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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운대 줌마 Jul 04. 2024

내 인생 최대 흑역사 생성기

아무튼 정리정돈

세월이 약이라는 말이 있다.

제 아무리 부끄러운 실수도 오랜 세월이라는 묘약을 먹고 나면 

재미나고 우스운 경험담으로 재탄생되나 보나.


수년 전에 지인들과 6박 7일간의 호주여행 중의 일이다

북섬 3일 일정을 마치고 항공편으로 남섬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비행기 탑승이 완료되고 이륙만을 기다리고 있을 때다.




‘무슨 문제라도 생겼나?’

사람들의 웅성거림으로 기내는 시끌시끌하다.


고개를 쑥 빼서 출구 쪽을 내다봤다.

방금 전까지 방긋방긋 미소 짓던 승무원들의 표정이 잔뜩 굳어 있다.

한 승무원이 종종걸음으로

좌석 통로를 황급히 걸어온다.


승무원이 눈 길이 내 좌석 부근을 향해 있는 것 같았다.

나를 향해 다가오는 것 같은 불안한 느낌이 잠시 스친다. 


불행히도 내 예감은 적중했다.

내 옆 통로에 뚝하니 멈춰 섰다.


파란 눈을 있는 대로 크게 뜨고 

뭐라 뭐라 영어로 다급하게 말한다. 

무슨 말인지 도통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안 그래도 짧은 영어 실력에 당황하니까 머릿속이 하얘졌다.

정확히는 모르지만 내가 무슨 실수를 한 것임을 알아차렸다.

  

“캐리어 넘버 말하란다.” 

일행 중 한 명이 소리친다. 

     

아뿔싸! 이를 어째?

그제서야 휴대폰 충전기를 캐리어에 넣고 짐을 부친 것을 알고 화들짝 놀랐다. 

캐리어 넘버를 알려주자 승무원은 되돌아갔고, 

잠시 후 비행기는 이륙했다.  


   



캐리어를 북섬 공항에 남겨 둔 채 남섬으로 몸만 출발하게 되었다.

'캐리어를 압수당한 여자'라는 불명예스러운 닉네임만을 안고서

   

얼굴만 아니라 온몸이 부끄러워 홍당무가 된 것 같았다. 

시쳇말로 쪽팔려서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비행 내내 사고 제대로 친 사춘기 소년처럼 고개가 자꾸 수그려졌다.    

 

휴대폰 충전기는 캐리어에서 꺼내 버려질 거고, 

다음 비행기로  남섬 공항에 보내진다는 가이드의 말을 듣고 나서야 

걱정스러운 마음이 다소 진정되었다.

더욱 다행인 것은 남섬 공항 근처에서 하루를 머물게 되어 큰 문제는 없었다.  



   


휴유! 십 년 감수했네! 

빵빵한 에어컨도 소용 없었다. 

식은땀이 등줄기를 타고 흘렀다.


아마도 내 인생 최대 흑역사가 될 것 같다. 흑흑     


캐리어를 못 찾을까 봐 불안했던 걱정이 일단락되자, 

충전기를 찾으려고 캐리어 속의 짐들이 샅샅이 뒤져질 생각을 하니 

또다시 심란해졌다.  

    

35도를 넘나드는 불가마 같은 호주의 여름 날씨였다.

혹시 땀 냄새나는 속옷이라도 대충 쑤셔 넣은 건 아닐까? 

머릿속은 몇 시간 전에 짐을 꾸린 캐리어 안을 수도 없이 스캔하고 또 스캔해 본다. 

    

벌거벗은 속살을 남에게 보이는 것 같은 수치심이 확 밀려온다. 

들뜬 여행의 기분도 싸늘하게 식어가는 느낌이다. 

검열하는 항공사 직원을 죽을 때까지 볼 일이 없다지만 

불편한 마음은 쉽게 사그라들지 않았다. 


주위를 둘러보니 일행들은 좀 전에 있었던 일은 

까마득하게 잊은 듯 잠에 곯아떨어져 있다.


'그래! 이왕 벌어진 일 받아들이는 수밖에 도리가 없다.

다시는 이런 실수 반복하지 말아야지.'

마음을 애써 다독이며 눈을 감았다.

잠이 오기는커녕 정신이 되려 말똥말똥해졌다. 


     



불현듯 응급실 근무 간호사의 체험담이 떠올랐다.

노인들이 갑자기 응급실에 실려 오면 옷을 벗지 않으려고 해서 애를 먹는다고 한다. 

이유인즉 오래 씻지 않고 속옷을 제때 갈아입지 않아서 민망해서 대부분 그렇다고들 한다.  

    

한 지인은 해외여행 시에 갑자기 공항 경찰대가 캐리어를 열어라고 요구해서 

무척 당황스러운 일이 있었다고도 한다.


비행 짐꾸리기 실수와 연관된 이야기들이 비엔나소시지처럼 줄줄이 나온다.

머릿속에서 기억들이 불꽃놀이를 한 판 벌이고 있다.

떠올랐다가 사그라졌다가…….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게 우리네 인생이다.

언제 어디서 어떤 상황에 처할지도 모른다. 

인생 공식 하나를 

이국만리에서 찐하게 징하게 터득했다.  


   

여행에서 돌아오자마자 

작심하고 캐리어용 파우치를 크기별로 구입했다.    

 

나만의 여행 백서가 생겼다.

아무리 피곤해도 그날 입었던 속옷은 빨아서 밤새 말린 다음 지퍼백에 넣는다.


캐리어 짐은 파우치를 활용하여 종류별, 용도별로 구분하여 정리한다.

항시 검열받을 준비된 훈련병처럼. 

 



그러고 보면

실수가 다 나쁜 것만은 아닌가 싶다.

치명적이지만 않다면 말이다.


배움이 꼭 책 속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인생 경험이 다 배움이고, 

공부다. 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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