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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송 May 19. 2024

한 베이비 부머의 호찌민 생활

재수 시절

재수를 하게 되었다.


경제적으로 어려웠던 부모님은 이 참에, 내가 취직을 하길 원하시는 눈치였다.  

난생처음으로 부모님 말씀을 단호하게 거부하고, 고등학교 친구들과 대신동에 있는 경남학원에 등록을 하게 되었다.


몇 개월이 지나지 않아 고등학교 친구들은 서울 종로학원으로 옮겨 공부를 하자고 했다.

종로학원으로 옮긴 호찬이는, 서울로 가지 못한 나에게 난해한 종로학원 수학문제와 풀이를 우편으로 보내주기도 했다.


신경성 위장병 증세가 계속되어 학원 수업에서 스트레스가 쌓이고, 수업료도 부담이 되던, 나는 집에서 공부를 하기로 했다. 대문 정문 맞은편에 새로 만들어진 조그만 방에서 혼자 지내는 날이 계속되었다.

어는 날 서면학원에서 재수하던 영석이가 나를 찾아왔다. 충무에 있는 절에 가서 공부를 하자고 한다.

절이라고 하면 환경도 괜찮을 것 같고, 친구와 같이 공부를 하니 그다지 적적하지도 않을 것 같아, 그것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한테 승낙을 받고, 영석이와 충무로 향했다. 당장 필요한 책가지들과 속옷도 조금 챙겼다.

충무에 도착한 영석이는 그곳에 살고 있는 친척 누나를 만났고 오랜만에 만난 그 친척 누나는 영석이에게 후한 용돈을 쥐어 주었다. 이름 모를 산 위에 있는 절로 향한 우리는 절 주위를 한번 둘러보았다. 잠시 생각에 잠겼던 영석은 나의 눈치를 보다가, “가자!”라고 말했다. “어디로?” “부산으로 돌아가자!” 영석이는 당초부터 절에서 공부할 생각이 없었고, 바람이나 쐬고 싶었던 것이었다.


어이가 없이 도깨비에 홀린 기분이었던 나는 부산으로 가는 뱃전에서 오징어무침과 섞박지가 맛깔나게 어우러진 충무 김밥을 맛있게 먹으며, 영석이한테 처음으로 속았다는 느낌을 받고 헛웃음을 지었다. 어처구니없는 해프닝이었다.


얼마 후, 나는 송도 아랫길에 위치한 “대법사” 경내에서 운영되고 있던 독서실에 등록했다.

절 내부에 위치한 독서실인 만큼 이용하는 사람들도 많지 않았고 조용한 분위기도 마음에 들었다.


부산고등학교를 졸업한 중학교 동기 석래도 어떻게 알고 그곳에 왔다.

그곳에는 삼수생들도 있었는데, 석래와 나는 기싸움에서 밀리지 않으려고 인근 시장통 술집에 가서, 삼수생들이 권하는 담배를 물고 뻐끔 담배를 피우기도 하고 동동주라는 술을 마시기도 하였다.

재수 시절 친하게 지내던 주백이도 그때 만났고, 초등학교 동기 정섭과 인근 동네 친구 병조, 규태도 그때 만났다. 


독서실에서는 스님 한 분이 통제를 했는데, 다소 자율적인 분위기였다.

독서실에는 사법고시 공부를 하는 이 씨 성을 가진 성균관 법대 출신과 행정고시 공부를 하는 손 씨 성을 가진 독서실장도 있었는데, 이 씨 성의 형님은 주백이와 가끔 바둑을 즐기기도 했다.


나는 주백, 병조 등과는 가끔 인근 등대로 산책을 가기도 하고, 막걸리를 같이 마시기도 했는데, 가정 형편상 고등학교를 다니다 자퇴 후 대입 검정고시를 본 정섭은 독서실에서 제일 열심히 공부하는 학생이었다.

재수생들은 담으로 구분된 여자 독서실에서 공부하는 고3학생들로부터 담 너머로 라면을 얻어 끓여 먹기도 했다.

집으로 가지 않는 몇몇 사람들은 밤에 의자들을 모아 잠을 자기도 했다. 나도 그중 한 사람이었다.

그렇게 나의 재수 시절은 큰 의미 없이 덧없이 흘러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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