에, 일부 부산운동권 세력과 인사들은, 부마민주항쟁의 배경과 관련, 부산운동권 관련 조직과 이념서클들을 부마민주항쟁의 주요한 핵심배경으로 가장 먼저 등장시키거나 부마민주항쟁과의 허구적 연계를 삽입시키려는 불순한 덧 칠을 시도해 왔다.


그동안 그들은, 마치 그들이 부마민주항쟁을 주도해서 기획, 실행에 옮긴 것처럼, 부마민주항쟁과 관련된 역사적 기록들을 자의적으로 왜곡, 조작해서 제작, 배포해 왔고, 부마민주항쟁의 재평가가 시작되면서 명예와 이권에 독점적으로 개입하려는 조짐을 보여 왔다.


부마민주항쟁 진상규명 위원회의 활동은, 진정한 진실규명 의지가 없었던 박근혜정권에서나 이후 정권들에서 마저도 방향성과 활동성에 있어 미약하기 그지없었고, 항쟁 핵심 피해자이자 관련자들의 수차례에 걸친 공식적인 항의와 기자회견까지도 무시하고, 진상규명 위원회에서는 무성의하고 부실하고 왜곡된 보고서를 준비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왔다.


문재인 정부로부터 공식적으로 자금지원을 받고 설립된 부마항쟁재단도 진실규명과 관련자들의 명예회복, 이와 관련된 사업추진이란 설립목적에 부응하지 못하고, 핵심 관련자들의 참여나 목소리에도 진지하게 귀 기울이려는 노력이 많이 부족했던 것 같다.
 
세월이 흘러 정권이 몇 번 바뀌어도, 그때 최초 시위를 준비하고 실행에 옮긴 부마민주항쟁의 주역들인 상대 그룹 멤버들은 순수함을 잃지 않고 각자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충실히 살아왔기에 나는, 젊은 날 대한민국의 민주화를 위해 조그만 저항을 나름 실천에 옮긴 그때 그 일원으로서, 그때의 일을 진심으로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세월이 더 가기 전에 후배들을 위해서, 또한 올바른 역사의 기록을 위해서, 이제라도 10.16 부마민주항쟁에 대한, 사실에 근거한 진실 규명이 제대로 되어야 된다고 나는 생각하며, 그 암울한 시대에 용기 있는 행동의 대가로, 이후 오랜 세월 동안 육체적, 정신적 고초를 겪어 왔던 부산, 마산 학생들, 시민들에 대한 완전한 법적, 사회적인 명예가 회복되어야 함도 당연한 민주국가의 책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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